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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k

찰리 파커(Charlie Parker) - Charlie Parker at 100 ; 위대한 그의 이름 뒤 가려진 공허한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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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8.29~1955. 3.12

Charlie Parker at 100

위대한 그의 이름 뒤 가려진

공허한 빈자리

 

올해는 모던 재즈의 출발점, 비밥의 개척자이자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찰리 파커의 탄생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그의 100주년에 관한 언급이 이뤄지긴 했죠. 하지만 실질적인 추모, 헌정의 움직임은 아직까진 음반사와 저널, 아티스트 양쪽으로 무척 미미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올 한해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었던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인 유행이 이벤트 진행 자체를 틀어 막아버린 탓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일인 829일을 전후로 계획되었던 후배 연주자들의 헌정 콘서트도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시기 즈음해서 발매 예정에 있던 그의 백카탈로그 리이슈 계획도 이달 12월 중순경으로 미뤄졌습니다.

여러모로 맥빠진 상황이 되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현재 찰리 파커의 중, 후반기 녹음들에 관한 권리를 대부분 갖고 있는 유니버설 뮤직에서 올해 초 발매했던 사보이 10인치 LP 박스에 이어 머큐리와 클레프 시절 녹음들도 10인치 LP로 이달 중 발매예정에 있기에 그 타이밍에 맞춰서 이렇게 그에 대한 특집 기사를 준비해봤습니다. 최소한 올해가 가기 전 제대로 한번쯤 그에 관해 다뤄보자는 편집부와 필자의 공통된 의견으로 진행된 이 칼럼은, 찰리 파커가 그 거대한 명성과 지명도와 달리 실제로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좀 더 면밀하고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재즈사 100년 전체를 봤을 때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장 위대한 위치에 있다고 다들 이야기하고 그렇게 인식되어 있는 그의 이름이 실제론 잘 와닿지 않고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기에, 이 참에 그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싶었던 탓입니다. 앵무새처럼 위대하다고 되뇌곤 하지만 뭔가 그 실체를 잘 모르시겠거나 의문을 가졌던 분들이라면 꼭 이번호 커버 기사를 정독해보셨음 좋겠습니다.

 서문/편집부 본문/황덕호 사진/유니버설,William P.Gottlieb

 

 

버드 100: 재즈 팬들의 혹독한 외면 속에서도 찰리 파커는 왜 여전히 위대한가.

 

지난 829일 찰리 버드파커의 100번째 생일을 맞이했던 2020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도 그랬던 것처럼 버드의 100주년은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조용히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전례가 없었던 유행병의 확산이 2020년의 모든 사안들을 집어삼켰던 것처럼 말이다.

재즈 음반 컬렉터들에게 가장 아쉬웠던 점은 버드 녹음의 재발매가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클레프 시절의 10인치 LP 다섯 장으로 구성된 박스 세트(버브)는 가을에 발매 예정이었으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11월 중순에도 아직 발매되지 않았는데 이 음반의 발매 예정일은 12월 말경으로 연기된 상태다. 사보이 녹음이 10인치 LP 넉 장으로 재발매 된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보이며 다이얼 녹음의 재발매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코로나 유행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찰리 파커의 78회전 음반들을 불법적으로 발매한 해적 음반들, 이를 바탕으로 무단으로 쏟아져 나온 온라인 서비스는 제대로 정성 들여 만든 찰리 파커의 음반 재발매가 들어설 자리를 허락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법 음반, 음원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조야하게 편집된 음반들, 음원들 외에 체계적이며 섬세하게 만들어진 음반으로 찰리 파커를 제대로 듣고자 하는 재즈 팬의 수요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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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리 파커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올해 초 처음 제작,발매된 기념 앨범. 사보이 레이블에 재적해있던 4년간의 녹음들중 발표한 모든 곡들을 한곡씩 골라 담아낸 편집반.

 

 

사보이, 다이얼, 클레프에서 찰리 파커가 남긴 녹음 중 스튜디오 녹음 마스터 테이크를 모두 모으면 CD 여섯 장 분량이다. LP로 발매한다면 10장이 조금 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분량의 음반이 제작은 고사하고 기획조차 없었다는 점은 무엇을 말할까. 이 사실은 올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겨냥해서 워너(CD 80), 브릴리언트(85), 낙소스(90), 유니버설(123)이 베토벤 전곡 세트를 이미 작년 말에 출반한 것과 큰 대조를 보인다.

