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럴 가너 탄생 100주년 기념 특집 칼럼 - 비할 데 없는 낙천적 감성, 피아노에 담아냈던 재즈 엔터테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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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roll Garner 100th Birth Anniversary
에럴 가너(Erroll Garner)의 부활 : 탄생 100주년에 돌아오다.
비할 데 없는 낙천적 감성
피아노에 담아냈던 재즈 엔터테이너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모던재즈의 황금기였던 1960년,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았던 재즈 피아니스트는 누구였을까. 지금도 그렇듯이 당시의 몇몇 재즈 잡지들은 애독자들을 대상으로 매해 최고의 밴드와 악기별 최고 연주자들을 선정했는데, 60년이 지난 지금의 입장에서 보자면 1960년의 투표 결과는 다소 의외로 느껴진다. 1881년에 창간된 전통의 음악 비평지 <메트로놈 Metronome>, 영국의 <멜로디메이커 Melody Maker>, 재즈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던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Playboy>의 독자들은 모두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에럴 가너를 꼽은 것이다. 가너가 1위를 놓친 잡지는 <다운비트 Downbeat>, 일본의 <스윙저널 Swing Journal>, 프랑스의 <재즈 핫 Jazz Hot>, 독일의 <재즈 에코 Jazz Echo>의 투표였는데(<다운비트>와 <재즈 에코>의 독자들은 오스카 피터슨과 존 루이스를 1위로 꼽았고 <스윙저널>, <재즈 핫>의 독자들 그리고 <다운비트>의 평론가들은 텔로니어스 멍크를 첫 손에 꼽았다) 그 중에서 <재즈 핫>과 <재즈 에코> 독자 투표에서도 에럴 가너는 2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에럴 가너는 당시에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일급 피아니스트들과 비교해서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한 발 뒤로 물러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한 느낌은 아마도 당시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멍크는 1960년대 중반까지, 피터슨은 ‘70년대까지 재즈 팬들과 비평가들의 투표에서 계속 등장했지만 에럴 가너의 이름은 그 이후에 결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1971년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Play Misty For Me>를 통해 가까스로 다시 조명을 받았던 스탠더드 넘버 ‘미스티 Misty’ 만을 남기고 에럴 가너의 이름은 서서히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에럴 가너의 천재성을 진작에 알아봤던 아트 테이텀과 함께 1952년 뉴욕 버드랜드에서
안개와 같은 이름, 에럴 가너
그는 음악 비즈니스계와 거리를 둔 은둔형 연주자가 아니었다. 건강상의 적신호가 켜졌던 1975년까지 그는 전 세계 투어, TV 출연 등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재즈 연주자였고 컬럼비아, 머큐리 등 대형 음반사들과 10년 동안 음반을 녹음했던 소수의 재즈 연주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화려했던 시절은 왜 빠르게 빛을 잃었던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지독한 스타일리스트였던 그가 재즈의 전반적인 흐름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스트라이드 피아노로부터 비밥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즈 피아노 스타일들을 뒤섞은 것 같은 그의 주법은 레드 갈런드, 아마드 자말과 같은 소수의 계승자만을 낳았고 ‘40년대부터 생애 끝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던 그의 스타일은 급변했던 재즈의 흐름과 거의 무관한 것이었다. 그 급변의 흐름을 쫓았던 재즈 평론가들의 눈에 에럴 가너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그럼에도 아름다운 터치에 낭만적인 선율을 추구하면서 그가 누렸던 대중적인 인기를 향해 평론가들은‘칵테일 재즈’라는 악의에 찬 꼬리표를 붙여 놓았다. 시대가 흐르면서 대중들의 취향은 바뀌었고 그를 중요하게 다룬 재즈 역사서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스타일이 독자적이었던 것만큼 그는 실제로 고립된 존재였다. 그가 슬램 스튜어트 쿼텟에서 녹음한 음반들, 찰리 파커의 전설적인 ‘47년 녹음 ‘Cool Blues’에서 연주한 것을 제외하면(이 녹음에서 가너의 연주는 너무도 경이로운 것이었다) 사이드 맨으로서 에럴 가너의 녹음은 거의 전무에 가깝다. 가너의 사이드 맨 녹음은 은둔의 상징과도 같았던 멍크 보다도 드물었으며 동시대의 경쟁자 피터슨, 빌 에번스의 방대한 녹음과는 가장 대별되는 점이었다. 