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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y Come, Easy Go’ 라는 서양의 격언이 말해주듯, 뭐든지 쉽게 얻어지는 것들은 그만큼 빨리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나 손에 닿을 것 같지 않던 ‘재즈’라는 음악이 조금씩 귀에 들리고 리듬을 타게 되는 순간, 즐거움과 희열은 여느 팝 음악들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감동을 전해줄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Johnk

#25 Tribute - 유럽 재즈 신의 여명 밝힌 명 드러머! - 욘 크리스텐센(Jon Christe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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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출신 ECM 50년 역사상 최고의 하우스 드러머'

욘 크리스텐센(Jon Christensen)  1943.3. ~ 2020.2.

 

유럽 재즈 신의 여명 밝힌 명 드러머!

/MMJAZZ 편집장 김희준 사진/ECM,, C&L

 

ECM 레이블이 1969년 처음 설립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유럽 출신의 뮤지션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베이시스트 아릴드 안데르센과 기타리스트 테리에 립달, 색소포니스트 얀 가바렉, 독일의 에버하르트 베버, 스웨덴의 피아니스트 보보 스텐손과 베이시스트 팰레 다니엘손, 그리고 또 한 명의 노르웨이 출신이자 이들 중 유일한 드러머 욘 크리스텐센!

이렇게 일곱 명의 연주자들은 모두 1940년대 초중반 태생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프로페셔널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70년대부터 90년대 후반까지 ECM 레이블 대표 하우스 뮤지션이라고 봐도 될만큼 다수의 초, 중기 ECM 레이블 카탈로그에 참여해 리더작을 만들거나 세션으로 자신의 연주를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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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 당시 20대 중후반이었던 이들은 미국에서 유럽으로 완전히 이주해 생활하면서 연주활동을 하던 벤 웹스터, 덱스터 고든, 케니 드류, 호레이스 팔란, 자니 그리핀 같은 거물급 연주자들의 공연 및 스튜디오 세션으로 함께 협연하며 자신들의 기량을 다져 나갔습니다. 또한 유럽으로 투어를 온 미국 연주자들의 세션까지 자주 맡아서 소화했었죠. (이 말은 이들 연주자들의 다시 기량이 이미 어느 정도는 그들과 함께 교류할 정도의 기량에 도달해 있었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들 입장에선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했죠. 만약 미국 연주자들이 본토에서 자신의 리듬섹션을 별도로 대동해 왔다면 결코 그들의 노하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고 유럽 재즈 신의 성장도 그만큼 늦어졌을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선 아릴드 안데르센이나 보보 스텐손 같은 연주자들이 내한공연 당시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직접 언급했던 바 있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우리가 현재 유러피안 재즈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을 서서히 형성해나가기 시작했고 현재의 ECM 레이블이 쌓아온 역사, 그 초석을 세워 나갔습니다.

70년대 유럽의 재즈 신은 막 출발점에 서 있던 상황으로서, 본산인 미국과 비교해 뚜렷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었고, 아티스트는 물론 재즈 클럽의 절대적인 숫자가 무척이나 적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재즈 팬들은 당연하게도 자국의 연주자들보다는 미국의 거장들 공연에 가는 걸 더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이렇게 유럽으로 건너온 재즈 명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에서 공연하고 레코딩 할 때 함께 손발을 맞출 세션이 필요하기에 앞서 언급했던 유럽 출신의 재즈 연주자들은 그들의 사이드 맨으로 호흡을 맞추고 경험을 쌓으며 음악을 표현해나갈 힘을 키울 수 있었죠.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음악을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들을 두고 유럽 재즈 신의 본격적 태동을 알린 1세대라고 이야기해도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좀 더 이른 시기인 1920~30년대부터 활동하던 장고 라인하르트와 스테판 그라펠리 같은 대선배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만, 이 두 연주자 외엔 재즈 신을 형성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온 선배 뮤지션이 거의 없다고 말할 정도로 연주자의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특히나 드럼과 베이스 같은 리듬 파트 주자의 본격적인 등장은 분명히 60년대 후반부터였으니 이들에게 1세대라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이 그리 잘못된 표현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바로 유럽 재즈 신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들 초기 거장들 중 스위스의 다니엘 위메르(Daniel Humair), 이탈리아의 알도 로마노(Aldo Romano)와 함께 몇 안 되는 드러머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 바로 욘 크리스텐센입니다.

