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디조넷(Jack Dejohnette) 추모 칼럼 - 위대한 드러머, 그 이상의 완전한 음악가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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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위대한 드러머, 그 이상의 완전한 음악가
잭 디조넷(Jack Dejohnette) 1942.8 ~ 2025.10
1969년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했던 잭 디조넷은 2년 뒤인 1971년에 밴드 탈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2년 전에 존재했던 연주의 자유로움이 점차 사라져간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난 좀 더 자유롭게 연주하고 싶었죠. 하지만 마일스가 드럼에서 점점 더 구체적인 것을 원했고 내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물여덟 살의 젊은 드러머가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것은 쉽게 믿기지를 않는다. 더욱이 그가 속했던 밴드는 당대의 젊은 재즈 연주자들이 모두 꿈꾸었던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였고 드러머에게 특정 연주 스타일을 요구한 사람은 재즈의 역사 그 자체였던 마일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잭의 음악적 태도는 분명했다. 그는 1972년 7월 앨범 [On The Corner]를 끝으로 마일스 밴드를 떠나고 말았다.

마일스 데이비스 퓨전 밴드에 몸담았던 시기의 잭 디조넷. 1970년도
디조넷이 어느 밴드에서 연주하는가의 기준은 오로지 음악뿐이었다. 마일스 밴드 이후 그는 그가 원했던 음악을 ’70년대 초반의 작품들을 통해- 다소 거칠고 설익은 면이 없지 않았지만 – 분명히 들려주었다. 그가 ’75년에 결성했던 밴드의 이름은 ‘디렉션(Direction)’이었고 3년 뒤에는 ‘뉴 디렉션’으로 밴드를 개편하면서 또다시 새로운 방향을 추구했다. 그것은 단지 젊은 시절만의 패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음악을 향한 그의 에너지는 그의 일생 내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가 거쳤던 찰스 로이드 쿼텟, 빌 에번스 트리오,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 그리고 키스 재럿 트리오의 이름만으로도 자명하다. 그는 ’60년대 후반 이후 재즈 흐름의 물꼬를 텄던 역사적 밴드에서 늘 드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아내이자 매니저였던 리디아와 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방향’을 향한 그의 음악 여정은 지난 2025년 10월 26일 뉴욕주 킹스턴에서 멈췄다. 디조넷은 울혈성 심부전증과 싸우고 있었고 그의 나이는 83세였다. 재즈 전문지 <다운비트 DownBeat>는 2025년 연말 애독자 투표에서 명예의 전당의 178번째 회원으로 그의 이름을 올릴 것을 이미 결정한 상태였지만 디조넷은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잭 디조넷이 초기 시카고 재즈 신에서 활동할 때의 동료 뮤지션들. 좌로부터) 헨리 스레드길, 로스코 미첼, 잭 디조넷, 래리 그레이, 무할 리처드 에이브람스
시카고의 천재 드러머
잭 디조넷은 1942년 8월 9일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노동자였던 부모는 모두 아프리카계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들에게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디조넷이 1992년 맨해튼 레코드에서 발표한 [Music For the Fifth World]에서 들려준 원주민 민속음악은 이 점을 반영하고 있다). 빈곤한 소수 인종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정상의 음악가로 성장할 가능성은 지금의 시점에서 보더라고 그다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모든 천재가 그랬듯이 그는 환경의 장애를 뚫고 그의 재능을 드러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부모를 대신해서 잭을 키운 것은 그의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잭이 네 살 때 그를 위해 소형 하프시코드를 장만했고 잭이 열세 살 때 세상을 떠나면서 작은 유산을 잭에게 남겨 그가 전기 피아노와 드럼 세트를 구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잭의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은 이 꼬마에게 절대 음감이 있음을 쉽게 발견했고 열세 살의 잭은 친구가 잠시 맡겨 놓은 드럼 세트로 일주일 만에 홀로 드럼 연주의 기초를 습득했다. 때마침 잭은 시카고의 재즈 DJ였던 외삼촌 로이 우드의 안내로 재즈를 듣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는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을 들으며 이 밴드의 드러머였던 맥스 로치의 연주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잭은 할머니의 유산으로 장만한 피아노와 드럼으로 매일 각각 세 시간씩 연습하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아마드 자말 트리오의 음반을 들으면서 버널 퍼니어의 섬세한 드럼 터치에 매료된 잭은 드럼에 더욱 정진하기로 마음먹고 열네 살에 시카고 음악원에서 정식으로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아홉 살, 아직 십 대의 나이에 잭 디조넷은 이미 시카고 재즈계에서 널리 알려진 드러머가 되었다. 그는 에디 해리스 밴드, 선 라 아케스트라에서 연주했고 존 콜트레인 쿼텟이 시카고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 지각했던 엘빈 존스를 대신해서 투입될 정도로 이 도시의 재즈계에서 신임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잭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은 피아니스트 무할 리처드 에이브럼스(Muhal Richard Abrams) 였다. 잭은 무할이 이끌던 익스페리멘털 밴드에서 연주하다가 ’65년 무할이 조직한 ‘창조적 음악인들의 발전을 위한 모임(AACM)’의 초대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잭은 무할의 권유로 뉴욕에서 활동할 것을 결심하고 단돈 28달러를 손에 쥔 채 뉴욕을 향해 무작정 여행길에 올랐다.