다른 연주자들의 음반에서 그를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가너의 이름을 빠르게 지우는데 있어서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오스카 피터슨처럼 엘라 피츠제럴드와 연주했다면 그의 이름은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빌 에번스처럼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의 일원이었다면 그는 재즈 역사 속에서 늘 언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점은 가너의 음악적 결함 때문이었는데, 악보를 쓰거나 볼 줄 몰랐던 그는 당연히 다른 연주자의 녹음에 참여하는 것이 어려웠고 피아노 트리오 혹은 피아노 독주만으로 자신을 표현했던 그는 지극히 제한된 몇몇의 사이드 맨들만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새로운 작품을 작곡할 때 피아노 연주를 녹음했으며 사이드 맨들은 그 녹음을 듣고 악보로 정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재즈 피아노의 특출한 대가였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는 마음에 떠올린 악상을 피아노로 표현함에 있어서 아무런 기교적 제약을 갖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영롱한 음색과 자신만의 주법을 지니고 있었다. 재즈 팬이 그의 연주 몇 소절을 듣고 그것이 에럴 가너의 연주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였다. 개성이야 말로 재즈 연주자의 첫 덕목이라면 가너는 그 누구보다도 확실히 그 덕목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콜럼비아 레이블 소속이었던 두 뮤지션 에럴가너와 토니 베넷이 함께 한 모습. 서로의 앨범을 들고 있는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모방할 수 없는 음색, 리듬의 소유자
1921년 6월 15일 피츠버그의 한 가정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에럴 가너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귀를 이용해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히기 시작했다. 일곱 살 때 지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깜짝 놀랄 연주를 들려줬던 그는 열한 살 때부터 피츠버그 시내를 통과하는 앨러게니 강 유람선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 에럴보다 네 살 위의 한 소년은 어린 에럴의 연주를 듣고 장래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할 정도였다. 그때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버린 피츠버그의 소년은 훗날 명 드러머로 성장한 아트 블레이키였다.
1944년 뉴욕으로 진출한 스물 세 살의 에럴은 곧장 그 재능을 거장 아트 테이텀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테이텀의 클럽 공연에서 중간에 연주를 들려주는 ‘막간’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테이텀 트리오의 베이시스트였던 슬램 스튜어트의 사중주단의 정규 피아니스트가 된 그는 이때부터 이미 자신의 음반을 녹음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1945년부터 시작된 사보이 레코드와의 녹음은 데뷔시절부터 가너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Laura’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아름다운 음색, ‘Stardust’에서 마치 리듬기타처럼 약간의 시차를 두고 울리는 블록코드는 그의 독창적인 사운드가 일찍이 완성되었다는 점을 선명히 들려준다.
에럴 가너가 ‘47년 다이얼 레코드에서 녹음한 여덟 곡의 피아노 독주는 훗날 <Cocktail Time>이란 제목의 10인치 LP로 발매되었는데 아마도 이 앨범의 제목은 가너에 대한 평론가들의 악평에 불을 당겼겠지만 ‘40년대 모던재즈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이면서도 보기 드문 이 피아노 독주 녹음은 한껏 뒤로 늦춘, 에럴 가너 특유의 레이드 백 리듬의 진수를 들려주고 있다.
사보이, 다이얼, 애틀랜틱 등 주로 독립음반사와 녹음을 진행해 오던 가너는 1950년부터 메이저 음반사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었다. 이는 당시부터 그가 획득한 대중적인 인기를 말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해부터 생애 마지막까지 그의 매니저를 맡았던 마사 글레이저(Martha Glaser)의 수완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1950년 당시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은 재즈 아티스트는 듀크 엘링턴, 세라 본이 거의 유일했으며 1954년 머큐리 레코드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세라 본, 다이나 워싱턴, 헬렌 메릴, 클리퍼드 브라운-맥스 로치 퀸텟 등 최상급 재즈 연주자들만이 이 음반사의 재즈 음악인들이었다.
1960년대 중반 당시 냇 킹 콜과 함께한 에럴 가너. 맨 오른쪽의 인물은 코미디언인 제리 레스터
영화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한 에럴 가너 - 1972년도
에럴 가너의 음악은 대형 음반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그는 ‘Misty’를 수록한 1954년 앨범 <Contrasts>를 머큐리에서 발표했고 다시 컬럼비아로 복귀한 이듬해에 발매해 1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한 명반 <Concert By The Sea>를 발표한 것이다. 이후 그는 왕성한 유럽 투어에 나섰으며 앞서 살펴봤듯이 재즈 팬들의 투표를 통해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혔던 시기도 이 당시였다.