찰리 파커는 재즈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으로 손꼽힌다. 그는 본명이 아니라 버드로 불리며, 누구나가 인정하는 비밥의 창시자고 모던재즈의 개척자다. 하지만 그의 탄생 100주년 되었다고 이러한 형식적인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그의 음악을 창고에 넣어두고 아무도 듣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가장 위대하다고 칭송되는 찰리 파커는 현실적으로는 왜 그토록 외면 받고 있으며 이제 100세의 그는 250년 전에 태어난 베토벤보다도 더 옛날의 인물이 되어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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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당시 찰리 파커 퀸텟의 뉴욕 공연 모습. 좌로부터 토미 포터, 찰리 파커, 맥스 로치, 마일스 데이비스, 듀크 조던

 

 

마일스, 콜트레인, 블루노트 팬들도 왜 버드는 듣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시 근본적으로 물어보자. 찰리 파커는 진정으로 재즈의 거장일까? 혹시 이제는 완전히 낡아 빠진 재즈의 옛 기준을 오늘날에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 반대로 버드가 재즈의 거장이 맞다면 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음악을 듣고 있을까?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 감동하지 않는가.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이란 질문은 그 자체가 보여주듯이 음악적인 질문이라기보다는 사회현상, 문화 현상에 관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정교한 시장 조사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난 그 점에 관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다. 단지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렇게 생각해 보자. 1) 우선 음악 애호가라는 모집단 안에서 재즈 팬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나머지 음악팬들은 왜 재즈를 듣지 않을까. 2) 재즈 팬들 안에서 모던재즈(비밥, , 하드밥, 포스트밥 등)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나머지 재즈 팬들은 왜 모던재즈를 듣지 않을까. 3) 모던재즈 팬들 안에서 찰리 파커의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나머지 모던재즈 팬들은 왜 찰리 파커를 듣지 않을까.

찰리 파커에 대한 질문은 깊이 들어간 3)번 질문에 해당한다. 일반 음악팬과 심지어 재즈 팬들에게 찰리 파커를 묻기에는 이제 그의 음악은 너무 먼 존재가 되어버렸다. 모던재즈의 음악을 즐겨듣는 팬들, 그러니까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의 음악을 즐겨 듣는 재즈 팬 중 찰리 파커를 듣는 사람의 비율은 어느 정도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왜 찰리 파커와 가깝지 않은지에 대해 살피는 것이 그나마 버드와 우리 사이에 놓인 장벽을 인식하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왜 마일스, 콜트레인, 블루노트의 클래식 음반들을 즐겨듣는 팬들도 찰리 파커는 좋아하지 않을까?

 

 

비밥은 감상자들에게 계승되지 않았다.

물론 그 대답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필자는 갖고 있지 않다(음악 시장의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재즈의 객관적인 상황과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이 시장 조사는 꼭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주관적이나마 필자가 재즈 팬들, 특히 모던 재즈 팬들을 만나서 이야기 나눴던 경험들에 의하면 그 이유는 짐작이 간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찰리 파커의 작품 멜로디가 너무 복잡하고 템포는 너무 빨라서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버드의 야드버드 모음곡 Yardbird Suite’, ‘확인 Confirmation’과 같은 그의 대표곡의 멜로디를 알고 있는 모던재즈 팬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재즈 평론가들 가운데서도 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 될지 궁금할 정도다. 이 곡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재즈 연주자들이다. 그러니까 듀크 엘링턴의 명성이 음악 평론가들을 통해서, 멍크, 마일스의 명성이 음반 프로듀서의 안목으로 처음 만들어졌던 것에 반해서 버드의 전설이 동료 연주자들 사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한 작품의 화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확장하고 빠른 속도로 구현해 내는 힘. 그것은 바로 옆의 동료 연주자들이 전율을 느끼며 경험했던 부분들이다.

하지만 그 점이 일반적인 모던재즈 팬들에게도 그토록 인상적인 것은 아니다. 모던재즈 팬들에게는 보비 티먼스의 탄식 Moanin’’, 마일스의 소왓 So What’, 폴 데스먼드의 테이크 파이브 Take Five’, 냇 애덜리의 노동요 Work Song’, 빌 에번스의 데비를 위한 왈츠 Waltz for Debby’, 허비 행콕의 수박 장수 Watermelon Man’와 같은 곡들이 훨씬 더 인상적이다.

