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팔랜(Horace Parlan) 추모칼럼 - ‘한계와의 투쟁 통해 얻어낸 찬란한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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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호러스 팔랜 (Horace Parlan) 1931.1 ~2017.2
‘한계와의 투쟁 통해 얻어낸 찬란한 개성’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신체의 장애를 딛고 경이로운 연주를 들려준 재즈의 명인들을 우리가 특별히 생각하는 이유는 연주란 기본적으로 육체와의 부단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올라섰던 아트 테이텀, 조지 시어링, 레이 찰스, 테테 몽톨류에서부터 불완전 골형성증과 싸운 미셸 페트루치아니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인간의 경이로운 모습, 그것의 상징들이었다. 심지어 한 연주자가 집중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특정 신체 부위에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음악인들의 성과는 단순한 경이를 넘어서, 재즈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준다.
심한 화상 때문에 손가락이 오그라들어 붙어버린 왼손으로 현을 잡아야 했던 장고 라인하르트. 콜먼 증후근으로 변성이 되지 않은 목소리로 노래해야 했던 ‘리틀’ 지미 스콧. 그들이 만들어 낸 모든 음 하나, 하나는 그래서 절박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피아니스트 호러스 팔랜 역시 결코 다르지 않았다.
다섯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오른손과 신체의 오른쪽 전체가 마비된 그였지만 그는 부단한 성찰과 노력으로 자신만의 주법을 만들었고 결국 재즈 피아노의 독특한 한 세계를 완성한 인물이었다. 그는 유일무이한 스타일의 피아니스트였다. 왜냐하면 그와 유사한 신체적인 조건으로 일급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독보적인 피아니스트가 현지 시간으로 지난 2월 23일 덴마크 질랜드에 위치한 항구도시 코르소르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86세.
1931년 1월 19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던 그는 1972년부터 쭉 덴마크에서 살았다.
그의 명성이 재즈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1950년대 말 찰스 밍거스의 밴드 ‘재즈 워크숍’에서 연주했을 때부터였다. 그를 전후로 밍거스 밴드를 거쳐 간 피아니스트들을 살펴보면 맬 월드런, 팔랜을 거쳐 롤랜드 한나, 재키 바이야드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강한 블루스 느낌에 두텁고 힘 있는 블록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연주자들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호러스 팔랜 연주의 핵심이기도 하다. 특히 1950년대 말 밍거스는 흑인 교회음악과 모던 재즈를 융합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성장해 어린 시절부터 교회음악을 몸소 익힌 팔랜의 그루비한 연주는 그의 작품의 결정적인 모티브가 되었다고 밍거스는 밝힌 바 있다. 밍거스의 걸작인 <수요일 밤의 기도회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와 <영혼에 담을수록 좋다 Better Git it in Your Soul>는 모두 팔랜과의 협연을 통해 탄생했다.

하지만 팔랜이 이러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든 것은 끊임없는 다름아닌 자기 성찰의 결과였다.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침례교 목사의 가정으로 입양된 팔랜은 다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자, 부모는 그의 심신을 치유하기 위해 일곱 살 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하지만 당시 선생은 소년 팔랜의 어려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고 그 피아노 수업은 석 달 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음악에 대한 팔랜의 관심을 계속 되었고 예배시간에 들었던 가스펠 음악은 팔랜의 정서의 밑바탕을 형성하게 되었다.
10대의 나이가 되었을 때 팔랜은 두 가지 중요한 음악적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 첫 번째는 열두 살 때 피츠버그를 방문한 블라드미르 호로비츠의 음악회였다. 그의 연주를 듣고 감탄한 팔랜은 비로소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때 만난 피츠버그의 저명한 피아노 교사 제임스 밀러는 피아노에 대한 팔랜의 열정을 북돋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팔랜이 만난 또 하나의 중요한 음악적 사건은 열다섯 살 때 피츠버그에서 관람한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공연이었다. 이 밴드의 우렁찬 사운드, 뜨거운 스윙 그리고 자유로운 즉흥연주는 소년 팔랜에게 경이로운 재즈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호로비츠를 우상으로 삼고 있던 팔랜이 엘링턴을 통해 재즈로 눈을 돌리자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인물은 호로비츠 역시 감탄해 마지않았던 거장 아트 테이텀이었고 몇 년 후 테이텀의 스타일을 계승한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 역시 팔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문제는
팔랜 자신은 결코 그들처럼 연주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의 오른손 손목은 심하게 굽어 있는데다가 손가락은 전부 마비가 되어 있어서 테이텀이나 피터슨처럼 화려한 아르페지오를 연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오른손이 건반을 누르는 모습을 보면 주로 검지와 약지만을 사용하고 필요에 따라 중지와 엄지를 이따금씩 사용하는데 그런 점에서 팔랜은 피아니스트로서 최악의 조건에 놓여 있었다.
이때 같은 피츠버그 출신이며 어린 시절 제임스 밀러 지도로 동문수학한 피아니스트 아마드 자말, 그리고 뉴욕에서 새로운 펑크(Funk)의 바람을 몰고 온 호러스 실버는 팔랜의 새로운 나침반이 되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팔랜의 방황은 매우 길어졌을 지도 모른다. 팔랜은 두 사람을 통해 피아노를 화려하고 복잡하게 연주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는데 가급적이면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 독특한 자신의 보이싱을 만드는 것, 블루스의 느낌, 펑키한 리듬감이 재즈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그는 인식하게 되었다.

