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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이브라힘(Abdullah Ibrahim) 추모 칼럼 - 한 재즈 거장의 길고 긴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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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한 재즈 거장의 길고 긴 오디세이 

압둘라 이브라힘(Abdullah Ibrahim)       1934.10~2026.6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지난 6월 15일 남독일의 프린 암 킴지에서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압둘라 이브라힘은 태어나자마자, 프란츠 파농의 표현대로, 그의 땅에서 유배되었다. 그가 태어난 1934년 당시 그의 고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국 소유의 자치 지역이었던 남아프리카 연방이었고 그곳의 소수 백인은 다수의 아프리카인을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이 정권을 잡자, 그들은 소위 ‘아파르트헤이트’라고 불리는 극단의 인종 차별법을 실시했다. 1869년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인종 분리법을 토대로 만든 이 법은 국민을 백인, 혼혈인, 흑인, 아시아인이라는 등급으로 나누고 다른 인종들은 백인과 결코 접촉할 수 없도록 만든 법률이었다. 백인들의 거주 지역에 다른 인종이 출입하려면 그들은 특별 허가증을 발급받아야만 했다. 

 

 재즈의 기원이 20세기 초 미국 남부의 ‘*짐 크로 법(Jim Crow Law)’을 배제하고는 이해될 수 없듯이 남아프리카의 세계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압둘라 이브라힘의 음악 역시 아파르트헤이트를 떼어놓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의 음악은 음악 안에서 인종 분리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증언이자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벽을 넘어서는 음악의 아름다운 선언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1876년부터 1965년까지 미국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를 강제했던 합법적 인종 차별 정책.

 

 

 

2 재즈 에피슬에 참여한 세명의 관악 연주자들, 좌로부터)  키피 모에케스키, 요나스 그완가, 휴 마세켈라.jpg

재즈 에피슬에 참여한 세명의 관악 연주자들, 좌로부터)  키피 모에케스키, 요나스 그완가, 휴 마세켈라

 

 

그 어떠한 인종주의도 음악을 막을 수는 없다.

 압둘라 이브라힘은 1934년 10월 9일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근교인 켄싱턴의 한 혼혈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세례명)이 아돌프 요하네스 브랜드였던 그는 흑백 간의 결혼 또는 성관계가 불법이었던 그곳에서, 남아공의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의 표현처럼, ‘존재 자체가 범죄’로 태어났다. 네 살 때 흉탄에 아버지를 잃은 아돌프는 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그는 어머니를 자신의 누나인 줄 안채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그가 회상했듯이 당시 아프리카인들은 전통적인 신앙체계를 강탈당했다. 그들에게 강요된 것은 기독교였고 아돌프의 가족은 모두 아프리카 감리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다행히도 할머니와 어머니는 모두 교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들을 통해서 아돌프는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성장했던 케이프타운의 ‘제6구역’은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거주 지역으로 전통적인 줄루족의 춤곡이 여전히 유행하는 곳이었다. 그는 피아노로 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열다섯 살 무렵 미국으로부터 송출된 라디오 채널 ‘미국의 소리(Voices of America)’를 통해 재즈를 처음 접했다. 아돌프는 열일곱 살 때 ‘턱시도 슬리커스’란 이름의 스윙밴드에서 연주했는데 돈을 모으면 미군기지 근처의 레코드 숍을 뒤지면서 재즈 음반을 사 모으는데 열정을 다했다. 이때부터 소년 아돌프는 미군기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달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인종적인 이유로 달러 브랜드는 당연히 케이프타운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는 의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케이프타운을 떠나 요하네스버그에서 음악 활동에 더욱 전념했다. 달러는 그곳에서 베이시스트 조니 거츠와 드러머 마카야 은초코를 만나 비밥 트리오를 결성했는데 그때가 그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던 1958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요하네스버그에서 개막된 뮤지컬 <킹콩>에서 피트 오케스트라에 앉아 있던 네 명의 관악기 주자들- 휴 마세켈라 (트럼펫), 요나스 관가 (트롬본), 키피 모에케스키 (알토 색스), 매케이 다바시 (테너 색소폰) -을 만나 하드밥 셉텟 ‘재즈 에피슬’을 결성했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다시피 (에피슬 Epistle은 사도 의 편지란 뜻이다) ‘재즈 메신저스’를 롤 모델로 삼은 이 밴드는 남아프리카 최초의 모던재즈 앨범이라고 평가받는 [The Jazz Epistle Verse 1]을 녹음하고 초판 500장을 발매했다. 