그런데 버드의 작품이 모던재즈 팬들을 위한 인기 레퍼토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기 보다는 비밥 전체의 현상이다. 멍크의 자정 무렵 ‘Round Midnight’, 디지 길레스피의 튀니지의 밤 A Night in Tunisia’을 제외하고 모던재즈 팬들이 기억하는 비밥 넘버는 사실상 거의 없다. 그것은 버드 외에도 멍크, 디지, 태드 대머런, 버드 파월, 오스카 페티퍼드, 데질 베스트 그 누구의 곡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모든 재즈 매체, 재즈 교육기관이 버드와 비밥을 20세기 음악의 혁명적인 진보라고 말해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곡들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등한시하거나 실패해온 것이다. 학교와 기관들은 연주자라는 전문가들을 육성하는 데 있어서 찰리 파커와 비밥을 반드시 가르친다. 하지만 일반 재즈 팬들이 이 음악에 즐거움을 느끼고 감상하도록 만드는 일에는 지극히 무관심하다. 결국 나무를 심었지만 주변 토양은 전혀 관리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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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회전 음반의 간극

비밥이 위대한 음악이지만(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 애호가들이 자생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에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찰리 파커와 비밥은 78회전 음반 시대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디지털 음원 시대에 과거의 LP가 다시 부활하는 기이한 모습을 우리는 현재 보고 있지만 그 이전 시대의 78회전 음반, 소위 SP는 여전히 창고 구석에 쌓여 있는 구시대 유물이다. 단지 그 음반과 포맷이 유물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녹음, 음악 자체가 화석으로 남은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미국의 저명한 매거진 <롤링스톤 The Rolling Stone>은 아티스트, 프로듀서, 방송 관계자, 평론가 등 300여 명에게 의견을 물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장을 선정했다. 그 가운데는 재즈 앨범도 9장이 포함되었지만(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허비 행콕, 빌리 홀리데이, 찰스 밍거스, 오넷 콜먼, 앨리스 콜트레인의 앨범들) 그럼에도 78회전 시대의 녹음을 담은 앨범은 행크 윌리엄스, 로버트 존슨, 머디 워터스의 앨범 단 석 장 뿐이었다(그리고 당연히 그 시절의 재즈 앨범은 없었다). 일반 음악팬이 아닌 역사적 안목을 지닌 전문가들이 선정했음에도 SP 시절의 음반은 3/500을 차지한 것이다. 그러니 음반의 역사를 대략 120년으로 봤을 때 그 가운데 50(대략 42%의 세월)78회전 음반의 시대였으나 그 시대에 대한 음악 소비는 아마도 전체의 0.002%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는 자명하다. 78회전 시대의 녹음들은 오늘날 오디오 팬들의 귀에 조악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심각한 것은 이 SP 시대에 중요한 재즈의 역사가 상당수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재즈의 탄생, 스윙시대 그리고 찰리 파커와 비밥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SP 음반, 78회전 음반 시대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시절을 재즈 팬들은 동굴에서 발견된 원시 벽화를 바라보는 느낌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취미로 음악을 듣고 있는 감상자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음향의 먼 간극을 무시하고 역사적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무모한 짓일 것이다.

 

찰리 파커의 앨범은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찰리 파커에게는 뛰어난 편집 앨범이 더더욱 필요했다. 비록 만족스럽지 못한 옛 녹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역사적 명연주를 담은 78회전 음반들을 정리해 한 장의 LP에 담은 앨범이 1950년대에 나왔어야 했다. 그러한 앨범이 있었다면 그 앨범은 마치 마일스 데이비스 9중주단의 [쿨의 탄생 Birth of the Cool]과 같은 역사적인 명반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녹음들을 보유하고 있던 사보이와 다이얼은 안타깝게도 그 기회를 놓쳤다.

