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베이(Andy Bey) 추모칼럼 - ‘오직 자신만이 반주할 수밖에 없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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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오직 자신만이 반주할 수밖에 없는 노래
앤디 베이(Andy Bey) 1939.10 ~2025.4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음악팬이라면 한 음악인의 부고 소식에 유달리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지난 4월 26일 미국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앤디 베이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내게 미지의 인물이었고 그래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경이로움은 특별했으며 그럼에도 그는 쉽사리 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1993년에 발매된 호러스 실버의 앨범 [It’s Got To Be Funky](Columbia)를 통해서였다. 이 앨범에는 네 곡의 보컬 넘버가 실려 있었는데 그중에는 그 유명한 <Song for My Father>의 새로운 버전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곡들은 모두 다 앤디 베이에 의해 불렸다. 하지만 당시에는 <Song for My Father>의 보컬 버전 그 자체가 내게 어색했으며(아무래도 그때는 1964년 블루노트의 오리지널 버전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수의 노래도 내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 무렵에 데이비드 머리의 1991년 작 [David Murray Big Band conducted By Lawrence ‘Butch’ Morris](DIW)를 통해서도 앤디 베이의 목소리를 우연히 만났는데 하지만 호러스 실버 음반에서 만났던 평범한 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후였다. 프레드 허쉬의 1996년 작 [Passion Flower: Fred Hersh Plays Billy Strayhorn](Nonesuch)은 제목 그대로 빌리 스트레이혼의 작품집으로, 그 가운데서 유일한 보컬 넘버인 <Something to Live For>는 허쉬의 피아노 반주 위에 자유롭게 노니는 앤디 베이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베이는 명확한 발음으로 가사를 전했고 비브라토는 섬세했으며 낮은 바리톤 음성으로 시작된 노래는 마지막에 이르러 팔세토 창법으로 자연스럽게 고음에 안착했다. 그 감동은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반주)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으며 앤디 베이의 노래를 통해서 나는 이 노래에 숨어 있는 깊은 외로움을 비로소 실감했다.
그리고 결국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2004년 앤디 베이의 앨범 [American Song](Savoy)의 첫 곡 <Never Let Me Go>의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나는 재즈 역사상 최고 반열에 오른 가수의 목소리를 이제야 제대로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호러스 실버의 앨범을 통해 처음 듣게 된 앤디 베이의 진가를 알게 되기까지 11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었다. 앨범을 듣자마자 온라인에서 그를 검색했고 그가 동성애자이며 심지어 HIV 양성 반응자라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스트레이혼-허쉬-베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끈이 내 눈에 들어왔다.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의 1996년도 발매작. 앤디 베이가 Something to live for 1곡 보컬 피처링 했다.
11년 만에 알게 된 그의 진가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과 건강상의 문제를 자신의 두 번째 솔로 앨범이자 22년 만의 앨범 [Ballad Blues & Bey]를 발표했던 1996년에 스스로 밝혔다(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91년에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지만 이 앨범은 대부분의 나라에 소개되지 않았다). 그 점은 그가 그토록 탁월한 재즈 가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료 음악인들과 소수의 팬들에게만 알려졌던 이유를 부분적으로 말해 준다. 그는 2001년 <재즈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흑인이자 동성애자이고 HIV 양성 반응자. - 이건 무거운 짐을 진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혐오감을 항상 경험하고 있어요. 분명하게요.”
소수자로서의 그의 정체성은 음악계에서 그의 활동에 분명한 장애였다. 아울러 이와 관련된 것이겠지만, 그가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음악적으로 비타협적이었다는 점 역시 그의 원활한 활동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오랜 은둔 끝에 ’90년대 중반에 복귀했을 때 그의 프로듀서가 되었던 허브 조던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음반 회사들을 싫어했어요. 업계 전문가들도 좋아하지 않았죠. 그는 자연히 그들에 대해 의심의 마음을 거두지 않았어요.”
하지만 조던에 따르면 앤디 베이는 그가 신뢰하는 소수의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다정했고 장난기와 유머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그 무렵에 재즈 평론가 제임스 개빈은 앤디 베이의 그러한 모습을 뜻밖에도 무대에서 발견했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던 레즈비언 바 ‘커비홀’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노래하는 앤디를 본 것이었다. 개빈은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 무대에서 그가 편안하게 노래하고 연주했다는 것은 그의 복귀 앨범이 발표되기 직전까지 그가 숨겨왔던 진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 점을 묻는 누구에게든지 그 점을 공개적으로 이야기 나눴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전까지 그러니까 197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그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제임스 개빈에 의하면 그 무렵에 그가 연주했던 곳은 뉴저지주 포트리에 있는 쇼핑몰이나 토론토에 있는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재즈 팬들의 이목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나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혐오감을 항상 경험하고 있다.”
이 길고 길었던 은둔의 시간에서 앤디 베이는 그 누구보다도 인생의 명암을 극명하게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목받던 가수였기 때문이다. 1939년 10월 28일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앤디는 세 살 때부터 혼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신동이었다. 그는 곧 부기우기를 연주했고 여덟 살 때는 뉴어크의 한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때 소년 앤디는 색소포니스트 행크 모블리의 무대에서 노래했던 적도 있었다.
앤디는 1953년 열두 살 때 주빌리 레코드와 첫 싱글 <Mama’s Little Boy Got the Blues>를 녹음했다(당시 그의 이름은 앤드루 와이드먼이었다. 와이드먼은 그의 아버지의 본래의 성으로, 아버지는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성을 베이로 바꾸었고 아들 앤디는 비록 아버지의 종교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성을 물려받았다). 이 곡의 인기로 앤디는 당시 R&B 스타 루이 조던 밴드와 함께 할렘의 아폴로 극장 무대에 섰으며 NBC TV의 청소년 스타 발굴 프로그램이었던 <Star Time Kids>에 출연하기도 했다.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싱글 <The Meaning of the Blues>를 발표했다.
