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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에 연재되었던 엠엠재즈 재즈이야기 컨텐츠들을 이전하였습니다.
글: 최범 | 재즈를 사랑하는 산부인과 의사(서울의료원)

엠엠재즈

As Time Goes By 2

kiss 3 그 뒤로 1년 뒤 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다니던 여대에서 봄 축제가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맞이한 축제라서 기대를 많이 했지만 그녀는 나를 시내로 불러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술을 마시자는 것이었다. 그전에도 몇 번 마셔보았지만 그녀의 주량은 엄청났고 난 절대 취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 날은 한번 취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양주를 사려고 했지만 돈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캡틴큐나 나폴레옹을 먹기에는 어쩐지 축제의 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고심해 고른 것이 그보다 조금 비싼, 진토닉을 만드는 주니어라는 술이었다. 

진토닉을 한 병 사서 품에 숨기고서는 지금은 없어진 명동의 ‘Seagull’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커튼이 쳐진 자리가 있었다. 그 은밀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진토닉을 한잔씩 시켰다. 가지고 간 술을 계속 부어 먹을 생각이었다. 나는 홀짝 홀짝 마시고 있는데 그녀는 한번에 다 들이켰다. 얼음까지 오도독 씹어가며 ‘무슨 술이 물 같냐?’ 하더니 빈 잔에다 가지고 간 진토닉의 재료가 되는 원액을 가득 따랐다. 거의 반병이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또 단번에 마셨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괜찮니?’ 라고 물으니 ‘응, 난 술이 너무 센가봐,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것이다. 그러더니 나머지도 한번에 다 마셔버렸다. 한참을 기가 막혀 하다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녀는 인사불성이 되어있었다. 테이블 위는 물과 술이 엎질러져 술잔과 물 컵이 뒹굴고 있었고 그녀는 자꾸 바닥에 누우려고 했다. 테이블을 치우고 그녀 옆에 앉아 부축을 해주었다. 업고 집에 데려가자니 집도 모르고 전화해서 데려가라고 하기도 무책임한 것 같아 일단 어느 정도 정신차릴 때까지 있기로 했다. 의식이 없는 그녀가 눈도 뜨지 못하고 내게 뭐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고 자꾸만 바닥에 누우려고만 했다. 어깨를 부축이며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삼십 분쯤 지나자 몸을 약간 가누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야, 너!’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두 팔로 목을 끌어안고서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엄마를 찾기도 하고 내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또 얼마간 시간이 지나더니 대뜸 ‘그래, 네가 키스하고 싶다는 거 다 알아. 내가 못 할 줄 알고.’ 하더니 정말 키스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제력을 잃어 입술이 아플 정도로 부벼댔다. 술 냄새가 많이 났다. ‘아냐, 이게 아냐. 내가 꿈꾸어왔던 첫 키스는 이런 게 아냐!’하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첫 키스의 떨림도 감미로움도 없이 일어난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었다.

kiss 4 그 후 2년이 지났다. 의대는 시험이 길어 학교 축제가 늘 시험기간 중에 있었다. 축제기간 중에는 텅 빈 도서관에 군데군데 같은 과 친구들만 앉아서 공부를 하고있고 바깥은 축제에 젖은 노래 소리, 고함소리, 스피커 안내 방송 소리들이 얽혀 시끌벅적했다.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금요일에 시험을 보고 다음 시험이 월요일이라 다들 지쳐 집에 갈 때 나는 피곤한 몸이지만 금요일 하루만이라도 축제에 어울리기로 했다. 미리 동문 후배를 협박하다시피 해서 금요일 밤에 정태춘, 해바라기, 노찾사 등이 출연하는 공연에 같이 갈 파트너를 구해달라고 했다. 같은 학교 미대생이었다. 

