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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 1967년, 비어있던 거장의 ‘퍼즐 한 조각’을 찾다 [Rollins in Hol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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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1967년의 소니 롤린스

비어있던 거장의 퍼즐 한 조각을 찾다.

[Rollins in Holland]

 

/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사진/Resonance Rec.   

 

1953년부터 시작된 소니 롤린스의 방대한 음반 목록에는 눈에 띄는 두 번의 단절 시기가 있다. 195810월 이후 32개월 동안 계속된 첫 번째 단절과 19665월 이후 62개월 동안 계속된 두 번째 단절이 그것이다. 첫 번째 단절은 재즈에서 매우 유명한 일화다. 전도 유망했던 28세의 소니 롤린스는 당시에 갑자기 종적을 감췄는데 뉴욕 맨해튼의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살고 있던 그는 가까이에 있는 윌리엄스버그 다리에서 홀로 색소폰을 연습했고, 이 모습은 간혹 몇몇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 그래서 약 3년 만에 녹음한 그의 복귀 앨범의 제목은 [다리 The Bridge]였다.

롤린스의 첫 번째 활동 중단이 재즈 음악인으로서의 고뇌의 결과였다면(그는 점차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던 자신의 연주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었다) 두 번째 활동 중단은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귀부터 두 번째 녹음 중단에 이르는 1962년부터 ’66년까지 롤린스의 경력이 극적으로 요동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62년 롤린스가 다시 재즈계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은 메이저 음반사였던 RCA였다. RCA는 경쟁사인 컬럼비아 레코드가 재즈에서 거둔 괄목할만한 성공을 지켜보면서 컬럼비아 출신의 명 프로듀서 조지 애버키언(George Avakian)을 영입했고 애버키언이 RCA를 위해 선택한 인물이 소니 롤린스였다. 앨범 [다리 The Bridge]]로 롤린스가 돌아왔을 때 바야흐로 그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작품 이후 RCA에서의 롤린스 앨범들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 음반사와 롤린스의 작업은 만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롤린스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더 찾아왔다. ’60년대 재즈를 선도했던 임펄스 레코드의 밥 티엘(bob Thiele)은 롤린스에게 계약을 제안했고 RCA와 계약을 끝나고 이듬해인 19657월 롤린스는 밥 시엘과 함께 루디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롤린스와 임펄스와의 작업은 공식 앨범 석 장과 여분의 녹음만을 남겼고 계약 기간 1년은 더 이상 연장되지 않았다(임펄스에서의 마지막 앨범 [이스트 브로드웨이의 쇠락은 East Broadway Run Down]은 그 탁월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판매에 그쳤다). 중요한 것은 RCA와 임펄스에서의 경험이 롤린스에게는 동일했다는 점이다. 임펄스 역시 재즈 전문 독립 음반사처럼 보였지만 그의 모회사는 방송사와 영화사가 합자한 ABC-파라마운트 레코드였고, 그들 역시 RCA 레코드처럼 제작비용과 판매량, 손익분기점을 정리한 서류를 롤린스에게 제시하며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처럼 보이겠지만 당시 롤린스는 자신을 한 사람의 음악인이 아닌, 돈을 벌어다 주는 기계처럼 대하는 (메이저) 음반사들의 태도에 극심한 환멸을 느꼈다. 임펄스 이후 그가 6년 동안 그 어떤 음반사와도 계약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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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 그리고 두 번째 은퇴

하지만 조금 더 살펴본다면 롤린스가 ’60년대 초중반에 겪었던 문제들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결과 중 하나였다. 1950년대 중반에 등장한 로큰롤은 처음에 팝-보컬 재즈(프랭크 시나트라, 콜 등)에만 충격을 줬을 뿐 연주중심의 하드코어 재즈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음악은 진화를 거듭해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재즈 시장 전체를 급감시키는 존재로 등장했다. 1962년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거장의 반열에 올랐던 선배 셀로니어스 멍크가 ’67년을 끝으로 이 거대 음반사를 떠나야 했던 상황과 롤린스의 상황은 정확히 일치한다. 그 결과 ’66년 이후 6년의 세월 동안 음반이라는 기록을 통한 소니 롤린스의 존재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레저넌스 레코드가 발굴한 녹음 [홀랜드의 롤린스 Rollins in Holland]6년이라는 커다란 공백의 퍼즐 한 조각을 찾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첫 공백기와 유사하게 롤린스는 녹음을 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66년부터 ’68년까지 연주 활동을 간간이 이어갔는데(이후 ’69년부터 3년 동안은 일체의 활동을 중단했다) 지금까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1967년도의 소니 롤린스의 연주를 담은 녹음이 이 앨범을 통해 공개된 것이다.