 하지만 1960년 3월 21일,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소위 ‘샤프빌 학살’이 벌어지면서 국민당 정부는 모든 예술 활동을 극심하게 탄압했고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재즈 에피슬은 그해에 결국 해산해 버리고 말았다. 달러 브랜드는 재즈 에피슬의 미공개 녹음과 그의 트리오 녹음을 묶어 그의 첫 앨범 [Dollar Brand Plays Sphere Jazz]를 발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국민당 정부는 1961년 영국 연방에서 탈퇴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세웠다. 하지만 대다수 아프리카인들에게 이 건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듬해에 달러 브랜드는 돌아올 날을 기약하지 않은 채 약혼자이자 재즈 보컬리스트인 사티마 벤자민과 함께 유럽으로 떠났다.

 

3 재즈 에피슬의 첫번째 앨범 커버. 아마도 리이슈 커버인걸로 짐작된다..jpg

 

 

 

망명의 길

 달러 브랜드는 유럽에서 자신의 진가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는 남아공에서 건너온 제2의 델로니어스 멍크였다. 그 점을 제일 먼저 간파한 것은 ’63년 2월 취리히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듀크 엘링턴이었다. 엘링턴은 당시 그가 계약을 맺고 있던 리프라이즈 레코드에 연락해 달러 브랜드를 해외에 처음으로 소개한 앨범 [Duke Ellington Presents The Dollar Brand Trio]를 녹음했다. ’65년 달러 브랜드는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의 초청을 받고 첫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이듬해에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와 몇 차례의 협연을 가졌으며 그가 가장 존경하는 멍크와의 만남도 이때 갖게 되었다. 달러는 훗날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듣기에 멍크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느끼는 그의 리듬 방식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그를 만났을 때 난 ‘당신이 내게 준 모든 영감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멍크는 깜짝 놀랐다. 그는 ‘내게 그런 말을 한 피아니스트는 당신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달러 브랜드는 ’65년 영국의 블랙 라이언 레코드에서 넉 장의 앨범을 녹음했고 이 연주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멍크의 영향을 숨김없이 펼쳐 보였다. 함께한 연주자는 모두 남아공에서 건너온 거츠와 은초코였다.   

 ’67년부터 달러 브랜드는 록펠러 재단의 장학금으로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아울러 이 무렵에 엘빈 존스 밴드에서 연주한 것을 계기로 미국의 여러 재즈 음악인과의 교류를 갖기 시작했는데 오넷 콜먼, 돈 체리, 파로아 샌더스, 세실 테일러, 아치 솁 등 주로 프리 재즈 계열의 음악가들이었다. 많은 비(非) 미국 재즈 음악가들에게 그렇듯이 프리 재즈는 달러 브랜드에게 음악적 정체성을 가져다주었다. 이때부터 그의 음악에는 아프리카적 색채가 서서히 가미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지 음악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자신의 정신적 정체성을 찾아 나섰고 결국 어린 시절부터 믿던 기독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결심했다. 그는 고국을 떠난 지 6년 만인 ’68년에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와 이슬람 세례를 받고 이름을 압둘라 이브라힘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70년에 성지인 메카로 순례에 나섰다. 그는 이 순례의 경험을 작품 <Hajj>로 발표했다. 

