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종의 장르 자신의 언어로 재구축해낸 위대한 오리지널리티 [Matchbook] - 랄프 타우너와 게리버튼 (Ralph Towner & Gary Burton)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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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Towner & Gary Burton <Matchbook> ECM/1975
Ralph Towner Twelve-String Guitar, Classical Guitar
Gary Burton Vibraphone
B & B Wojirsch Design [Cover]
Martin Wieland Engineer
Photography By Paul Maar
All Tracks written by Ralph Towner except 2,3 9
Producer Manfred Eicher
Recorded July, 26, 27, 1974 at Studio Bauer, Ludwigsburg

다종의 장르 자신의 언어로
재구축해낸 위대한 오리지널리티
글/재즈 기타리스트 정수욱
똑같은 음악을 들어도 사람들은 종종 서로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이 지나 다시 그 음악을 듣게 되면, 그 음악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귀는 단지 소리 신호를 받아들이는 장치일 뿐이고, 음악은 결국 머릿속에서 뇌가 정립하는 감성의 구조물로 만들어 집니다. 음악은 뇌가 기억과 감정으로 재구성한 소리 파편들에 불과하지만, 이미 지나간 장면들 속으로 흘려보내는 꿈을 해석하는 일과 비슷해서 매우 개인적이고 누구와도 완전히 공유될 수 없고, 음악은 그렇게 개인의 내면으로 초대된 소리의 구조물이 되어 갑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취향과 감수성을 천천히 만들어 가는데, 이를테면 마치 오래된 재즈 레코드가 어느 날 문득, 전혀 다른 이유로 마음에 새로이 와 닿는 것과 같은 맥락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독일의 컨템포러리 음악 레이블 ECM이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라는 표현으로 이 레이블의 음악적 정체성을 시적으로 설명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장르적 유희보다는 좀 더 인간의 깊은 내면의 창의성을 담으려는 아티스트들과 이 구도의 설계자 역할을 맡은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의 심미안이 만들어낸 결과일 겁니다. 2026년 1월 18일, ECM의 대표적인 간판 아티스트인,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랄프 타우너가 85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찬찬히, 오랜만에 감상하게 된 그의 초기 ECM 앨범에 담겨진 연주들의 소리가 재현되는 순간들은 ‘침묵 속으로 사라지려고 하는 아름다운 순간들’ 더 길게 붙잡는 듯 했습니다. 그 여백의 감각이야말로 그와 이 레이블에서 발표된 상당수의 음반들에 담겨진 가장 강한 설득력일 겁니다. 그중 1974년 랄프 타우너와 비브라포니스트 게리 버튼이 그해 여름 독일에서 녹음해 이듬해 발매한 앨범 <Matchbook>은 그저 뛰어난 연주자들에 의해 연출된 ‘좋은 듀오 음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한 불꽃으로 타오른, 한 시대의 컨템포러리 연주의 미학에 조용히 불을 지핀 조그만 성냥이었습니다.

이 앨범을 들으면 먼저 감지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미리 주어진 기본 예상치, 즉 장르적 선입견들을 조용히 벗어나게 해주는 연주가 먼저 느껴집니다. 이 둘의 연주와 명확한 의도들이 이 듀오만의 특유의 결을 만들어내는데, 클래식에 가깝거나 재즈에 가깝거나가 아닌 또 다른 반구를 찾아 나선 침착하고도 신중한 탐험대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장르와 선입견을 두 연주자는 서로를 ‘받쳐주는’ 방식으로 연주하지 않습니다. ‘정숙한 듀오’가 아니라, ‘정교한 대화’ 를 만들고 있습니다. 단지 정숙하기만 해서는 결코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화성으로 깔아주고 그 위에 솔로를 올리는 익숙한 구조도 아닙니다. 기타와 비브라폰이 번갈아 말하고, 중간에 끼어들고, 때로는 일부러 말을 아낍니다. 다운비트매거진에서 오래전 Friendly Exchange of Ideas 라는 말로 이런 점을 설명한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표현 자체가 이 음반의 핵심을 꽤 정확히 가리킨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중요한 건 ‘조용함’이 목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조용한데 지루하지 않고, 편안한데 긴장감이 음악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앨범은,
다른 많은 훌륭한 ECM 앨범들이 대부분 그렇기도 하듯, 집중해서 들어도 좋고, 일요일 오후에 유유자적한 시간대 방 한쪽 공기로 흘려놓아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크리티컬 리스닝(능동적 청취)와 배경음악의 기능을 동시에 해내는, 말로는 쉬운데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균형을 이 앨범에서 이 당시 30대 초반의 두 연주자가 부족함 없이 해내고 있습니다.

