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에세이 - 메디컬소설

지난 2005년에 연재되었던 엠엠재즈 재즈이야기 컨텐츠들을 이전하였습니다.
글: 최범 | 재즈를 사랑하는 산부인과 의사(서울의료원)

엠엠재즈

청보리와 버드나무 2

청보리의 울음소리 서걱서걱 샤르리 샤르리... 


“선생님, 청보리가 참 예쁘게 피었네요. 전 봄이 되면 푸른 바다와 청보리를 생각해요. 대지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부터 오직 한 빛깔, 강한 초록으로 치장한 저 잎들은 약간 구부러졌지만 자라면서 점점 미끈한 몸매의 강하디 강한 아름다움을 표출한답니다. 겨울을 견디고 꽃샘 추위를 맞으며 새싹을 피우면 저마다 비쭉비쭉 어설픈 몸짓으로 올라오지요. 작달막한 삼사 월 초반을 지나 늘씬한 키의 짙푸른 초록을 발하는 사월 중순에 이르면 송글송글 보리알을 가득 채우고 그 알 끝 하나 하나마다 거칠고 긴 털을 달고 있어요. 

벼는 익으면서 고개를 숙이지만 보리는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아요. 그 빳빳한 자존심과 질긴 줄기의 파란 춤사위에 내노라 하는 봄꽃들이 울고 가지요. 모진 해풍과 황량한 들판의 학대를 이겨내자면 알을 보호하기 위한 억센 줄기와 거친 털이 필요하겠죠. 보리는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감도는 봄 바다를 곁에 두고 넘실대는 짙은 초록빛의 청보리야 말로 가슴 저리도록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운 모습인 것 같아요. 바다의 슬픔을 알아주고 그들이 내어주는 바람에 기꺼이 모든 걸 맡겨버리는 청보리, 그들과 함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맞노라면 자존심 강한 그네들이 울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들키지 않으려고 속으로 삭히는 울음소리를... 서걱서걱 샤르리 샤르리... 슬픈 몸짓 위로 바람에 흩날리는 그네들은 그 흔한 들풀들도 품고 있는 향기하나 갖추지 않은 수수한 몸짓 그 자체이지요. 그 아름다운 무리들이 늘 푸른 소나무처럼 변하지 않는다면 청보리란 단어는 무색해지겠지만 계절의 여왕 오월이 오면 이른 아침의 찬이슬과 오후의 질긴 햇살에 점점 초록빛을 내어줍니다. 그리곤 황금색 옷으로 갈아입지요. 길가에 있는 버드나무만이 초록보다 훨씬 옅은 연두색으로 색칠 한 가지를 늘어뜨린 채 들판을 호령하던 초록빛을 기억하고 있지요. 제가 다른 세상의 옷을 입게 되면 누가 날 기억해 줄까요? 십 칠 년을 혼자 키워주신 아버지 옆에는 누가 있어주나요?” 

숨이 찬지 목이 메는 건지 말끝을 흐리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묻어 있었다. 그 날 저녁 퇴근길에 나는 청보리를 한 다발 꺾어다가 드라이플라워를 만들기 위해 햇빛 잘 드는 베란다에 놓아두었다. 늘 푸른 초록빛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청보리 소녀의 죽음 


몇 주가 흘러간 어느 날 새벽, 꿈을 꾸었다. 초록 색 한복을 입은 소녀가 청보리를 한아름 안고 나타났다. 아버지는 언덕에 앉아서 소녀가 청보리 밭 사잇길을 뛰어 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뛰던 소녀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더니 일어나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놀란 그녀의 아버지가 뛰어 가서 보니 소녀는 버드나무 아래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었다. ‘아빠, 이 꽃 참 예쁘죠?’ 하더니 들판에 피어 있던 꽃을 꺾어 머리에 살며시 꽂았다. 소녀의 머리에는 예쁜 황금 빛 꽃이 꽂혀있었다. 

가만히 보니 어느새 황금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소녀가 어서 받아보라고 했다. 꿈에서 미처 깨어나지도 못한 채 성급히 머리맡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에서는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게 동이 트기 시작하는 바다를 등 뒤로하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병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소녀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옆에서는 소녀의 아버지가 차마 울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사망 선언을 하고서는 허망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니 들판의 초록빛은 어느새 황금 빛 옷으로 갈아입고 길가에 버드나무만이 늘어진 긴 가지를 봄바람에 흐느끼며 죽은 소녀를 애도해 울고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슬픔에 젖어 진료실로 내려와 빈속에 진하게 탄 블랙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서는 책상 서랍을 뒤져 사라 본의 앨범을 찾아 ‘Willow Weep For Me’를 듣는다. 자신은 목소리로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녀의 보컬이 새벽녘의 진료실을 가득 메워준다. 창가에는 황금 빛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다. 이제 아침이다. 


버드나무여 나를 위해 울어주렴. 나를 대신해서 울어주렴. 
네 녹색의 부드러운 가지를 바닷바람에 흔들어 내 그림자를 지워 줘. 
사랑했던 꿈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를 않아. 
화려했던 봄날의 꿈이었지. 
슬프게 흔들리는 버드나무여. 나처럼 슬프단 말인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오. 
만일 나를 애도한다면 네 녹색의 부드러운 가지를 한껏 내려뜨려 
나와 내 그림자를 감싸 안아주오. 
아무도 슬피 울고 있는 나를 다시는 볼 수 없도록. 
오, 울고 있는 버드나무여. 연민에 쌓인 버드나무여. 
네 가지를 내려뜨려 나를 감싸주오.
그리고 나를 위해 울어주렴. 

Willow weep for me, willow weep for me. 
Bend your branches green along the stream that runs to sea Listen to my play listen and willow weep for me Gone by lover''s dream, lovely summer dream Gone and left me here to weep my tears into the stream Sad as I can be, hear me, willow, and weep for me Whisper to the wind and say that love has sinned To live my heart a''breaking and making a moan Murmur to the night to hide the starry light So none will find me sighing and crying all alone Oh, willow weep for me, weep in sympathy Bend your branches down on the ground and cover me When the shadows fall, bend old willow and weep for me Oh, weeping willow tree, weep in sympathy Bend your branches down along the ground and cover me



P.S. 옛날에는 사랑하는 이가 죽었거나 실연을 당했을 때 버드나무 가지를 옷깃에 꽂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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