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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인 쇼터(Wayne Shorter) - 재즈의 구도자, 그가 그린 우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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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ing Wayne Shorter

위대한 음악가 웨인 쇼터 (1933.8 ~2023.3)를 기리며

 

재즈의 구도자, 그가 그린 우주 속으로

 

지난 32일 재즈의 거장 웨인 쇼터가 세상을 떠나자 <재즈 타임스 Jazz Times>의 선임 편집장 제리 세이 박사는 부음기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혁신적이며 불가사의하고 창조적이라는 말은 세기적 전망을 가졌던 음악가 웨인 쇼터를 설명하는 단어다.”

쇼터는 만년까지 그 성격을 잃지 않았다. 그가 직접 쓴 대본으로 그래픽 노블과 함께 석 장의 CD로 발표한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에매넌 Emanon]을 두고 웨인은 인터뷰에서 직접 이렇게 밝혔다(참고로 에매넌은 같은 제목의 디지 길레스피 곡이 그런 것처럼 철자를 뒤집으면 ‘No Name’, 이름 혹은 명칭이 없다는 뜻이다).

이 작품은 10대 때의 나로 되돌아 간 것이다. ‘노 네임은 총체를 의미한다. ‘에매넌이라는 인물과 예술가 그리고 다른 영웅들 사이의 연관성은 결국 독창성에 관한 탐구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창의성에 가장 접근하는 것일 것이다.”

너무 추상적인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또 다른 언급을 찾아보자.

[에매넌]을 녹음했던 2017년은 웨인 쇼터가 실질적인 연주자로 활동했던 마지막 해였다. 그 해에 그는 테리 린 캐링턴, 레오 제네베세, 에스페란자 스팔딩과 함께 디트로이트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그 연주를 담아 작년에 발표한 앨범 [디트로이트 재즈 페스티벌 실황 Live at the Detroit Jazz Festival]에는 다음과 같은 웨인의 글이 실려 있다.

사람들이 이 음반을 듣고서 인생과 문화에 관한 생각까지도 바꿀 수 있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다르고 동시에 동일하다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평생 직함을 달고 다닌다. ‘지휘자, ‘CEO’, 작곡가등등……하지만 인생에서 얻은 지위는, 그가 밴드 리더이든 혹은 사이드 맨이든, 우리가 지금 당장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애써 내놓는다. 음악가도, 의사도, 물리학자도 마찬가지다. 이 음반도 그런 것들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음반은 텅 빈 진공 상태 안에 놓여, 그저 음반 가게에서 팔리기만을 기다리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 밴드는 어떤 식으로든 천장에 균열을 내려고 노력했다. 여기 담긴 음악은 더 나은 음악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인간적인 존재가 되려는 시도들이다.”

/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사진/Universal, Blue Note, Kennedy Center, Getty Image

 

 

2 아트 블레이키 & 재즈 메신저스 시절의 젊은 웨인 쇼터. 가운데는 피아니스트 바비 티몬스, 옆은 아트 블레이키. 1960년도.jpg

    아트 블레이키 & 재즈 메신저스 시절의 젊은 웨인 쇼터. 가운데는 피아니스트 바비 티몬스, 옆은 아트 블레이키. 1960년도

 

재즈의 가장 혁신적이며 불가사의한 인물

세이 박사의 말대로 그는 불가사의한 존재였으며 그런 만큼 그의 말은 다소 난해하다. 하지만 이제 고인이 된 그를 기리면서 만년의 그의 두 인터뷰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러한 뜻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세상의 맥락 속에서 전체를 담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세상에 파장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독창적인 것이며 그것을 통해 예술가는 더욱 인간적인 존재가 된다.>

그의 뜻이 왜곡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분명한 것은 그는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재즈 음악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늘 고민했고 그 고민은 지난 32일을 끝으로 멈췄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재즈계는 이 고뇌하는 스승을 잃은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세상에 파장을 남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어쩌면 그의 신인시절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1933825일 미국 뉴저지 주 뉴워크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 때부터 클라리넷을 배웠고 뉴욕 대학교에서 음악 교육학을 전공한 뒤 스물여섯 살의 나이였던 1959년에 최고의 재즈 밴드 중 하나였던 아트 블레이키의 재즈 메신저스에 입단했던 그는 입단하자마자 <레스터는 마을을 떠났다 Lester Left Town>를 작곡했다. 그 해에 세상을 떠난 레스터 영을 위해 신인 웨인이 쓴 이 곡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웨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스타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내가 레스터를 위해 곡을 썼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음악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이 깃들여 있는가를 늘 깨닫지 못한다. 이 곡은 젊은 연주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연주자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곡이다.”

세상은 물론이고 한 인간에게도 수많은 파장과 영향이 남는 법이다. 어떤 면에서 개인은 그 영향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그는 레스터 영, 콜먼 호킨스와 같은 한 세대 이전의 색소폰 대가들의 연주는 물론이고 어릴 적부터 만화책, 공상과학 소설을 탐닉했으며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틈만 나면 시네마테크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오래전 흑백 영화에 빠져들었다.

