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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에번스(Bill Evans) - 우리에게 간과된 빌 에번스의 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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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로부터) 베이시스트 에디 고메즈, 드러머 엘리엇 지그문드,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jpg

좌로부터) 베이시스트 에디 고메즈, 드러머 엘리엇 지그문드,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

 

미공개 라이브 앨범 <On a Friday Evening> 발매에 즈음해 돌아보는 빌 에번스의 중,후반기 시절 음악세계

Bill Evans

 

베이시스트 에디 고메즈와의 파트너쉽을 통해 바라본

우리에게 간과된 빌 에번스의 진가!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지금껏 엠엠재즈 매거진이 발간되어온 23년 동안 단 한 차례도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에 관한 커버 스토리를 다룬 적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 빌 에번스의 앨범이 아무런 리이슈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 지난 수년간 레조넌스 레이블을 통해 다수의 미공개 유작들이 지속적으로 발매되기도 했었죠. 그 작품들은 대부분 준수하거나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간혹 조악한 부틀렉 수준의 음질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2016년도에 발매되었던 <Some Other Time : The Lost Session from the Black Forest>, <Another Time : The Hilversum Concert> 같은 경우는 다운비트와 재즈타임즈를 비롯한 당해 각종 해외 평단, 저널을 통해 그 해의 히스토리컬 레코딩으로 선정되기도 했었으니, 최소한 한번쯤은 기사로 다루는 게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자면 그의 이름이 다른 재즈 아티스트들에 비해 너무나 우리와 친숙하고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기에 오히려 간과한 측면도 있었으며, 또 근래 레조넌스 레이블 발매작들의 국내 수입사가 한동안 공석이었던 점도 커버 기사로 다루지 못한 큰 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나마 다뤄볼만한 적절한 타이밍이 왔습니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꽤 오랫동안 빌 에번스의 앨범을 제작해온 유니버설 산하의 콩코드 레이블(마일스톤, 판타지 레코드 카탈로그를 현재 갖고 있는 회사)를 통해 2종의 새 앨범이 지난 달 말 새롭게 제작, 발매되었고 이중 하나는 컴필레이션이지만, 다른 하나는 온전한 미공개 녹음으로 채워진 정규 라이브 앨범이어서 다룰 개제가 된다고 판단, 이 참에 한번 그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시점은 그의 커리어 초기가 아닌 중, 후반기인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에 온전히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이제 본문에서 이야기하게 될 겁니다.  

/김희준 사진/Concord, Phil Brey, Resonance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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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시기를 따져봐야 하는가? 좀 더 정확하게는 빌 에번스가 베이시스트 에디 고메즈(Eddie Gomez)를 만나서 함께 한 만 11년 동안이 되겠죠. 제가 그 시기를 특정한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 시기의 빌 에번스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안정적이었고 그 결과 음악적으로도 최상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점, 두 번째로 베이시스트 에디 고메즈와의 커뮤니케이션과 내적 교감이 세간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아주 훌륭했었고 또 일관되게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스콧 라파로와의 그것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많은 이들이 빌 에번스의 얼터 에고로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물론 그가 빌 에번스의 트리오 음악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고 핵심적인 컨셉트와 틀을 구축하는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음악적인 교류를 행한 시간은 기껏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죠. 그가 살아서 오랫동안 팀워크를 지속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할 수는 있겠으나 그건 가정일 뿐 실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1961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빌 에번스 본인에게도 수개월동안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충격이었다지만 그렇다고 그 사고 이후 빌 에번스가 마냥 실의에 빠져서 연주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힘들었을지언정 다시 회복해 필드에 복귀했고 새로운 베이스 주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죠. 그렇게 맨 처음 그의 눈에 들었던 연주자는 척 이스라엘이었고 그와 함께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연주활동을 이어갑니다만, 이 시기의 빌 에번스 트리오는 음악적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에 있었다고 봐야 맞을 겁니다. 빌 에번스 스스로도 작곡을 포함해 여러 가지 도전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편성적으로 솔로와 듀오, 그 외 관악기가 포함된 캄보 편성, 또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취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주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1966년 푸에르코 리코 출신의 젊은 청년 에디 고메즈를 만나게 되고 당시 제리 멀리건 밴드의 일원이었던 그의 연주에 완전히 반해버린 빌 에번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트리오에 참여해주길 권합니다. 에디 고메즈 역시 이전부터 빌 에번스와의 연주를 원하고 있었고, 자신의 우상중 하나인 스콧 라파로의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놀랍게도 당시 에디 고메즈의 나이는 불과 21살이었고 이는 스콧 라파로가 빌 에번스 트리오에 가입하던 시기의 나이와 비교해도 3살이 더 어립니다)