‘형, 여학생들은 2말 3초 때 제일 약해. 잘 해봐.’ 라는 후배 녀석의 말에 용기를 내 부단한 노력으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마치 전부터 만났던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잔디밭에서 동동주도 마시고 사물놀이 구경도 하고 물 풍선 터트리기도 하다가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이 한참 무르익어 가자 사회자가 관중들 모두 어깨동무를 시키고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이 가고 노래가 끝났지만 손을 내려놓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그녀에게 그림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녀의 작업실은 작지만 아담했다. 그녀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카세트를 틀었다. 불빛은 스탠드 하나가 전부였다. 멀리서 술 취한 노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는 그녀가 요즘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샤데이의 ‘Haunt Me’가 흘러나왔다. 어쿠스틱 기타의 애절한 전주 끝에 블루지하면서도 섹시한 샤데이의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 다시 손을 얹었다. 한참동안 서로 눈을 쳐다보았다.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해부학시간에 배운 손목의 동맥위치에 손가락을 대보니 매우 빠른 속도의 심박동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바닥을 내 가슴에 대었다. 내 심장도 뛰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그녀의 눈 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kiss 5 또 다시 몇 년이 지나 나는 산부인과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날은 일이 잘못 꼬여 주치의였던 나와 인턴이 호되게 꾸지람을 받았다. 기분이 매우 우울했다. 하지만 그 날은 모처럼 만의 비번이었다. 학생 때 같은 서클 후배라 잘 따르던 여자 인턴도 함께 비번이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우리는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집에 갈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우울할 때는 그저 신나게 스트레스를 다 흔들어 털어 버리는 것이 최고라고 말하면서 나이트클럽에 가자고 했다. 나이제한과 경제적인 형편을 고려해 간 곳은 하얏트 호텔의 J.J.Mahony 클럽이었다. 

그곳의 바는 맥주 한 병만 마셔도 마음껏 놀 수 있었다.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면서 둘이서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모든 걸 털어 버리듯 흔들었다. 머리 속이 텅 비어지는 느낌이었다. 신나는 음악이 끝나고 느리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둘씩 껴안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도 특별히 돌아갈 테이블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연스레 춤을 추게 되었다. 한 손은 그녀의 어깨 위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둘렀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가 잡고 있던 손을 허리께로 가져다 놓고서는 두 손으로 나의 목을 휘감았다. 

둘 사이가 매우 밀착되어 좀 전의 격렬한 춤 뒤에 고동치는 심장이 느껴질 정도였고 시선은 자연스레 마주보게 되었다. 한참을 그 상태에서 마주보며 춤을 추고 있노라니 불빛에 비친 약간 상기된 그녀의 볼이 예뻐 보였다. 지옥 같은 병원에서 빠져나온 해방감과 더불어 함께 혼이 났다는 동질감이 서로가 서로를 가깝게 느껴지게 해주었다. 그윽하게 쳐다보던 그녀의 눈빛이 반쯤 감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이 반쯤 감기면서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고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차가운 입술이 닿았지만 속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희미하게 맥주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스텝도 그 자리에서 천천히 흐느적거리며 빙글빙글 맴돌 뿐 특별히 춤이라고 할 수 없었다. 눈을 감으니 세상이 온통 하얀 느낌이었다. 단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자, 우린 같은 고통을 안고 있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열중하고 있었고 키득거리며 쳐다보던 주위의 커플들도 어느덧 키스를 하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키스의 물결이 온 무대에 퍼지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kiss 6 영화가 끝나고 줄리 런던의 음반을 틀었다. 음악적으로 더 완성도 높고 훌륭한 연주도 많지만 그녀가 부르는 ‘As Time Goes By’가 훨씬 더 달콤하고 매혹적이면서도 애절하고, 연인과 밀회를 즐기는 듯한 농염한 느낌을 준다. 나른한 기지개를 펴고 소파에 길게 누워 눈을 감아본다. 어느새 나는 다시 릭이 되어 애타는 심정으로 잉그리드 버그만의 별빛 같은 눈망울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여인이라면 한번의 키스에도 목숨을 걸 수 있으리라. 이렇게 사랑하는데 키스도 없이 떠나보낼 수는 없다. 그녀 옆의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하려고 고개를 숙인다. 샘 대신 줄리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한다.

 


You must remember this
이것만은 기억해주세요
A kiss is still a kiss a sigh is just a sigh 
그때의 키스도 한숨도 그대로 간직하고있지요.
The fundamental things apply as time goes by...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아요...
엠엠재즈

안녕하세요, 엠엠재즈 웹사이트 관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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