수록곡에 관하여
첫 트랙 Drifting Petals 는 즉흥연주에서 초기 포스트 밥 이 후, 유러피언 재즈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곡으로 12 스트링기타와 비브라폰이 번갈아 아르페지오위에 느린 멜로디를 던지다 비브라폰과 기타가 솔로를 주고받습니다. 공교롭게도, 원래 이 비브라폰은 퍼커시브한 하프라는 의미로 ‘비브라하프’ 라고 불리며 시작된 악기입니다. 12현 기타 역시 민속 악기들과 하프 영향으로 ‘하프-기타’ 라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는 점 또한 고려한다면, 이 앨범에서 두 주자가 사용하는 악기의 미묘한 공통분모도 찾을 수 있습니다. 원래 12현 기타들은 특히 랄프 타우너의 12현 어쿠스틱 기타는 포크, 하드록, 프로그레시브 록, 라틴 민속 음악 등에 자주 사용되기도 해서 그런 음악의 뉘앙스를 주기도 하는데, 피아니스트 출신이었던 랄프 타우너는 전기 기타, 전자 이펙트들을 차용하기보단 하프시코드나 만돌린을 닮은 이 악기의 음색을 기타의 레이어된 효과음처럼 자신의 음악에 차용했습니다.
랄프 타우너는 60년대 본격적으로 태동한 뉴 에이지 음악의 선구자인 폴 윈터스 콘소트 밴드에서 12현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했고, 1972년 퓨전그룹 웨더 리포트의 두 번째 앨범 <I Sing The Body Electric> 에서 웨인 쇼터의 곡 The Moors 의 인트로 12현 어쿠스틱 기타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60년대 말 부터 칙 코리아의 대타로 행사 연주를 다니던 이력이 있다고 할 정도로 상당한 실력의 피아니스트로 시작했고 ECM에서 몇 종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 중요한 월드 퓨전 그룹 중 하나이던 오리건에서도 종종 신디사이저와 피아노연주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주 종목은 클래식 기타지만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에게 젊은 시절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 여서인지 빌 에번스의 <Waltz for Debby> 앨범으로 유명한 레너드 번스타인의 명곡 Some Other Time 에서 랄프 타우너의 클래식 기타는 기존 재즈나 포크 기타의 어법보다는 좀 더 피아노의 어프로치에 영향을 받은 점들이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초기 ECM의 또 다른 명 기타리스트이자 듀엣 파트너였던 존 애버크롬비의 오리지널로 유명한 Ralph's Piano Waltz 는 이런 그의 유니크한 음악성에 관한 절친의 멋진 헌사이기도 했습니다. 또, 밍거스가 남긴 불멸의 재즈 발라드인 Good Pork Pie Hat 에서 역시 12현 기타의 독특한 질감과 재즈라는 장르를 넘어서는 음악적 창의력을 선보임으로서, 작곡자인 밍거스가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는 후문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런 점 역시 이 앨범에 담긴 예술적 가치와 유니크함을 잘 보증해주고 있습니다. 트랙 Brotherhood 는 짧은 인터류드 스타일의 비브라폰 연주로 마치 이 시점부터 50여 년 뒤에 유행하게 될 엠비언트 영화음악 느낌의 텍스처가 인상적이고, 기타 독주인 1 x 6 역시 여기에 화답하는 짧은 에튀드 형태로 연주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앨범의 타이틀인 ‘Matchbook’ 이라는 제목은 거창한 개념에서 온 것은 아니고, 예전에는 작고 얇게 접히는 성냥갑에서 개비를 하나씩 뜯어 쓰곤 했는데, 랄프 타우너는 그 성냥갑을 기타 줄 아래, 넥 위에 끼워 넣고 연주하곤 했습니다. 그 순간 생겨나는 약간 거칠고 마른 어택감에서 곡의 인트로가 만들어졌고, 제목도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났습니다. 이 발상은 새로운 소리를 찾기 위해 피아노 위에 오브제를 올려두던 20세기 현대 음악의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떠올리게 하는데, 악기를 변형하지 않고도, 살짝 어긋난 상태로 두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음색의 세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리오넬 루에케 같은 후배 음악가들의 손끝에서, 그 계보는 조용히 이어지고 있죠. 그리고 약 10년 뒤, 두 사람은 다시 앨범 <Slide Show>(1985)에서 만나는데, 트랙 The Donkey Jamboree 에서 성냥갑 트릭은 다시 등장해, 칼립소의 스틸 드럼처럼 가볍고 낯선 소리로 만들어 낸 바 있기도 합니다.