하지만 불화는 늘 전성기에 등장하기 마련이다. 컬럼비아는 에럴 가너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발표 트랙들을 모아 편집 앨범을 발매했고 이에 대해 마사 글레이저는 즉각 소송에 들어갔다. 재판은 가너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을 다친 그는 컬럼비아와의 계약을 조기에 마치고 1959년 말 자신의 음반사 옥타브 레코드를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골수 에럴 가너 팬을 제외한다면 옥타브 레코드 시절 가너의 음반을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음반들은 이전처럼 홍보되지 않았고 각각의 앨범들은 ABC-파라마운트, 필립스, MGM, 런던 데카 등으로 흩어져 배급되었다. 당시의 앨범들이 팬들에게 접근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이름이 사라지는 또 다른 이유였다.
어느덧 ‘60년대가 지나가면서 재즈 팬들의 취향은 크게 바뀌었고 그 상황 속에서 지독한 애연가였던 가너는 1975년 폐기종 진단을 받고 일체의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77년 1월 2일 그는 5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에럴 가너 100주년, 옥타브 레코드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이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대다수의 재즈 평론가들이 가너의 연주를 상업주의에 오염된 재즈라고 공격했지만 그러한 비판으로 사라지기에는 그의 음악은 장인의 솜씨로 빚어진 너무도 경이롭고 독창적인 음악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어쩌면 그것은 평론가들의 공격으로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들의 음악은 재즈 엘리트주의’에 대한 해독제였다.
2021년은 에럴 가너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매니저 마사 글레이저(그녀도 가너와 동갑인 1921년생이다)는 옥타브 퍼블리싱 컴퍼니를 세워 평생 가너의 녹음, 기록들, 저작권을 관리했고 2014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모든 자료들을 피츠버그 대학에 기증, 보관했다. 맥 애버뉴 레코드는 에럴 가너 탄생 100주년을 준비해서 2018년부터 옥타브 레코드 시절의 음반들을 재발매하기 시작했고 올해 정규 음반 12장 모두를 CD와 디지털 음원으로 발매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미공개 되었던 1959년 보스턴 공연인 <In Symphony Hall>과 ‘64년 암스테르담 공연인 <Nightconcert>가 LP와 CD로 등장했고 옥타브 레코드의 녹음들을 LP 석 장에 모으고 여기에 <In Symphony Hall>을 더한 LP 넉 장의 박스 세트 <Liberation In Swing: The Octave Records Story>를 발간했다. 그리고 에럴 가너 100주년을 기념하는 모든 작업은 <Liberation in Swing: Centennial Collection>으로 귀결되었는데 이 세트에는 앞서 언급한 정규 앨범 12장의 CD, 넉 장의 LP 박스, 여기에 홍보용으로 제작되었던 다섯 장의 45회전 싱글 그리고 마사 글레이저가 카세트 테이프에 담은 에럴 가너 생전의 마지막 음악회(이 녹음은 역시 카세트 테이프 그대로 담겨있다), 여기에 희귀 사진을 수록한 60페이지 부클릿이 함께 담겨 있다. 이 박스세트는 재즈 음악가를 기리는 저작물 가운데 가히 기념비적이라고 할 만하다.
아직 에럴 가너를 진지하게 만나지 못한 재즈 팬이라면 옥타브 레코드의 앨범 중 단연 <Closeup in Swing>(1961)을 추천한다. 반면에 컬럼비아와 머큐리 시절의 음반을 들어 본 팬이라면 색다른 편성의 <That’s My Kick>(1967), <Up in Erroll’s Room>(’68), <Gemini>(’72)를 권한다. 하지만 이미 에럴 가너의 음반을 갖고 있을 만큼 갖고 있는 컬렉터들도 60만원이 넘는 100주년 기념 박스 세트를 온라인 숍에서 자꾸 쳐다보며 디지털 스트리밍 시대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편집증을 계속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사고 후회할 것인가, 안 사고 후회할 것인가.
에럴 가너의 매니저였던 마사 글레이저와 함께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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