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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추모 칼럼 - 한계 초월한 궁극의 즉흥 연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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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한계 초월한 궁극의 즉흥연주가 

소니 롤린스  Sonny Rollins        1930. 9 ~2026. 5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사진/John Abbott,Martin Schoeller, Sonny Rollins Homepage, Getty Image,Art Kane  

 

 

 1958년 8월 12일, 뉴욕 할렘의 이스트 126번가 17번지에서 촬영된 사진작가 아트 케인의 작품 <할렘의 위대한 날>을 위해 모인 57명의 재즈 음악인 중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대열에 합류한 색소포니스트 소니 롤린스는 그중에서 가장 어린 27세의 젊은이였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66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2024년. 소니보다 한 살 위의 동료 색소포니스트 베니 골슨이 세상을 떠나자 이제 소니는 이 사진 속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베니와 소니는 2014년부터 10년 동안 이 사진 중에 남은 단 두 명의 생존자였다). 유일한 생존자를 위한 시간은 상대적으로 그리 길지 않았다. 지난 5월 25일 뉴욕주 우드스톡에서 소니 롤린스가 9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재즈의 황금기를 상징했던 아트 케인의 한 장의 사진은 이제 완전히 역사 속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 소니 롤린스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는 비밥의 창시자들인 셀로니어스 멍크, 찰리 파커, 버드 파월과 녹음한 유일한 현존 인물이었고 테너 색소폰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콜먼 호킨스 스타일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이제 이 역사 속의 인물들과 현재를 이었던 소니 롤린스라는 마지막 끈은 우리의 손끝을 떠나 전설 속으로 날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전설이었다. 84세였던 2014년, 폐섬유증으로 은퇴를 선언한 이후부터 그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와 비교될 수 있는 발군의 테너 색소폰 주자들은 손에 꼽을 수 있었지만 그의 독특함을 대신할 수 있는 연주자는 결코 없었다. 그의 카덴자는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가 은퇴하기 전인 2000년 평론가 프랜시스 데이비스는 이렇게 썼다. 

 

 

3 A Great Day in Harlem.  이 유명한 사진은 소니 롤린스의 타계로 인해 완전한 전설속 인물들이 피사체로 남게 되었다..jpg

 A Great Day in Harlem.  사진작가 아트 케인이 남긴 이 유명한 사진은 소니 롤린스의 타계로 인해 완전한 전설속 인물들의 피사체로 남게 되었다.

 

 

 “소니 롤린스는 가장 위대한 살아있는 재즈 즉흥연주자다. 악기를 다루는 솜씨뿐만이 아니라 즉흥적인 기민함으로 비르투오소를 새롭게 정의한다면(응당 재즈는 그렇게 정의해야 할 것이다), 소니 롤린스는 재즈가 낳은 가장 위대한 비르투오소일 것이다.” 

 

 그의 솔로뿐만이 아니라 그의 음색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대가가 그렇듯이 그는 단 한 소절의 연주로 자신을 증명했다. 거대한 고목이 울리는 것 같은 그 음색은 소니 롤린스 자신이었다. 재즈 평론가 게리 기딘스 역시 롤린스가 아직 현역 연주자였던 시절에 다음과 같이 썼다.   

 

 “소니 롤린스는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현존하는 음악가다. 그의 음악은 우리의 삶이 왜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일깨워 주며,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와 그 자신이 음악인 연주자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내게 알려주었다.” 

 

그 자체가 음악이었던 사람   

 소니 롤린스 음악의 근본적인 힘은 진지함이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늘 비판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봤고 스스로 음악적 한계에 부딪혔다고 판단하면 여지없이 활동을 멈추고 연습에 몰두했다. 동시에 그는 비타협적이었다. 음반사가 부당하게 음악 내용에 간섭하거나 권리를 침해할 때 그는 거침없이 음반사와 맞서 싸웠다.  

