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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피아노; A Romanca on Three Legs] - 케이티 해프너

 

굴드의 피아노

케이티 해프너 지음 | 정영목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07월 11일 출간 | 352P

 

 
 
글렌 굴드는 1982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열렬 팬 층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에게서 영감을 받는다는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있다. 미셸 슈나이더의『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동문선,2002)와 피터 F. 오스왈드의 『글렌 굴드-피아니즘의 황홀경』(을유문화사,2005)을 이미 읽은 독자들에게, 케이티 헤프너의『굴드의 피아노』(글항아리,2016)는 두 책이 미처 파고들지 못한 굴드의 또 다른 내면을 보여준다. 

직업 피아니스트는 모두 각자의 마음에서 듣고 있는 소리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는 피아노를 찾는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구하는 피아노는 광범위한 범위의 음악을 채색하기 거대한 팔레트를 갖추고 있어야 했고, 거기에는 색채의 섬세한 뉘앙스와 떨림을 표현할 여유도 넉넉하게 확보되어 있어야 했다. 반면 루돌프 제르킨은 피아노에서 크고 건강한 소리를 원했다. 이처럼 연주회용 피아노에 까다로운 피아니스트가 있는가 하면, 피아노에 대해 아예 득도한 태도를 보이는 피아니스트도 있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은 “모든 피아노는 새로운 모험이다.”라며 이질적인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도전적으로 받아들였고,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절대 피아노를 쳐보지 않았다는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는 “그리스도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음을 믿은 제자처럼 그냥 믿어야 한다. 믿지 않으면 물에 빠진다.”는 식의 운명론에 자신의 연주회를 내맡겼다. 

굴드는 어느 편이었는가 하면, 자신의 기호에 맞는 피아노를 편집증적으로 추구했고, 그렇게 해서 겨우 찾아낸 피아노에 물상애(fetishism)적 애착을 가졌다. 굴드는 열다섯 살 때 완전한 전문 피아니스트로서 콘서트에 나서기 시작했는데, 그가 선택한 피아노는 20세기 초 주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솔로스트의 95%이상이 사용하던 스타인웨이 피아노였다. 그가 처음으로 편애한 피아노는 1928년 제작된 스테인웨이 CD 174로, 그는 이 피아노를 발견한 1955년에 획기적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다. 하지만 이 피아노는 클리블랜드에서 연주회를 마친 뒤 다시 뉴욕으로 옮기는 길에 화물 창고에서 떨어져 수리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다. 이후 CD 205, CD 90 등을 새로 만났으나 자신이 찾는 소리가 아니었다.
 
1960년 6월, 글렌 굴드는 완벽한 피아노를 찾아 그토록 오래 헤맨 끝에 이튼 백화점 피아노 매장에서 중고 CD 318을 발견했다. 이 피아노에는 이때껏 그가 찾아다닌 ‘투명한 소리, 모든 음역의 명료함, 표현의 예리함’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굴드는 하프시코드 소리에 가까운 피아노를 좋아했고, “CD 318이 그가 발견한 다른 어떤 피아노보다도 정확하게 그 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이 소리는 하프시코드를 위해 쓴 바흐의 작품 같은 음악에 아름답게 어울렸다.” 굴드는 CD 318을 거의 하프시코드가 되는 지점까지 개조했다.

CD 318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3월 30일에 제작 완료된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 가운데 하나다. 수공제로 만들어지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같은 장인이 같은 공장에서 같은 날에 제작 완료한 피아노라고 하더라도 소리는 일률적이지 않을 수 있다. 똑같은 숲에서 벌채되었지만, 어떤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햇빛을 더 받고, 어떤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습기를 더 머금는다. 전쟁 중에 피아노 장인들은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같은 날 제작 완료된 CD 318의 특별함은 이렇게 설명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예술적 감각이 필요 없는 비행기 부품 제작에 시간을 쏟느라 콘서트 피아노 제작에 굶주려 있었고, 그래서 가장 훌륭한 솜씨를 이 두 피아노에 있는 대로 쏟아 부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후 굴드는 CD 318을 운송해가며 연주회를 치렀다. 그는 “마치 자기 피아노가 인간인 것처럼 말했다.” 1964년 당시, 현존하는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높은 연주료를 받았던 그는 서른한 살 때 콘서트 연주를 중단했다. 이후 레코딩에만 몰두했는데, 이때도 당연히 CD 318이 아니면 안 되었다. “굴드는 자신이 각 레코딩에서 보여준 신선함이 상당 부분 악기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피아노는 CD 174와 같은 사고로 원래의 소리를 잃었다. 굴드는 CD 318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장장 5년 동안 수리에 매달렸다.

굴드는 이십대 후반부터 약 10년 동안 코닐리아 포스라는 유부녀와 사귀었다. 그녀의 남편은 작곡자이자 지휘자였던 루커스 포스였는데, 포스는 자동차 운전 중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서 굴드를 찾아와 친교를 맺었다. 굴드와 코닐리아의 불륜은 1964년부터 시작되었고, 관계가 깊어지면서 굴드는 코닐리아에게 토론토에 와서 결혼을 하자고 졸랐다. 코닐리아는 각기 열 살과 여섯 살 된 아들과 딸을 차에 태워 토론토로 떠났다. 포스는 아내가 운전석에 앉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글렌하고 결혼하지 않아. 잘 지내. 다음 주말에 보자고.”

코닐리아는 아이들을 토론토의 학교에 등록시키고 굴드의 아파트 근처에 집을 세냈지만, 몇 주 되지 않아 굴드와 결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까이에서 본 굴드는 수많은 기벽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안정제에 대한 굴드의 의존은 점점 심해졌다. 코닐리아는 남편과 굴드 사이를 오가는 4년 반 동안의 이중생활 끝에 남편에게 돌아갔다. 코닐리아가 남편에게 다시 마음이 기운 1973년 경, “그녀에 대한 굴드의 강박적 헌신은 이제 편집증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코닐리아가 남편에게 완전히 돌아간 후에도, 굴드는 그녀의 변심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고 3년 동안이나 헛된 노력을 했다. “피아노를 구해낼 수 있다는 믿음의 바탕에 깔린 것도 이와 같은 충동 - 또는 환상 - 이었다.” 은자로 알려진 굴드가 그 이미지와 달리 떠나간 여인에게 편집증적 고착 증세를 보인 것과 복구 불가능한 CD 318에 대한 굴드의 집착을 절묘하게 연결시킨 지은이의 재치가 독자를 웃음 짓게 한다.
 
 
굴드는 심심풀이로 듀크 앨링턴의 ‘Caravan’을 연주하기도 하고, 빌 에번스를 추앙하기도 했지만 (1960년대에 에번스는 한동안 굴드의 악명 높은 ‘심야전화’를 받고는 했다), “굴드는 재즈 팬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재즈 콘서트에 간 적이 없으며,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재즈연주자로서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캐나다 국립도서관을 주요 무대로 삼아온 오타와 국제 재즈 페스티벌 참자자들 가운데 수십 명의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캐나다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CD 318을 연주했다. ‘굴드의 피아노와 영적 교제’를 나눈 이들 가운데 브래드 멜다우 ․ 프레드 허쉬 ․ 르네 로스네 ․ 우에하라 히로미 ․ 존 스테치 ․ 랜 블레이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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