돌이켜 보자면 이러한 영향들은 그의 음악 안에는 전부 녹아 들어갔다. 그의 음악에서 등장했던 기발한 주제들과 그만큼 독특했던 결과들. 그로 인해 그는 신인이었음에도 재즈 메신저스에서 단순한 색소포니스트가 아니라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드는 작곡가로서의 중책을 맡았다. 물론 같은 밴드에는 프레디 허버드, 리 모건, 보비 티먼스, 시더 월튼과 같은 작곡을 겸비한 뛰어난 연주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레스터는 마을을 떠났다>외에도 <핑퐁 Ping Ping>, <밤의 어린이들 Children of the Night>과 같은 당시 재즈 메신저스의 핵심 레퍼토리들은 웨인 쇼터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왔다. 아트 블레이키는 웨인의 작품에 크게 고무되었다.

 

 3 마일스 데이비스 2nd 퀸텟 시절 웨인 쇼터와 동료들 모습. 1965년도.jpg

마일스 데이비스 2nd 퀸텟 시절 웨인 쇼터와 동료들 모습. 1965년도

 

재즈 메신저스에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으로

하지만 1964년 중순 웨인 쇼터는 재즈 메신저스를 떠나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일스는 어느 날 웨인에게 물었다.웨인, 음악처럼 들리는 음악을 연주하는 게 지겨운 적 없어?” 그 질문을 통해 웨인은 보다 자유로운 리듬, 과감한 화성 그리고 리허설이 필요 없이 연주자들의 감각과 그에 대한 신뢰 속에 만들어질 수 있는 새로운 음악을 시도했고(왜냐하면 당시 마일스 퀸텟에는 허비 행콕, 론 카터, 토니 윌리엄스가 함께 했으니까) 이를 계기로 웨인의 음악은 소위 하드 밥에서 포스트 밥으로 전환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당시 마일스 퀸텟의 주요 레퍼토리들- <초능력 E.S.P>, <아이리스 Iris>, <발자국 Footprints>, <네페르티티 Nefertiti>, <피노키오 Pinocchio> -‘60년대 중반 비밥 이후의 새로운 비밥을 상징하는 곡들이었고 그 핵심에는 웨인이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포스트 밥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다.

재즈 메신저스에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으로의 급격한 변화는 웨인 쇼터의 솔로 앨범 속에서는 좀 더 점진적인 혹은 절충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이드 맨으로서의 주된 활동 속에서도 ‘6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솔로 앨범 작업에 담긴 그의 곡들은 오늘날 재즈의 뛰어난 고전으로 꼽힌다. <처녀자리 Virgo>, <블랙 나일 Black Nile>, <긍정 혹은 부정 Yes or No>, <---Fee-Fi-Fo-Fum>, <악담하지 마라 Speak No Evil>, <어린 아이의 눈동자 Infant Eyes>, <가우초 El Gaucho> 등은 모두 그 시절에 발표되어 오늘날에도 가장 앞선 연주자들이 도전하는 고전들이다. 그의 말대로 밴드 리더이든, 사이드 맨이든, 그 지위는 지금 만들어야 하는 음악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신선하고 과감한 화성의 새로운 모던 재즈였고 이 양식의 마지막 걸작들이었다.

 

 

4 웨인쇼터 쿼텟 (좌로부터 다닐로 페레즈, 웨인 쇼터, 존 페티투치, 브라이언 블레이드) 80세 기념 공연에서. 2013년도.jpg

그의 마지막 음악적 불꽃을 태운 웨인쇼터 쿼텟 (좌로부터 다닐로 페레즈, 웨인 쇼터, 존 페티투치, 브라이언 블레이드) 80세 기념 공연에서. 2013년도

 

 

소프라노 색소폰의 명인

그럼에도 웨인 쇼터는 그 시대를 또 다시 건넜다. ‘6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멤버 중 유일하게 마일스와 함께 ‘70년대로 진입했던 그는 새로운 사조였던 재즈 퓨전의 수장이 되면서 보통 그보다 열 살 밑의 젊은 연주자들(‘40년대 생들)과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나갔다. 마일스의 레코딩 세션에서 만난,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조 자비눌과 결성한 그룹 웨더 레포트는 이름 그대로 다가올 재즈의 기상도를 내다보는 밴드였다.