후배 기타리스트 넬스 클라인은 한 인터뷰에서 랄프 타우너가 산만한 다국어 사용자가 아니라, 집중력 있는 모국어 연주 같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이 공감되고 설득력 높게 와 닿는 이유는, 타우너가 장르를 넘나들되 ‘이것저것 다양하게 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클래식, 포크, 재즈, 인상주의적 화성, 월드뮤직의 리듬 감각이 그의 음악 안에 함께 있지만, 그게 뒤섞여 혼탁해지지 않고 애초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또렷합니다. 그 단단함의 뿌리는 작곡 전공으로 20세기 음악 언어(쇤베르크, 베베른, 스트라빈스키 등)를 일찌감치 통과했고, 이후 클래식 기타를 본격적으로 붙잡기 위해 1년 동안 거의 매일 8~9시간씩 몰입했다고 합니다. 또 비엔나에서 르네상스/바로크 계열의 류트(기타의 전신인 악기) 레퍼토리들을 중심으로, 테크닉을 ‘음악과 분리된 훈련’이 아니라 ‘곡을 위한 필연’으로 익혔다고 설명합니다. 빌 에번스의 재즈 서정성을 기타로 옮겨내는 작업 역시 테크닉보다는 ‘개연성 가득한 흐름’ 으로 들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pilogue
ECM 레이블 초기 듀오 명반 중 하나인 게리 버튼과 칙 코리아의 <Crystal Silence> 에선 피아노와 비브라폰이 ‘멜로디의 선명함’을 전면에 세웁니다. 반면 이 앨범 <Matchbook>은 랄프 타우너의 작곡 세계가 중심이고, 기타가 가진 소리의 미세한 차이(클래식 기타/12현 기타, 어택과 사운드홀의 공기 등)를 통해 ‘형태’가 만들어집니다. 즉, 코리아-버튼 조합이 ‘유러피언 컨템포러리 재즈 작곡의 쇼 케이스’로 밀어붙였다면, 타우너-버튼 듀오는 ‘소리의 여백을 세밀히 조각하는 챔버 재즈’로 채색해 놓았습니다.
랄프 타우너는 오리건 활동을 제외하더라도, 커리어 대부분을 ECM이라는 하나의 레이블에서 50여 년간 발표한 방대한 작품 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들을 특정 장르로 분류하려는 수많은 시도는 대부분 유효하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그는 비교적 저평가 및 소외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특정 장르로 ‘들리지 않는’ 음악, 장르에 기대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장르가 되려는 랄프 타우너의 음악들은 재즈, 클래식, 포크, 즉흥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언어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는 카테고리 분류가 아닌 ‘고유한 정체성’으로 남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두고 장르를 대표한 음악가라기보다, 장르를 초월해 자기만의 깊이를 만들어낸 아티스트로 기억하는 게 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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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게리 버튼 쿼텟 멤버로 투어를 다니던 당시 두 사람의 모습. 젊은 시절의 스티브 스왈로우와 믹 구드릭의 모습도 함께 보인다. 1974년.jpg (File Size: 512.1KB/Download: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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