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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아 샌더스(Pharoah Sanders) 추모 칼럼 - 대체할 수 없는 재즈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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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파로아 샌더스(Pharoah Sanders) 1940.10 ~ 2022.9

 

대체할 수 없는 재즈의 정신

/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지난 해 924일 파로아 샌더스가 세상을 떠나고 넉 달의 시간이 흐른 뒤이다. 뒤늦은 이 추모의 글을 쓰면서 불과 며칠 전인 110일에 세상을 떠난 록 기타리스트 제프 벡에 대한 생각이 내게 자꾸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전설의 연주자였고 무엇보다도 대체 불가능한인물들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두 사람의 이미지는 내게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도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내한 공연을 한 바 있는데 2010년 잠실 올림픽 홀에서 있었던 제프 벡의 첫 내한 공연 때 25백 석의 객석은 모두 차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표곡 <우리 사랑이 끝난 이유 Cause We’ve Ended as Lovers>가 마지막 곡으로 연주 될 때 관중들의 함성은 올림픽 홀의 천장을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파로아 샌더스도 지난 2004년 당시 서울 논현동에 문을 열었던 클럽, 블루노트 서울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그는 함께 온 라비 콜트레인과 함께 트윈 테너로 끝까지 혼신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객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클럽 직원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객석에 앉아 있었던 기억은 내게 쓸쓸한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두 기억은 별개의 것이었지만 지금 와서 보자면 록과 재즈가- 특히 한국에서 - 극명하게 다른 시장 기반 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점은 아마도 두 사람의 인생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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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콜트레인의 후계자

파로아 샌더스는 1940, 그러니까 제프 벡보다 4년 먼저,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페럴 샌더스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1962, 열 여덟 살이었던 대학 시절에 스크리밍 로드 서치 밴드의 일원으로 첫 녹음을 남긴 제프 벡과는 달리 파로아 샌더스는 고등학교을 졸업할 때까지 자신의 색소폰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교회 성가대에서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클라리넷과 색소폰으로 악기를 바꿨고 고등학교 시절 스쿨밴드에서 음악을 배우면서 동시에 시내 클럽에서도 연주를 시작했다. R&B는 물론이고 로큰롤 밴드에서도 연주했던 그는 백인 밴드와 함께 연주할 때는 악명 높은 아칸소 주의 인종분리법 때문에 커튼 뒤에 숨어서 연주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1959년 샌더스 가족은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로 이사했고 페럴은 오클랜드 시립 대학에서 미술과 음악을 잠시 공부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음악에, 특히 재즈에 사로잡혔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찰스 밍거스 밴드의 색소포니스트 존 핸디는 재즈를 연주하려면 뉴욕으로 가라고 젊은 샌더스에게 자극을 주었다. 1962년 결국 그는 핸디의 말을 따랐다.

무명 재즈 연주자 샌더스의 첫 뉴욕생활은 비참했다. 그는 거처를 얻지 못했고 매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하지만 당시 뉴욕 재즈 동네는 프리재즈의 열기로 뒤덮여 있었고 그래서 샌더스는 그곳에서 오넷 콜먼과 돈 체리 그리고 선 라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색소폰 사운드에 가능성을 본 선 라는 샌더스를 그의 아케스트라에 영입했고 그에게 파로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완전히 무명이었던 파로아 샌더스가 뉴욕에 온지 2년 만에 ESP 레코드에서 첫 앨범 [파로아의 첫 작품 Pharoah’s First]을 녹음할 수 있었던 것은 선 라 덕분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에 인생의 결정적인 사건이 파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5년 존 콜트레인은 그의 대작 [승천 Ascension]에 파로아를 초대한 것이었다. 이 앨범에서 파로아는 콜트레인, 아치 솁과 함께 테너 색소폰을 연주했고 곧바로 콜트레인 밴드의 정규 멤버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7년 존 콜트레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 후광은 자연스럽게 파로아 샌더스에게 옮겨갔다.