 그가 독일의 엔자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새로운 녹음을 남기기 시작했던 것은 이 무렵인 1969년이었다. 이 시기부터 그의 음악은 그 이전의 스타일과는 많은 변화를 보였다. 이전의 음악이 멍크를 비롯한 미국의 모던재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면 이 시기부터 그의 음악은 포스트 밥에서부터 프리 재즈의 영향 그리고 아프리카 민족주의적 성향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피아노 독주를 통해 그는 긴 즉흥연주를 추구했고 ’64년에 망명을 택한 남아공 출신의 베이시스트 조니 다이아니와의 이중주에서도 이브라힘의 음악은 미국 재즈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그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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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브랜드에서 압둘라 이브라힘으로 

 압둘라 이브라힘과 엔자 레코드의 작업은 1973년에 일단락되었다. 그의 앨범들은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상업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무렵 이브라힘은 요하네스버그를 다시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레코드숍을 운영하면서 음반을 제작했던 프로듀서 라시드 밸리를 만나 그로부터 새로운 녹음 제안을 받았다. 라시드가 제안한 음악은 기존의 이브라힘의 음악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좀 더 대중적인 퓨전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곡이 이브라힘의 뜻밖의 작품 <Manenberg> 였다. 

  <Manenberg>는 재즈 에피슬의 동료이자 미국으로 망명한 트럼펫 주자 휴 마세켈라가 1968년 발표하여 미국 순위 1위에 오른 히트곡 <Grazing in the Grass>와 비슷하게 펑크스러운 리듬과 밝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넘쳐나는 곡이었다. 마넌베르크는 케이프타운 외곽에 있는 소도시로, 이브라힘이 어릴 때 성장하던 제6구역이 백인 거주지역으로 전환되면서 그곳에 살던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강제 이주로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럼에도 이곳 마을의 꺾이지 않는 희망을 이브라힘은 음악으로 표현했고 이 곡은 반(反) 아파르트헤이트의 비공식적인 주제곡처럼 쓰였다. 

 하지만 남아공의 정세는 더욱 어두워졌다. 1976년 소웨토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대규모 항쟁이 벌어지자 정부는 이 시위를 폭력으로 억눌렀고 이 와중에 이브라힘은 시위 자금을 모으기 위한 자선 음악회를 곳곳에서 열었다. 탄압을 피해 해외로 나간 이브라힘과 아내 벤자민은 당시 국민당 정부가 불법 단체로 규정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이때부터 그는 국민당 정부가 존재하는 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8 재즈 에피슬의 결성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에서 2016년도에 열렸던 공연에서 함께한 원년 멤버들..jpg

재즈 에피슬의 결성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에서 2016년도에 열렸던 공연에서 함께한 원년 멤버들.

 

 

귀향

 ’70년대 후반에 이브라힘은 자신의 녹음을 직접 제작하기 위해 음반사 에카파를 설립했다(아울러 유통과 마케팅을 엔자 레코드에게 일임했다). 이때 이브라힘의 음악은 또 한 번 변모했다. ’60년대 후반, ’70년대 초에 포스트 밥과 아프리카 민속음악의 결합을 통해 격렬함을 추구했던 그의 음악은 ’70년대 후반 이후부터 서정적인 민요의 모습을 강조했다. ’60년대 후반에 발표되었던 그의 곡 <Tintinyana>를 당시 그의 연주와 ’90년대의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보면 그 차이는 확연하다. 젊은 시절 거친 에너지로 몰아붙였던 그의 연주는 만년에 이르러 정갈한 기품의 타건을 들려주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이브라힘은 <The Wedding>, <African Marketplace>, <Song for Santhima>, <Tuang Guru>, <Barakaat>, <Nisa>와 같은 그의 명곡들을 만들었다. 

 이브라힘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여 27년간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넬슨 만델라와 1990년 독일에서 만났다. 만델라의 설득에 따라 이브라힘은 14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고 4년 뒤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역사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브라힘은 아프리카 음악인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M7 아카데미를 1999년에 케이프 타운에 설립했고 2006년에는 케이프 타운 재즈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M7 아카데미 개교식에서 “음악은 인류의 오랜 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며 궁극의 음악은 단 한 가지뿐이다. 우리 각각의 음악은 그 메아리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2024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즉흥연주는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이자 우리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미국의 국립예술기금(NEA)은 이례적으로 비(非) 미국 국적의 압둘라 이브라힘을 재즈 마스터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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