1971년부터 무려 15년 간 지속된 웨더 레포트 시절은 웨인에게 빛과 그림자 모두를 안겨주었다. ‘70년대 초 마일스 밴드의 전통을 계승했던 웨더 리포트는 초기에 즉흥적인 일렉트릭 사운드를 추구했지만 점차 자비눌이 밴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밴드의 방향은 토털 사운드로 전환했고 웨인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이 시기의 음악을 듣던 마일스 밴드 시절의 동료 드러머 잭 디죠넷이 로저스와 하트의 스탠더드 넘버 <어디 혹은 언제 Where or When>의 제목을 빌려 어디에 웨인이? Where or Wayne?”라고 씁쓸해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퓨전 시대의 웨인은 <성역 Sanctuary>, <워터 베이비스 Water Babies>와 같은 명곡을 남겼으며(물론 이 곡들은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작업 속에서 탄생한 곡들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주된 악기가 테너 색소폰에서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명연주자란 단 한 마디의 연주를 통해서도 자기 증명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웨인 쇼터는 소프라노 색소폰을 통해 비로소 최고의 색소폰 연주자 반열에 올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급의 연주자였으면서도 테너 색소폰을 통해서는 존 콜트레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소프라노를 통해서 그만의 독특한 음색과 악절을 발견했고 다소 불안한 듯이 떨리는 그의 비브라토는 그의 인증마크가 되었다.

그의 사운드가 만들어진 것은 그의 생애 중 만년에 해당한다. 칠순의 나이를 목전에 두고 다닐로 페레즈(피아노), 존 페티투치(베이스), 브라이언 블레이드(드럼)와 결성했던 그의 사중주단은 재즈 역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집단적인 즉흥연주를 들려주며 쇼터의 소프라노 사운드를 농익게 만들었다. 밴드의 리듬섹션이 자유롭게, 하지만 음악의 그루브를 결코 놓치지 않는 즉흥적인 디딤돌을 만들어 놓으면 이제 힘을 모두 빼고 가벼워진 노구의 웨인은 그 리듬 위에 올라타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환희에 찬 사운드로 노래했다. 밴드 성원끼리 만들어 놓은 초감각적 교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웨인 쇼터 사중주단의 앨범 제목처럼 넘을 수 없는 소리의 장벽도, 그들의 음악을 지탱해 줄 사전의 그물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음악은 공중을 유유히 날아다녔다.

 

 5 에스페란자 스팔딩과 함께 작업한 재즈 오페라 [Iphigenia] 의 악보를 살펴보는 웨인 쇼터. 세상을 떠나기 전 가장 최근의 모습. 2022년도.jpg

에스페란자 스팔딩과 함께 작업한 재즈 오페라 [Iphigenia] 의 악보를 살펴보는 웨인 쇼터. 세상을 떠나기 전 가장 최근의 모습. 2022년도

 

음악의 구도자가 그린 우주

어쩌면 그러한 음악은 기교 그 너머의 세계다. 그것은 동료에 대한 음악적 신뢰에 바탕하고 있으며 서로의 진심 어린 대화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웨인 쇼터 쿼텟의 내한 공연에서 즉흥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곡이 1시간을 넘겨 마무리됐을 때 이제 거동이 불편해 의자에 앉아 있던 웨인을 둘러싸고 다닐로, , 브라이언이 주고받던 행복한 미소는 웨인이 말하던 좀 더 인간적인예술가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의 [에매넌]에 의하면 주인공은 무감각과 안일에 빠져 얼어붙어 있는 인간을 구원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깨어 있는 자각 외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웨인 쇼터는 예술이 그 자각을 일깨운다고 믿었으며 동시에 자각을 방해하는 세상의 천장에 균열을 내고 사람들을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다른 재즈 음악인들과 달리 탐미주의 혹은 유미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예술이란 더욱 완성된 인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음악의 구도자였다. 그래서 고 월러스 로니의 아들이자 역시 트럼펫 주자인 월러스 로니 주니어는 그의 타계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내가 음악과 사랑에 빠진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다…….그의 정직함, 색소폰 주자로서의 인간미와 미덕은 그가 연주하는 모든 음들을 신뢰하게 만들어 준다..”

월러스 로니 주니어의 추모를 보면서 아직 듣지 못한 웨인 쇼터의 작품 한 편이 떠오른다. 이야기는 1966년 마일스 퀸텟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일스는 길 에번스의 빅밴드와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작품을 웨인 쇼터에게 의뢰했다. 웨인이 곡을 완성해 오자 마일스는 이렇게 반응했다. “곡을 써 달랬더니 빌어먹을 교향곡을 만들어 왔네.” 그럼에도 마일스는 이 작품을 녹음하기 위해 길 에번스 오케스트라와 리허설까지 진행했다. 아쉽게도 결국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긴 세월이 지나 분실되었던 웨인의 작품 <우주 Universe>의 악보가 발견되었고 마일스의 후계자 월러스는 이 곡을 녹음으로 남겼다. 하지만 불행히도 월러스는 녹음 직후 2020년에 타계했고 이 녹음은 어쩐 일로 아직도 미공개로 남아있다.

그 작품을 듣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웨인에 대한 가장 값진 추모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작품은 마일스, , 월러스 모두에 대한 기억이자 무엇보다도 웨인이 상상했던 우주의 소리를 통해 불가사의한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웨인은 그의 우주 그 어디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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