1955년 찰리 파커가 3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파커의 이름으로 발표된 12인치 LP[찰리 파커의 천재성 The Genius of Charlie Parker]이 유일했다. 하지만 버드가 세상을 떠나자 사보이의 프로듀서 오지 카데나는 LP로 그의 녹음을 총정리 하겠다는 의욕을 불태웠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의욕은 지나친 것이었다. [불멸의 찰리 파커 The Immortal Charlie Parker], [찰리 파커 추모앨범 1~2, Charlie Parker Memorial Vol. 1~2], [찰리 파커 스토리 The Charlie Parker Story] 모두가 수록곡들의 얼터네이트 테이크들을 모두 실어 같은 곡을 2회에서 5회씩 연속해서 들어야 하는 구성을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편집은 앨범의 구성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었다. 12인치 LP가 나오기 전이었던 ’50년대 초 사보이와 다이얼은 모두 버드의 78회전 녹음을 담은 10인치 LP를 비교적 온전한 구성으로 발표했지만 이들은 곧 등장한 12인치 LP로 금세 단종되어 버리고 말았다. 훗날 사보이와 다이얼의 녹음들은 전집의 과욕을 덜어내고 LP로 재발매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참 뒤인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였다.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불행하게도 찰리 파커의 CD들 역시 ’50년대 오지 카데나가 범했던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일본에서 발매된 낱장의 사보이 CD들은 과거 카데나의 LP 선곡 그대로 재발매 되었으며 CD 8장 분량의 사보이, 다이얼 녹음 전집은- 대부분의 재즈 전집물들이 그렇듯이 녹음 날짜순으로 곡들을 일괄적으로 배열해 감상용 음반이기보다는 버드 연구자들, ‘조류학자들을 위한 자료집이었다. 클레프 시절을 담은 CD 10장의 박스 세트인 버브 전집도 마찬가지였다. CD 시대에도 일반 음악팬이 쉽게 들을 수 있는 매력적인 찰리 파커 앨범은 [현악 오케스트라와 함께 With Strings]가 거의 유일했다. 이러하니 마일스와 콜트레인의 음악을 앨범을 통해 감상하는 진성의 재즈 팬들도 찰리 파커는 무엇을 들어야 할지 난감하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명반을 비켜 간 버드의 삶

그렇다면 찰리 파커에게 그의 명성에 걸맞는 앨범이 없는 것은 오로지 프로듀서의 책임일까? 1955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찰리 파커지만 훌륭한 앨범 녹음이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8LP를 개발한 컬럼비아 레코드가 1950년 듀크 엘링턴과 함께 재즈 LP를 녹음한 이래로 ’51년에는 프레스티지가 마일스 데이비스, 제리 멀리건과 LP를 녹음했고 심지어 찰리 파커가 몸담고 있던 머큐리 레코드 산하의 클레프도 ’52년부터 스튜디오에서 LP 녹음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특히 클레프의 프로듀서 노먼 그랜츠는 ’40년대부터 자신의 재즈 앳 더 필하모닉을 릴 테이프에 녹음했던 인물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LP의 등장을 반겼을 것이다. 자연히 그랜츠의 ’52년 스튜디오 LP 녹음 역시 잼 세션 녹음이었고 여기에는 찰리 파커도 함께 참여했다. 클레프 레코드의 LP 제작은 이듬해부터 잼 세션을 넘어서 아티스트들의 개별 녹음으로 적용되었다. ’53년에 녹음된 디지 길레스피와 스탠 게츠의 [디즈와 게츠 Diz & Getz]는 좋은 보기였다. 곡당 연주시간은 6~8분에 이르렀고 전체 네 곡으로 구성된 10인치 LP는 음악의 완급을 반영해 전체적인 조화를 이뤘다. 하지만 같은 해에 녹음된 버드의 10인치 LP [찰리 파커 Charlie Parker](일명 [하이-파이 찰리 파커 Charlie Parker in Hi-Fi])는 엄청난 에너지의 열연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담은 그릇이 LP일 뿐 음악의 속성은 78회전 시대 그대로였다. 3분 내외의 짤막한 여덟 곡이 빼곡히 담겨있고 전체적인 구성미는 전혀 없었다. ’50년대 개념의 앨범이 아닌 단순한 싱글 모음집이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천재적 혁명가에게는 녹음의 중요성이란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연주가 미래에는 앨범의 개념 속에서 평가받을 것이라는 전망은 더더욱 가질 수가 없었다. 하기야 앨범 [찰리 파커] 녹음 당시에 술에(혹은 약물에?) 취해서 약속보다 두 시간 늦게 스튜디오에 도착한 찰리 파커에게 앨범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51년에 그는 또다시 병원에 입원했고(‘46, ’48년에 이어서 세 번째), 이듬해에는 약물 소지로 뉴욕의 카바레 카드가 정지되었으며 ‘53년에 딸 프리가 폐렴으로 사망하자 ’54년 그는 자살 시도로 다시 병원에 들어가야 하는 고통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천재성은 그 시대의 LP 속에 담길 리가 만무했다. 대표적인 앨범이 하나 없는 그에게 디지털 시대의 해적음반들은 아무런 원칙도 없이 그의 녹음들을 50, 100곡씩 밀어 넣었고 그 누구 하나 이를 비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지금 찰리 파커의 앨범은 비밥의 폐기물 매립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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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롭게 제작된 찰리 파커의 버브 시절 10인치 LP 컬렉션.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커버 이미지가 모두 일러스트로 되어 있다.  