 

 

3 유러피안 쿼텟 멤버들 키스 재럿, 욘 크리스텐센, 얀 가바렉, 팰레 다니엘손 (좌로부터).jpg

 

앞서 언급하기도 했고 또 재즈 팬들 사이에서도 나름 잘 알려져 있듯 욘 크리스텐센의 악기 포지션은 드러머였죠. 저 때엔 드러머와 베이스 연주자의 수가 다른 악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적었는데 유럽 전체를 보더라도 다니엘 위메르, 덴마크의 알렉스 릴, 이태리의 알도 로마노, 영국의 토니 옥슬리 정도만이 동시대에 이름을 알리며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욘 크리스텐센은 다른 네 명과는 무척 다른 사운드를 지니고 있었던, 지금 봐도 꽤나 독특한 스타일의 연주자였습니다. 그는 폴 모션이나 빌리 히긴스와 같은 계열로 이야기 할 수 있을, 섬세하고도 유려하게 심벌라인을 강조하며 멜로디컬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만큼 시적인 드러밍을 구사했던 연주자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멤버들과의 인터플레이와 내적인 교감에 더욱 집중하려고 노력했었죠. 다니엘 위메르나 알렉스 릴의 경우처럼 그루비하고 육체적인 힘이 강한 비밥 성향이 뚜렷한 드러머가 되거나, 아니면 토니 옥슬리처럼 아예 전위적인 음악으로 빠지는 게 당시 유럽출신 드러머들의 1차적인 지향점이었는데, 그는 처음부터 그런 선상에 서 있지 않으려고 했죠. 그리고 바로 그런 발상과 접근의 전환이 ECM 레이블의 초기 사운드를 형성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됩니다. 만프레드 아이허가 다른 드러머가 아니라 그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된 셈이죠. 이런 점에서 그는 유럽 재즈 역사에서 음악적으로 상당히 유니크한 캐릭터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또한 대체 불가능한 지점에 있던 '유일한 드러머'였습니다.

그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확장시킨 것은 1974년 키스 재럿 유러피안 쿼텟의 레귤러 멤버로 몸담으면서부터였지만, 그 외에도 70~80년대 여간한 ECM 대표 앨범의 크레딧을 보면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죠.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확합니다. 그의 드럼 사운드가 레이블의 소리의 여백과 여운을 강조하는 철학과도 아주 잘 맞으며 동시에 여러 뮤지션들의 음악에 잘 어울리는 유연성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욘 크리스텐센이 이렇게 폭넓고 유연한 적응력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음악적 감식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특정한 장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은 탓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록 음악에 매료되어 드럼을 시작했으며, 이후 재즈에 빠져들게 되면서는 비밥과 하드 밥 계열의 연주에도 깊게 심취해 그 음악의 에센스를 충실히 체득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프리재즈와 아방가르드의 흐름이 유럽을 관통해 갈 때에도 이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였죠. 이런 폭넓은 음악적 자산들이 욘 크리스텐센을 보기 드문 전천후 세션 드러머로서 자리매김하게 되는 큰 힘이 되어준 것입니다.

 

 

4 좌로부터) 욘 크리스텐센, 토마스 모건, 야콥 브로 이 팀은 욘 크리스텐센이 커리어 마지막으로 참여한 레귤러 트리오이기도 하다..jpg

 

절친인 보보 스텐손, 테리에 립달, 케틸 비외른스타트, 얀 가바렉, 엔리코 라바의 걸출한 리더작들에 두루 참여함과 동시에 키스 재럿, 랄프 타우너, 존 애버크롬비 같은 미국 연주자들의 ECM 앨범에도 이름을 올림으로서 드러머로서 그의 명성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까지도 꾸준하게 이어지는데 후반기 커리어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 덴마크 출신의 기타리스트 야콥 브로의 리더작 참여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Gefion>, <Returning> 에서는 욘 크리스텐센의 커리어 후반기 가장 빛나는 지점이라 말해도 좋을 정도의 음악적으로 멋진 성과를 거두게 되죠. 개인적으로 리더의 음악적 방향과 자신의 드럼 어프로치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기에 가능한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만 이렇듯 수십 년 동안 일관되고 지속적인 활동을 보여주었음에도 다소 아쉽게 보이는 점은 자신의 리더작을 커리어 내내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정규앨범은 1976년도 <No Time for Time> 하나뿐이며, 그의 이름이 크레딧에 포함된 몇 가지 공동 리더 작에서도 드럼 연주 이외에 크레딧 상으로 명확히 표기된 음악적 공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만큼 그는 평생 동안 재즈 드러머였고 누군가의 충실한 조력자로 만족해왔던 셈입니다. 밴드 리더 활동을 따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필자 개인적으로는 아쉽지만, 사실 그의 선택으로 이뤄진 과정이고 결과인데 이를 두고 별도의 가치판단을 할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무엇보다 사운드의 측면에서 그가 유럽 재즈 역사에 남긴 자취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뚜렷했고 컸던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또한 미국 재즈 아티스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교류하고 음악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를 비롯한 1세대 유러피안 재즈 레전드들은 두말할 나위 없는 뚜렷한 업적을 남겼고 유럽 재즈 신의 발전에 커다란 공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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