찰스 로이드 쿼텟 멤버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의 잭 디조넷. 1966년도
재즈의 격변기를 가로 지르다
1965년 잭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 스물한 살의 이 드러머는 이미 정상급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아울러 재즈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만큼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 점은 영민한 선배 음악인들 눈에 금세 포착되었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밤, 잭 디조넷은 프레디 허버드가 이끄는 잼세션이 벌어지고 있던 민턴스 플레이하우스로 곧장 향했다. 허버드가 제시한 빠른 템포의 연주를 잭이 그 자리에서 소화하자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훗날 잭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연주를 하려면 긴장을 풀어야 해요. 어떤 긴장도 없이 음악에 집중해야 합니다. 신체적인 움직임에 신경을 쓰면 안 돼요.”
그날 잼세션에 함께 했던 트럼펫 주자 찰스 톨리버(Charles Tolliver)는 그가 속해 있던 밴드의 리더 재키 매클린(Jackie Mclean)에게 잭을 소개했고 잭은 즉각 매클린의 1965년 앨범 [Jacknife]에서 드럼을 연주하는 기회를 잡았다. 심지어 매클린은 잭의 오리지널 작품 <Climax>를 앨범에 수록했는데 잭 디조넷이 생애 최초로 남긴 이 녹음은 이 신출내기 드러머가 얼마나 탁월한 기량과 음악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들려주고 있다. 근래에 발굴된 녹음인 매코이 타이너-조 헨더슨 쿼텟의 [Forces Of Nature: Live at Slugs’] 역시 이 시기 잭 디조넷의 경이로운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무렵 잭은 뉴욕에서 색소폰 주자 찰스 로이드를 만났고 1966년부터 그의 사중주단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당시 찰스 로이드 쿼텟은 당대 가장 참신한 재즈밴드로 그 시기의 록 팬들 마저 열광시킬 만큼의 신선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이 에너지의 원천은 잭의 드럼이었으며 동시에 같은 멤버였던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은 즉흥 연주의 새로운 희열을 들려주었다. 이들의 ’66년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 연주를 담은 [Forest Flower]는 지금도 탁월한 명반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밴드는 찰스 로이드가 슬럼프에 빠지면서 ’68년에 해산했고 잭은 빌 에번스 트리오, 스탠 게츠 쿼텟을 거쳐 1969년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 입단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마일스 밴드는 전기 사운드와 록, 펑크(Funk)의 요소를 수용하면서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즉흥 잼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이때 드럼은 모든 음악의 기초였다.
“마일스, 데이브 홀랜드, 칙 코리아, 웨인 쇼터와 함께 연주했던 시절은 정말 흥미진진한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대에 올라 어떤 재밌는 일들을 벌일 수 있을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죠.......내가 뭔가를 시작하면 데이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그것을 진행했어요. 그러다가 각 악기를 차례로 불러들여 리듬을 만들었죠. 리듬이 무르익으면 마일스가 그 위에 솔로 연주를 얹고, 그 리듬이 완전히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그 패턴을 이어갔습니다.”

계속 새로운 방향으로
마일스 밴드 탈퇴 이후 평생에 걸친 잭 디조넷의 솔로 프로젝트는 그야말로 왕성하게 전방위를 누볐던 그의 음악적 에너지를 고스란히 들려준다. 그것은 단지 재즈의 영역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방가르드, 민속음악 심지어 록(1971년도에 그가 결성했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콤포스트’ 또는 앨범 [Music for the Fifth World]), 뉴에이지(2008년 앨범 [Peace Time])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그의 넓은 음악적 관심은 그의 주된 영역이었던 재즈에서 다채로운 시도를 만들었는데 특히 그의 밴드 ‘스페셜 에디션’(이 밴드는 19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활동했다)은 프리재즈에서부터 M-베이스 스타일까지 다양한 조류를 수용했다.