<Mama’s Little Boy Got the Blues>에서 <The Meaning of the Blues>로의 변화는 앤디에게 변성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린 시절 발랄한 리듬 앤드 블루스를 불렀던 소년은 어느덧 느린 블루스로 자리를 옮겼고 제임스 개빈의 지적대로 그때 그의 목소리는 그의 우상 중 한 명이었던 빌리 엑스타인의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며 노래하는 앤디의 모습은 이미 그 시절의 영웅이었던 냇 킹 콜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난 그와 비교되는 것이 전혀 지겹지 않아요. 냇 킹 콜은 나의 우상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내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죠. 그는 여전히 내가 꼽는 단 한 명의 인물입니다.”

자신의 손위 누이 두명과 함께 결성한 혼성 보컬 그룹 Andy & Bey Sisters
데카 레코드와 싱글을 녹음한 직후 베이는 두 누이인 살로메이, 제럴딘과 새로운 그룹 앤디와 베이 시스터스를 결성했다. 이들은 1958년부터 16개월간의 유럽 투어에 나섰고 이후 RCA 빅터와 프레스티지 레코드를 거치며 1965년까지 모두 석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앤디와 베이 시스터스는 해산했지만 20대 중반이 된 앤디 베이는 이때부터 굵직한 재즈밴드 리더들이 앞 다투어 부르는 객원 보컬리스트로 떠올랐다.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까지 앤디는 하워드 맥기, 맥스 로치, 듀크 피어슨, 호러스 실버, 게리 바츠, 스탠리 클라크의 앨범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그 결과로 그는 첫 앨범 [Experience & Judgement](애틀랜틱)를 1974년에 발표할 수 있었다. 앨범의 열두 곡 중 절반을 앤디가 직접 작곡했던 이 앨범은 당시의 흐름에 맞춘 펑키한 R&B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앤디의 행보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첫 앨범 이후 그는 1982년 파로아 샌더스의 앨범에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1990년대가 되기까지 자신의 앨범은 물론이고 그 어떤 녹음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피아니스트 호러스 실버, 색소포니스트 크래익 핸디와 함께 한 앤디 베이, 1988년도
버려진 보석의 발견
하지만 그의 노래 실력은 여전히 음악인들 사이에서 잊히지 않고 있었다. 특히 ’90년대 무대로 복귀한 호러스 실버는 ’70년대에 이어 20여 년 만에 앤디 베이를 다시 밴드로 불렀고 앤디 베이 역시 오랜만에 기지개를 켰다.
이 무렵 디트로이트의 변호사이자 재즈팬인 코르넬리우스 피츠는 드러머 로이 브룩스의 강력한 추천으로 앤디 베이의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듣자마자 앤디의 앨범을 제작하고 싶은 마음에 피츠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프로듀서 허브 조던에게 연락했다. 조던은 맨해튼 휘트니 미술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홀로 노래하는 앤디 베이의 목소리를 듣고 진정으로 버려진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피츠와 조던은 비용을 서로 부담하기로 하고 앨범 제작에 회의적이었던 앤디의 마음을 천천히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아무도 없이, 앤디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한 열 곡의 녹음이 완성되었다. 조던과 피츠는 이 녹음을 가지고 음반을 배포할 음반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앤디 베이의 예상대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음반사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조던은 앤디 베이의 녹음을 거절한 음반사가 메이저 음반사들을 포함해 무려 25개 회사였다고 밝혔다. 그러던 중 필라델피아의 독립 재즈 음반사 에버던스(Evidence)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가까스로 그의 앨범 [Ballads Blues & Bey]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때 앤디 베이의 나이는 어느덧 57세였다.
이 앨범 이후로 앤디 베이는 2014년 마지막 앨범 [Pages from An Imaginary Life]를 녹음하기까지 18년 동안 모두 여덟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미국 재즈 저널리스트 협회는 앤디 베이를 2003년 최고의 재즈 보컬로 선정했으며 2004년 작 [American Song]을 통해 그는 그래미 재즈 보컬 부문 후보에 올랐다. 마지막 앨범 [Pages from An Imaginary Life]은 NPR 뮤직 평론가들이 선정한 최고의 재즈보컬 앨범으로 꼽혔다.

찬사가 이어졌던 여덟 장의 앨범 가운데 그의 피아노 반주만으로 완성된 앨범은 [Ballads Blues & Bey], [Pages from An Imaginary Life] 그리고 2013년 작 [The World According To Andy Bey]까지 모두 석 장이었다. 이 녹음들은 재즈 보컬 역사상 그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예술적 깊이를 들려주었다. 이전에도 자신의 반주 위에 노래하는 몇 사람의 재즈 보컬리스트들이 있었지만 앤디 베이의 음악이야말로 꼭 그래야만 하는, 오직 자신만이 반주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을 들려준다. 그것은 긴 고독의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그의 노래이자 그것을 듣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그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 간의 대화인 것이다.
’90년대 초 앤디 베이는 오스트리아 그라즈에 있는 재즈 연구소에서 지망생들을 위한 보컬 지도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누군가에게 재즈를 가르치는 것이 매우 허망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누군가에게 재즈를 노래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게 재즈는 삶이기 때문이에요. 그 삶 속의 경험이고 그 느낌이기 때문이죠.”
앤디 베이는 뉴저지 엥글우드의 배우들을 위한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누이 제럴딘의 딸이자 앤디의 조카인 배우 다리우스 드 하스가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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