 재즈 음악인으로서는 가장 앞서서 흑인 인권운동을 주창했던 그의 1958년 작 [모음곡 자유 Freedom Suite](리버사이드)가 발매되고서 4년 뒤인 1962년 리버사이드 레코드가 앨범 제목을 [그림자 왈츠 Shadow Waltz]로 바꾸어 재발매하자 소니 롤린스는 이에 강하게 항의했고 결국 이 앨범은 ’68년이 되어서 원래의 제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메이저 음반사 RCA-빅터가 그와의 계약을 종료한 이후 미발표했던 녹음을 모아 새 앨범으로 발표하자 소니 롤린스는 즉각 법적인 제동에 들어갔다. 결국 그 음반들은 판매 중지되었다. 그 대가로 당시 소니 롤린스는 6년 동안 아무런 음반사와도 계약을 맺지 못했지만 그는 그 시간을 자신의 안식년으로 삼았고 고갈된 음악적 에너지를 보충했다. 그의 앞에 음악과 돈이 놓여 있고 그 둘이 서로 상충할 때 소니의 선택은 대부분 분명했다. 그는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2 10대 후반의 나이에 연주하는 소니 롤린스..jpg

 10대 후반의 나이에 연주하는 소니 롤린스.

 

 

타협하지 않는 진지함

 소니 롤린스는 1930년 9월 7일 뉴욕 할렘에서 월터 테오도르 롤린스라는 이름으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해군 의전 담당 사병이었던 아버지는 세인트 크로이 섬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세인트 토머스 섬 출신으로, 두 사람은 모두 1920년대 초에 버진 군도에서 뉴욕으로 건너왔다. 아마추어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아버지는 자녀들을 음악 속에서 키웠다. 형과 누나를 따라 월터 역시 아홉 살 때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에 입문했다. 하지만 2년 뒤부터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기 시작했고(이때 R&B 색소포니스트 루이 조던의 사진 한 장이 영향을 끼쳤다), 이후 그의 영웅 콜먼 호킨스를 알게 되면서 열여섯 살에 테너 색소폰으로 악기를 바꾸었다(할렘 슈거힐에서 호크와 같은 블록에 살던 소년 월터는 매일 새벽 연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호크를 창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심지어 옷장 속에 들어가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연습하던 그는 아직 학교를 졸업하기 전인 열여덟 살 때부터 직업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월터는 그의 나이를 감추기 위해 할머니가 그를 부르던 애칭 소니를 예명으로 쓰기 시작했고(아울러 연필로 콧수염을 그리고 무대에 올라갔다) 이듬해에 보컬리스트 뱁스 곤잘레스 밴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대 말, ’50년대 초 뉴욕에서 활동하던 소니는 당연히 그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비바퍼였다. 그는 호크와 더불어서 찰리 파커의 추종자였고 그가 ’49년에 최초로 참가한 J. J. 존슨(사보이), 버드 파월(블루노트), ’51년의 마일스 데이비스(프레스티지) 녹음들은 그 점을 잘 말해준다(아울러 이미 무르익기 시작한 그의 두터운 음색은 경이롭다!). 특히 ’54년 6월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녹음(프레스티지)에서 발표한 그의 작품들인 <에어진 Airgin>, <올레오 Oleo>, <독시 Doxy>는 모두 비밥의 빛나는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동시대의 비바퍼들과 마찬가지로 헤로인 중독자였다. ’50년부터 ’53년까지 소니는 약물 문제로 세 차례나 구속되었고 이로 인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한 그는 ’55년에 그 유명한 렉싱턴 의료원에 입원해 메타톤 치료로 간신히 약물의 악습을 끊었다. 클리퍼드 브라운과 맥스 로치는 퇴원한 소니를 그들의 5중주단의 새로운 색소포니스트로 맞이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활동했던 소니는 ’57년 그의 트리오를 통해(당시 그의 밴드는 피아노를 제외했다) 본격적으로 밴드 리더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그의 ’50년대 앨범들은 모두 이 시기에 녹음된 것으로, 그는 이미 이때부터 일반적인 비밥 스타일에서 벗어나 그만의 색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듣던 칼립소 리듬을 중요한 소재로 삼았으며(<세인트 토머스 St. Thomas>), 평론가 건서 슐러와 마틴 윌리엄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선율을 명확히 살린, 소위 ‘주제에 의한 즉흥연주’는 다른 비밥 연주자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그만의 특징이었다(<블루 세븐 Blue 7>)

 

4 맥스 로치,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한 소니 롤린스 1956년도.jpg

맥스 로치,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한 소니 롤린스   1956년도

 