비유하자면 콜트레인 사후의 샌더스의 모습은 베토벤 사후의 리스트 혹은 바그너의 모습과 닮았다. 베토벤이라는 거인을 출발점으로 새로운 음악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이들이 필연적으로 슈만, 브람스와 같은 보수적인 베토벤 계승자들과 맞섰던 것처럼, 파로아 샌더스가 바라보는 콜트레인은 조지 콜먼, 웨인 쇼터, 마이클 브레커가 바라보는 콜트레인과는 완전히 달랐다. 파로아는 콜트레인의 <즉시 Moment’s Notice><자이언트 스텝스 Giant Steps>와 같은 곡을 연주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콜트레인이 그에게 준 것은 음악적인 기교나 이론이 아닌 정신적이 깨달음이었고 무아의 경지에서 흘러나오는 즉흥연주였다.

 

4 폴란드 바르샤바 페스티벌에 참여한 파로아 샌더스 1981년도.jpg

 

 

스피리추얼 재즈

이때부터 임펄스(혹은 스트라타 이스트)에서 녹음한 파로아의 연작들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유일한 존재 Tauhid](1967), [천부의 능력 Izipho Zam], [인연 Karma], [생각의 보석 Jewels of Thought](이상 1969), [귀 막고 어리석고 눈 먼 자 Summun Bukmun Umyun](1970), [템비 Thembi], [검은 일체감 Black Unity], [동방에서의 실황연주 Live at The East] (이상 1971)에는 연주시간 15분을 훌쩍 넘겨 30분에 이르는 즉흥연주들이 종종 담겨 있는데, 콜트레인을 출발점으로 그가 확대시킨 멀티포닉 사운드 안에는 깨달음, 정신적인 열락의 세계를 담았다. 특히 보컬리스트 리언 토머스가 노랫말을 쓴 <평화의 왕자 Prince of Peace>(이 곡은 뒤에 <-알라--알라--알라 Hum-Allah-Hum-Allah-Hum-Allah>로 제목이 바뀌었다)<창조주는 계획을 갖고 있다 The Creator Has a Master Plan>는 당시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탐닉했던 젊은 음악팬들에게 다가갔던 보기 드문 재즈곡이었으며 심지어 만년의 루이 암스트롱도 1970년 리언 토머스와 <창조주는 계획을 갖고 있다>를 녹음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파로아 샌더스는 단순히 프리재즈 혹은 아방가르드 재즈라고 부를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의 개척자였다. 만약 스피리추얼 재즈(Spiritual Jazz)가 하나의 스타일로 독립될 수 있다면 그 출발점은 파로아 샌더스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60년대 완성한 음악적 기조를 결코 버리지 않았던 그는 1980년대부터 스탠더드 넘버를 다소 섞는 등 유연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재즈의 주된 흐름과는 늘 거리를 두고 있었다. 21세기에 들어 마지막 20년 동안 그의 녹음이 거의 없었던 것은 평론가 존 패럴러스가 지적한 것처럼 그와 음반사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말해준다. 하지만 지난 2021년 전자 음악가 플로팅 포인츠와 발표했던 음반 [약속 Promises]은 마치 꿈결처럼 흐르는 그의 즉흥연주로 평단의 극찬을 받았고 사람들은 이 음반을 그의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무렵 파로아 샌더스는 <뉴요커 The New Yorker>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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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연주를 하다가 뭔가를 시도하려고 하면, 그것을 시도했을 때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죠. 그래서 난 어떤 식이든 제대로 나오지 않은 음들을 음악을 진행하면서 아름다운 소리로 변화하도록 노력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무엇이든 연주를 시작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소리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파로아는 이론과 기교가 아닌 정신적 집중과 이완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통해 음악을 찾아 나섰고 그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즉흥 연주자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재즈 연주자는 나의 머리에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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