피터 페팅거가 쓴 빌 에번스의 평전 <How My Heart Sings>(국내 번역서 제목 <빌 에반스 : 재즈의 초상> 황덕호 역)에서 빌 에번스가 에디 고메즈가 처음 트리오 멤버로 가입했을 당시 직접 남긴 코멘트가 있는데 그걸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나는 에디와 오랜 기간 동안 함께 발전을 해나가길 기대한다. 그를 가졌다는 사실은 내게 경이로운 일이다. 이 시점에서 난 우리가 앞으로 뭘 하게 될는지 모른다. 그는 막 에너지가 끓기 시작했고 아이디어가 분출되기 시작하는 중이다. 내가 스콧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한 성질을 그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며 한 무대에서 거의 12번의 솔로를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자신을 억제할 때부터 진짜 의사소통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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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머 잭 디조넷이 가입해 새로운 트리오 라인업을 구축했던 1968년 당시의 모습. 이 멤버들과 함께 연주하는 것에  빌 에번스는 더없이 고무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아쉽게도 잭 디조넷과는 7개월 정도만 함께 하고 결별해야만 했다. 

 

빌 에번스가 자신의 팀 메이트들 중 이처럼 흥분에 가득 차 찬사를 했던 경우는 스콧 라파로 외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에디 고메즈는 그의 옆에 있었죠. 여기에 결정적으로 빌 에번스의 음악적 발전과 숙련도는 이미 60년대 초와는 많이 달라져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마약을 완전히 끊지 못해 건강상의 문제가 간헐적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에디 고메즈와 함께 한 순간부터는 약도 거의 끊고 더욱 더 음악에 집중해 나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가장 의욕에 가득 차 있었고 또 그걸 길게 지속했던 시기라고 하면 적절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음악적 동기를 불어 넣어준 결정적인 존재가 다름 아닌 에디 고메즈였죠. 필자가 앞서 에디 고메즈와 함께 한 기간이 빌 에번스의 음악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말했는데, 그 점에서 누군가는 1961년도 리버사이드에서 발표했던 4종의 앨범을 더 우위에 두고 스콧 라파로와 폴 모션이 함께 했던 그때의 빌 에번스가 최고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사실상 전 세계적으로도 더 유명한 앨범이고 빌 에번스의 디스코그래피를 대표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다수의 팬과 평론가들이 그 작품들을 꼽으리라는 점을 저 또한 잘 압니다. 그 작품들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기꺼이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데, 가장 큰 이유로 다른 어떤 것 보다 빌 에번스의 한층 업그레이드된 피아니즘 때문입니다. 이 시절 빌 에번스의 피아노 연주는 기술, 즉흥연주 표현력, 음색, 구사하는 코드와 화성의 풍성함등 모두 일취월장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레벨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서툴러서 소화해내지 못했던 테크닉들도 어느 새 완벽에 가까운 컨트롤로 해낼 수 있게 되었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경우가 아니라면 미스터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만큼 깔끔해졌죠. 특히나 버드 파웰의 유산을 잇는 밥(Bop) 플레이어로서 빌 에번스의 정점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때부터였습니다.

 

3-1 피아노와 일렉 피아노를 동시에 다루는 빌 에번스. 70년대부터 빌 에번스는 어쿠스틱 피아노외에 일렉 피아노의 활용을 부가적으로 높여나갔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도 보조적인 선이었고 어쿠스틱 피아노를 보조하기 위한 시도라고 직접 말한바 있다..jpg

 피아노와 일렉 피아노를 동시에 다루는 빌 에번스. 70년대부터 빌 에번스는 어쿠스틱 피아노외에 일렉 피아노의 활용을 부가적으로 높여나갔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도 보조적인 선이었고 어쿠스틱 피아노를 보조하기 위한 시도라고 직접 말한바 있다.

 