아울러 재즈에 대한 그의 역사적 안목은 의미 있는 프로젝트 팀을 만들었다. 토니 윌리엄스(그는 마일스 밴드에서 디조넷의 전임 드러머였다) ‘라이프타임’에게 헌정 앨범을 발표한 그룹 ‘트리오 비욘드’(여기에는 존 스코필드, 래리 골딩스가 함께했다), 그의 음악적 뿌리인 무할 리처드 에이브럼스, 로스코 미첼, 헨리 스레드길을 초대해서 2013년 시카고 재즈 페스티벌 실황을 담은 [Made in Chicago]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많은 재즈 팬이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그가 속했던 밴드는 1983년부터 2014년까지 31년간 지속되었던 키스 재럿 트리오다. 물론 이 트리오의 리더는 키스 재럿이었지만 재럿은 자신과 디조넷 그리고 게리 피콕 모두를 리더이자 사이드맨으로 생각했다. 세 연주자의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전대미문의 업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탠더드 넘버를 주로 연주했음에도 유지되었던 이들 음악의 생명력에 대해 디조넷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곡을 마치 처음 연주하는 것처럼 연주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면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죠.......‘서른세 번째 마디에서 어떻게 연주해야 하나’,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할 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걸 더 좋아합니다. 음악에 몰입할 때 나는 변화된 상태, 다른 정신 상태에 들어갑니다.”

젊었던 시절 키스 재럿 트리오 멤버들, 좌로부터) 잭 디조넷, 게리 피콕, 키스 재럿 1986년도
그의 드럼 연주는 로이 헤인스로 출발해서 폴 모션, 엘빈 존스, 토니 윌리엄스로 이어진 포스트 밥의 흐름을 이어갔으며 동시에 그 유산을 브라이언 블레이드를 비롯한 오늘날의 일급 드러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럼에도 디조넷은 드럼 외에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으며 특히 그의 최초 악기인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평생에 걸쳐 지켜갔다. 생애 마지막 해에도 피아노 독주회를 가졌던 그는 수준 높은 피아노 독주 앨범 두 장을 생애에 발표했다.
만년의 인터뷰에서 그의 피아노 연주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을 정도의 연주자”라고 겸손히 말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드러머로 한정해서 부른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것보다는 음악 전체를 만드는 완전한 음악가라고 생각합니다.”
잭 디조넷은 2012년 국립예술 기금(NEA) 재즈 마스터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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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디조넷의 연주는 들을 때마다 ‘드러머의 연주’라는 경계를 조용히 지워버리는 것 같다. 특히 키스 재럿 트리오의 음악 안에서 그는 리듬을 주도하거나 기교를 과시하기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 사람이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듣는 하나의 대화 속에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그의 드러밍은 박자를 세는 것을 넘어 호흡이 되고, 침묵과 여백마저 음악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앨범인 <Whisper Not> 에서 이러한 미학은 더욱 선명해지는데, 그중에서도 ‘Groovin’ High’는 키스 재럿 트리오 특유의 절묘한 스윙 감각과 상호 대화적 인터플레이가 가장 잘 드러난다. 잭 디조넷은 이 트랙에서 중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음악의 흐름을 정확히 붙잡고, 피아노와 베이스가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그곳에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에고(Ego)가 없고, 오직 음악이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깊은 집중만이 있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드러머답지 않게 느껴질 만큼 자유롭고, 동시에 누구보다 정확하게 음악의 중심을 지킨다. 한 명의 연주자로서, 그리고 드러머로서 잭 디조넷을 존경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겸손함, 음악 앞에서 끝까지 자신을 낮추는 태도에 있다. - 재즈 드러머 석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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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잭 디조넷이 초기 시카고 재즈 신에서 활동할때의 동료 뮤지션들. 좌로부터) 헨리 스레드길, 로스코 미첼, 잭 디조넷, 래리 그레이, 무할 리처드 에이브람스.jpg (File Size: 311.5KB/Download: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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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키스 재럿, 게리 피콕, 잭 디조넷 트리오 라인업의 젊은 시절 모습. 1986년도. 이태리의 루가노.jpg (File Size: 159.9KB/Download: 0)
- 9 1973년 일본에서 공연하던 잭 디조넷..jpg (File Size: 212.3KB/Download: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