[홀랜드의 롤린스]에 담긴 100페이지짜리 부클릿에 실린 에이든 레비(그가 쓴 소니 롤린스의 전기 [색소폰의 거상 Saxophone Colossus]는 곧 출간될 예정이다)의 글에 의하면 롤린스는 이 앨범의 녹음장소인 네덜란드를 이미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롤린스는 1959, 그러니까 첫 공백기의 초반에 헨리 그라임스(베이스), 피트 라로카(드럼)과 함께 유럽 투어에 나서서 첫 네덜란드 연주회를 가졌고 ’63년에는 돈 체리(코넷), 그라임스, 빌리 히긴스(드럼)와 사중주로 두 번째 네덜란드 공연을 가졌다. ’65년에는 유럽 투어를 왔다가 네덜란드산 부에셔 색소폰을 구매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잠시 들렀으며(이후 그는 부에셔와 셀머 마크 VI를 번갈아 사용했다) 2년 뒤인 ’67년 소니 롤린스는 홀로 네덜란드를 방문해 현지의 두 연주자인 루드 야콥스(베이스), 한 베닝크(드럼)와 연주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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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네덜란드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뮤지션의 모습. 좌로부터) 루드 야콥스, 한 베닝크, 소니 롤린스

 

1967년 네덜란드 방문에서 롤린스가 밴드 멤버들과 함께 오지 못했다는 점은 ’60년대 말 유럽에서도 재즈공연의 흥행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처음 만나는 두 네덜란드 연주자들과 롤린스가 피아노가 없이 트리오로 연주한 것은 그가 얼마나 이 편성을 선호했는가를 보여준다. ’67년까지 세 차례 네덜란드를 방문하면서 롤린스는 피아노 있는 리듬섹션을 단 한 번도 기용하지 않았으며 거슬러 올라가 실질적인 그의 첫 정규밴드로 녹음했던 ’57년 앨범 [빌리지 뱅가드의 밤 A Night At the Village Vanguard] 역시 피아노가 없는 트리오 편성(도널드 베일리 혹은 윌버 웨어의 베이스, 피트 라로카 혹은 엘빈 존스의 드럼)이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유러피언 재즈에 관심이 많은 재즈 팬에게 야콥스-베닝크 조합의 리듬섹션은 불안하게 보일는지 모른다. 루드 야콥스는 정통파 모던 재즈 연주자인데 반해 한 베닝크는 아방가르드 재즈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이다(그는 피아니스트 미샤 멩겔베르크, 색소포니스트 페터 브뢰츠만의 밴드에서 여러 녹음을 남겼다). 하지만 그 불안은 이들의 전모(특히 한 베닝크의 능력)를 모를 때 갖게 되는 기우다. 이들은 이미 네덜란드를 방문한 덱스터 고든, 조니 그리핀, 도널드 버드, 케니 드루, 벤 웹스터, 웨스 몽고메리, 클라크 테리의 반주를 맡았고 아마도 롤린스 역시 그 경력을 신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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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리듬섹션과의 트리오

그해 롤린스의 네덜란드 방문은 53일 아르네헴 시각예술 아카데미에서의 연주를 시작으로 55일 낮 힐베르쉼 바라 스튜디오, 같은 날 저녁 루스드레흐트의 고-고 클럽, 56일 위트레흐트의 클럽 페르세폴리스로 이어졌는데 CD 두 장의 이 음반에는 53, 5일의 연주만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순서는 연주 일정 순이 아닌데 맨 처음 바라 스튜디오 녹음을 시작으로 고-고 클럽 실황 그리고 시각예술 아카데미 실황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순서는 녹음의 음질을 기준으로 배열한 것이라고 판단되는데, 깜짝 놀랄 음질의 미공개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롤린스의 진정한 팬이라면 음반 초반의 연주에서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이유는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이 라디오 방송을 위한 연주였기 때문에(그래서 음질은 매우 뛰어나다) 즉흥연주를 너무 절제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팬에게는 다소 열악한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약 없이 즉흥연주를 쏟아낸 시각예술 아카데미에서의 연주부터 들을 것을 권한다.

이곳에서의 연주를 들으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베닝크가 매우 적극적으로 롤린스의 연주에 반응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밥과 아방가르드를 두루 소화할 수 있는 능력에 기인하는데, 바로 직전까지 롤린스가 미국에서 함께 녹음했던 미키 로커, 빌리 히긴스, 엘빈 존스의 드럼 스타일을 생각하면 한 베닝크의 기용은 적절했다. 여기서 야콥스의 베이스가 흐트러지지 않고 일정한 스윙을 들려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점은 평소 롤린스가 베이시스트 밥 크랜쇼를 높이 평가했던 덕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한 팀워크로 이들은 <세 개의 짧은 단어 Three Little Words>, <사랑이 들어오다 Love Walked In>, <Four>을 각기 약 20분 동안 정열적으로 연주한다. 당시 롤린스를 옥죄었던 RCA와 임펄스의 스튜디오 녹음에서 이러한 연주는 결코 들을 수 없다. 열악한 녹음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음반 중에 가장 이상적인 녹음은 고-고 클럽에서의 연주다. 이곳에서의 연주 역시 TV로 중계될 내용이었기 때문에 음질 역시 선명할 뿐만이 아니라 단 두 곡의 구성은 곡당 8~9분의 넉넉한 연주를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롤린스의 명곡 <두 사람을 위한 소니문 Sonny Moon for Two>은 그보다 10년 전에 녹음된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실황을 능가할 정도다.

전체적으로 [홀랜드의 롤린스]는 재즈 팬들에게 보편적으로 권할 수 있는 음반은 아니지만(그것은 대략 음반 절반 분량의 열악한 녹음 때문이다) 롤린스의 팬이라면 흥미롭게, 매혹적으로 감상할 음반임에는 틀림이 없다. 음질 때문에 이러한 연주를 포기하는 것은 오디오 팬의 선택이지 롤린스 팬의 선택은 아니다. 제브 펠드먼의 레저넌스 레코드가 이 정도의 녹음들을 단절된 9년의 세월 속에서 또 찾아낸다면 소니 롤린스의 팬들은 언제나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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