그가 아름다운 발라드 연주자를 넘어서 온전한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걸 증명하는 지점중 하나인 스윙, 비밥 플레이는 이 시기에 와서 완성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역동적이고 템포를 푸쉬해서 밀어 붙이는 모습은 60년대 초라면 도저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모습이었죠. 연주자로서 이러한 발전은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그가 세상을 떠나는 1980년도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이어집니다. 당시 그의 리더 작들이 1년에 1~2장 정도는 예외 없이 발표되었는데 그중 대부분이 바로 라이브 레코딩이었다는 점, 또 그 라이브 연주의 내용이 기복 없이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그 시기의 작품을 들어보면 쉬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 에번스가 재즈 즉흥연주가로서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 그와 가장 밀도 있는 교감을 나누고 상호 시너지를 불러일으키게 만든 연주자 역시 에디 고메즈였다는 것이죠. 실제로 당시 발매한 라이브 앨범들에서 빌 에번스와 비슷한 비중의 솔로를 부여받는 이도 에디 고메즈였으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이스와의 듀오 녹음을 가졌던 연주자도 다름 아닌 에디 고메즈였습니다. 빌 에번스의 전체 디스코그래피에서 베이스 연주자와의 듀오 녹음은 단 3장인데 그 작품들이 모두 에디 고메즈와의 협연입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는 누구보다 에디 고메즈를 음악적으로 신뢰했으며, 실질적인 진짜 전성기는 에디 고메즈와 함께 한 6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고 말해야 타당하다는 것이 필자의 시각이자 견해입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작곡 비중을 훨씬 더 늘려나가고 당시 인기있던 작곡가 자니 멘델과 미셸 르그랑, 포크 뮤지션 폴 사이먼의 곡을 소화하는 등 레퍼토리의 범위도 계속 확대해나가면서 선곡에 있어서도 유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만 필자 개인적으로 하나 아쉬운 것은 바로 잭 디조넷의 재적기간이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을만큼 짧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드러밍은 지금껏 함께 해왔던 빌 에번스의 어떤 드러머보다 동료의 연주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스타일이었으며 정형화된 리듬 서포팅에서 벗어난 형태였기에 이후 드럼 스틱을 잡았던 마티 모렐이 아닌 잭 디조넷이 트리오 라인업을 계속 유지해나갔다면 빌 에번스의 음악은 좀 더 다채롭고 예측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까닭입니다. 빌 에번스 본인도 잭 디조넷의 드럼을 통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움과 창조적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었죠. 하지만 현실은 불과 7개월 정도 함께 하게 되었고 이후 마일스 데이비스의 록 퓨전 밴드 참여 요청을 받은 잭 디조넷이 떠나게 되면서 마티 모렐, 엘리엇 지그문트, 그리고 마지막 드러머인 조 라바베라로 레귤러 드러머의 계보가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간헐적으로 사이사이 필리 조 존스가 참여하긴 했으나 온전한 밴드 멤버가 아닌 게스트 형식이었다는 점에서 그를 레귤러 팀메이트로 보기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1966년부터 1978년 초까지 햇수로 12, 11년 동안 팀 워크를 이어가며 여러 명연, 명작들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새로이 발매된 1975년도 녹음 <On a Friday Evening>도 그 중 하나로 이야기할 만한 수작 라이브라고 보시면 무리가 없을 겁니다. 이 앨범에 관한 자세한 소개와 리뷰는 다음 달에 리뷰 코너에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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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신화는 만들어지긴 어렵지만 한번 만들어지면, 그 순간부터 공고해지고 단단해져서 좀처럼 수정되거나 개선되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자양분 삼아서 더욱 더 커져만 가죠.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에게 있어 이 신화는 바로 1961년도 빌리지 뱅가드 클럽에서의 라이브 녹음들, 1959년도 녹음인 <Portrait in Jazz>, 1961년 녹음인 <Explorations> 까지, 일반적으로 리버사이드 4부작이라 일컫는 작품들입니다. 이 작품들이 그의 성공의 시작점에서 토대를 만들고 스타일, 음악적 틀의 뼈대를 형성한 점은 분명합니다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빌 에번스를 이야기할 때 오직 여기에만 집중해 이야기하는 부작용 또한 함께 생겨났습니다. 이 칼럼의 의도는 마치 이 리버사이드 시절 2년 동안의 작품들만이 빌 에번스 음악의 전부이자 정수이며 그 이후 그토록 치열하고 열심히 자신을 담금질 했던 시절을 외면하거나 도매급으로 평가하는 걸 막고자 함입니다. 온갖 매체와 저널에서 1960~61년도 리버사이드 시절의 녹음에 만점을 부여하며 가치를 끌어올렸지만 진정한 빌 에번스의 피아노 완성은 결코 거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 그가 부단히 갈고 닦아 자신의 연주를 끌어올리고 레퍼토리, 음악적 도전의 범위까지 넓혀나간 건 바로 60년대 중반부터이며 이후 그의 음악 세계는 리버사이드 시절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넓고 다채로웠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가장 큰 도움과 지지를 해준 것은 스콧 라파로가 아니라 바로 베이시스트 에디 고메즈였죠. 그와의 동행이 끝난 1977년 이후 다행스럽게도 또 한명의 젊은 천재 마크 존슨이 마지막 빌 에번스의 곁을 1978년부터 2년 여간 지켜주었고 그 결과 음악적인 성과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We Will Meet Again>, <Affinity> 같은 두 장의 스튜디오 앨범 포함 그때 남긴 여러 라이브 앨범들도 무척 훌륭합니다. 다만 이 시기의 트리오 음악은 지속 기간이 2년 정도로 짧았으며 에디 고메즈, 마티 모렐, 엘리엇 지그문드가 함께 쌓아냈던 그 음악과 사운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봐야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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