 

 

버드는 재즈를 바꾼 것이 아니라 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찰리 파커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아무런 소용이 없는 클리셰일 뿐이다. 그의 음악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혹은 제대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100주년이 다 가기 전에 이 글을 통해 늘 간과되는 그의 위대함을 꼭 언급하고 싶다. 여기에는 버드와 마찬가지로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언급되어야 한다. 찰리 파커가 성장했던 미주리주 남쪽 경계선을 접하고 있는 아칸소주에서 파커보다 12년 먼저(1908) 태어난 루이 조던이다. 그 역시 1930년대 클래런스 윌리엄스, 스터프 스미스, 칙 웨브의 사이드맨으로 활동했던 스윙 재즈 연주자였다. 그 모습은 1941년에 제이 맥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던 버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1940년대 초까지 미국 대중음악을 대표했던 스윙의 화려했던 인기가 급격히 소멸하자 그 뒤를 이은 것을 비밥이라고 믿는 것은 재즈 역사를 공부한 학생들에서 종종 보게 되는 엄청난 착각이다(비밥이라는 전위음악이 어떻게 그 역할을 맡았겠는가!). 미국의 음악 전체를 봤을 때 스윙의 인기를 가져간 것은 프랭크 시나트라로 대표되는 스탠더드 팝과 새로운 흑인 음악 리듬 앤드 블루스(R&B),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당시의 점프 블루스였다. 그리고 이 시기 스윙 연주자였던 루이 조던은 어느새 점프 블루스라는 새로운 음악의 기수로 조명을 받고 있었다. 물론 루이 조던은 ’40년대 중반에도 빙 크로스비, 엘라 피츠제럴드와 듀엣을 녹음하면서 재즈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스윙이 과거와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는 1946년에 발표한 그의 대표곡 캘도니아 Caldonia’추추추 부기 Choo Choo Ch’ Boogie’를 통해 재즈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대중음악 재즈의 사망선고였다.

 

하지만 재즈는 죽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재즈의 스윙 리듬에 춤추고 싶지 않았겠지만 재즈의 저류에 흐르고 있던 다른 측면, 곧 즉흥연주의 새로운 기법은 바로 그 지점에서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주역은 찰리 파커였다. 루이 조던이 캘도니아추추추 부기를 발표했던 그 무렵에 그가 녹음한 리프를 달구다 Warmin’ Up a Riff’코코는 지금도 기적처럼 들리는 재즈의 환골탈태의 순간이다. 레이 노블의 전형적인 스윙 넘버 체로키 Cherokee’가 이렇게 바뀐 것이다. 그의 즉흥연주는 78회전 음반 3분의 제약을 뚫고 끝없이 나갈 기세다. 찰리 파커는 재즈의 성격을 다시 규정하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재즈를 오늘날에 이르게 한 것이다. 특히 1950년대부터 퓨전이 등장하기 전인 1960년대 말까지 재즈의 분화와 그 에너지는 찰리 파커의 세례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그리고 그 이후의 생명은 버드의 사이드 맨이었던 마일스의 세례로 이뤄졌다). 그 역사를 바탕으로 시장의 논리와 지극히도 맞지 않은 재즈라는 이 음악은 그런대로 21세기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면에서 분명히 버드는 재즈를 살렸으며- ’50년대 뉴욕 할렘가의 낙서들처럼 그 역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 음악 팬들을 사로잡을 만한 걸작 앨범한 장을 남기지 못한 그였지만 필 우즈의 앨범 제목처럼 오늘날의 재즈는 모두 그의 자식들인 것이다.

 

 

4 1951년 뉴욕 버드랜드 클럽에서 공연당시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한 모습. 오른쪽이 새파랗게 젊은 시절의 존 콜트레인이다..jpg

1949년 절친인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한 찰리 파커. 맨 좌측이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의 존 콜트레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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