블루노트 레이블 시절의 젊은 호러스 팔랜 모습
그 결과 팔랜은 양손으로 여러 개의 건반을 동시에 누르는 블록코드 주법을 자신의 기초로 삼았다. 특히 오른손의 장애는 여러 개의 음을 모두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간결하면서도 독특한 소리를 낼 수 있는 2~3개의 음만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만들어 내는 산도(酸度)는 오히려 매우 강렬한 맛을 냈다. 동시에 음의 빈 구석을 메우기 위해 그의 왼손은 부단히 움직였는데, 때때로 왼손은 저음을 포기하고 날렵한 아르페지오 주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오른손은 왼손과 교차되지 않고 그냥 고음역 대에서 자연스럽게 컴핑한다.
1960년부터 1963년까지 호러스 팔랜은 블루노트 레코드에서 여덟 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그 가운데 1960년 한 해 녹음한 음반 넉 장 중에 석 장이 관악기가 없는 트리오 혹은 사중주(이때는 레이 바레토의 콩가가 더해진다) 앨범이란 점은 그의 대범함을 말해준다. 보통 넉 대의 관악기가 쓰였던 밍거스 밴드의 앨범과는 달리 피아노가 이끌었던 그의 1960년 녹음들은 그의 신체적 한계를 어쩔 수 없이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점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개성, 그리고 소울로 가득 찬 블루스의 느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블록코드를 연주할 때 그의 오른손 터치는 기이하게도 약간씩 분산화음을 만들어 내는데 그럼에도 그 불균질한 손맛은 묘한 매력을 준다.
당시 그의 리듬섹션은 다소의 변동은 있었지만 대부분 조지 터커(베이스), 앨 헤어우드(드럼)가 담당했는데 특히 밍거스의 스타일을 빼어 닮은 조지 터커의 베이스는 적극적인 에너지로 팔랜의 왼손이 비워 놓은 저음을 굳건히 채워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했던 하드밥은 ’6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더 이상 시장에서 생존할 수 없었고 공공연한 인종차별은 팔랜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환멸을 더욱 느끼도록 만들었다. 당시의 많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팔랜 역시 미국을 떠나 유럽 무대를 선택했고 1973년 덴마크의 스티플체이즈 레코드에서 팔랜은 10년 만에 리더로서 녹음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10년의 공백동안 그의 음악적 지평은 더욱 넓어졌다. 그는 ’60년대 소울-블루스 스타일에서 벗어나 훨씬 다채로운 화성 진행의 빛깔을 갖추었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마치 시더 월턴의 작품을 듣는 것 같은 진취성으로 가득하다.
아울러 이 시기 팔랜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녹음들 가운데는 색소포니스트 아치 솁과의 이중주를 담은 가스펠 작품집 <집으로 Goin’ Home>와 <마음의 고난 Trouble in Mind>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팔랜 자신도 이토록 완벽한 앙상블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실토했던 이 앨범에서 이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음악적 근원으로 돌아가 전통과 전위주의를 오갔던 색소포니스트를 개성 있는 터치로 반주해 주었다.
이 음반을 들으며 불현 듯 느끼는 것은 팔랜의 전위성이다. 그것은 아치 셰프와 함께 연주함으로써 발생했던 것이 아니라 팔랜이 원래 갖고 있는 파격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의 장애는 ‘정통’, ‘정석’에 갇힐 수 없었고 그 한계에서 자신의 길을 열렬히 갈구했다.

테너 색소포니스트 아치 쉡과 함께 듀오로 연주하는 호러스 팔랜. 1977년도
한계는 장애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일찍이 자신이 디지 길레스피처럼 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빌 에번스 역시 버드 파월처럼 도무지 연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만의 길을 찾아 나섰고 그들의 스타일을 찾았다. 그리고 재즈는 그 어떤 음악보다도 그 개성을 높게 평가해 왔다. 호러스 팔랜의 타계가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팔랜의 개성을 만끽했던 재즈 팬의 심미안, 바로 그것이다. 이제 그러한 개성은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호러스 팔랜, 호러스 팔랜을 말하다 Horace Parlan By Horace Parlan>>(2000년, 돈 맥글린 감독)를 통해 엿보게 된 그의 소박하고 인자한 성품은 그의 부재를 더욱 아쉬워하게 만든다. 그 위대한 개성, 매력의 사라짐을.

호러스 팔랜이 아치 쉡과 함께 담긴 역사적인 듀오 녹음. 1977년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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