 

 그럼에도 자신의 연주가 점점 형식적으로 굳어지고 있다고 느낀 그는 1959년에 연주 일선에서 물러나 연습에 몰두했고 하루 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윌리엄스버그 다리의 계단에 앉아 매일 연습에 매진했다. 높은 다리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는 맨해튼과 브루클린의 장대한 정경을 바라보는 것은 그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3년의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비밥에서 자신만의 음악으로 

  많은 사람은 소니 롤린스를 비밥 또는 하드 밥의 대표적인 테너 색소포니스트로 꼽고 있지만 실상 그의 음악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62년 복귀 후 그는 보사노바 앨범을 발표했으며 오넷 콜먼 쿼텟의 두 멤버 돈 체리와 빌리 히긴스를 초대해(베이스는 헨리 그라임스 혹은 밥 크랜쇼) 피아노 없는 사중주단 편성으로 포스트 밥과 프리재즈 중간 영역의 음악을 연주했다(이상 RCA-빅터). 같은 편성으로 존 콜트레인 쿼텟의 두 멤버 지미 게리슨, 엘빈 존스(트럼펫에는 프레디 허바드)와 녹음한 ’66년 앨범 [이스트 브로드웨이 런다운 East Broadway Run Down](임펄스) 역시 같은 지향점의 앨범이었다. 하지만 이 앨범 이후로 ’72년까지 소니 롤린스는 아무런 녹음을 남기지 않았고, 특히 ’69년부터는 모든 활동을 멈춘 채 두 번째 안식년을 3년 동안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인도와 일본을 오가면서 요가와 명상에 심취했다. 

 

 ’72년 복귀 이후 적어도 ’90년대까지 소니 롤린스의 음악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퓨전 시대의 도래로 롤린스의 음악에서 팝적인 느낌이 강해졌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일 것이다. 평론가 피터 워트로스는 ’93년 롤린스의 한 공연을 보고 “가장 위대한 즉흥 연주자인 롤린스가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낭비하는 데 몰두하고 있으며......오로지 관객의 입맛에 영합하여 자신의 위대한 능력을 품격 있게 드러내는 데는 아무런 의지가 없었다.”라고 평했다. 그 공연을 보지 못한 필자로서는 정확히 논박할 길은 없지만 아마도 그런 평가는 루이 암스트롱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음악의 스타일에만 집착한 비평가들의 악습일 공산이 크다. 두 번째 복귀 이후에 발표했던 ’74년작 [최첨단 The Cutting Edge], ’78년 작 [카니발을 멈추지 말라 Don’t Stop the Carnival], 무반주 독주회였던 ’85년 작 [솔로 앨범 The Solo Album](이상 마일스톤) 등의 실황 앨범을 들어보면 이 시기에도 소니의 즉흥연주가 얼마나 비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90년대에도 결코 멈추지 않았으며 2008년에 있었던 내한 공연에서 국내 재즈 팬들 역시 - 분명히 노쇠의 흔적이 있었지만 – 이 노장의 부단한 전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7 첫 내한공연에서 자신의 밴드와 연주하는 소니 롤린스 2008년도12.jpg

역사적인 첫 내한공연에서 자신의 밴드와 연주하는 소니 롤린스 2008년도  -LG아트센터

 

 

음악에 집중하는 축복

 21세기 들어 소니 롤린스는 전설이 되었다. 그래미를 비롯한 수많은 상과 명예 학위가 수여되었으며 미국 정부는 그에게 국립 예술 훈장을 서훈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러한 영예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은퇴 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연주로 얼마나 많은 명예와 돈을 벌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진짜 보상은 그것이 아닙니다.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순간, 자신을 지우고 음악에 빠져 들었을 때 연주는 결코 진부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완전히 비워지죠. 그것이 보상이고 기쁨이며 축복입니다......그래서 연주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이 꽤 컸습니다. 하지만 슬퍼하기보다는 평생 음악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1965년에 결혼하여 2004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 루실 롤린스는 오랜 세월 소니의 매니저이자 공동 프로듀서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소니 롤린스는 그에 관한 모든 자료를 2017년 할렘의 숌버그 센터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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