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슈나이더(Maria Schneider) - ‘저와 멤버 모두가 함께 창조해나가는 신세계’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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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첫 내한공연 앞둔 당대 최고의 재즈 오케스트라 작,편곡가
마리아 슈나이더 Maria Schneider
‘저와 멤버 모두가 함께 창조해나가는 신세계’
필자가 마리아 슈나이더에 관한 첫 칼럼을 쓴 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인 2006년이었다. 당시 그녀는 떠오르는 차세대 재즈 작, 편곡가로서 평단의 지지를 막 받기 시작하던 참이었고 <Allégresse> 와 <Concert in the Garden>으로 일반 재즈 애호가들의 시선에도 조금씩 포착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특히 후자의 앨범은 그녀에게 커리어 첫 그래미 트로피를 안겨준 출세작이 되어주었다) 당시 필자는 해당 칼럼에서 그녀가 만들어내는 작풍이 기존 전통 빅밴드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 존재하기에 다소 조심스럽긴 하지만, 머지않은 향후 재즈 빅밴드 신의 리더로 발돋움 해 상당한 성과를 거둬낼 것이라는 견해를 내비친 적이 있었다.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위치는 어떠한가? 그때 필자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어 이견 없는 당대 최고의 재즈 빅밴드 리더이자 작, 편곡가로 이 방면의 현존 어떤 뮤지션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명성과 작품세계를 구축해내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오직 그녀 자신의 작품에 담긴 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라는 게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인가 하면 그녀는 지금까지 프로로 데뷔한 이후 메이저급 레코드 회사의 프로모션및 조력을 단 한번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의 독립 재즈 레이블 엔자(Enja)를 통해 레코딩 데뷔를 했지만 초기 3장의 앨범을 그곳을 통해 발매한 이후(하지만 실제 제작은 그때도 역시 그녀가 직접 해냈다) 곧바로 기존 음반사와 다른, 별개의 협동조합 형태의 단체 아티스트쉐어(ArtistShare) 를 따로 만들고 그곳을 통해 앨범을 만들어내면서 지금껏 받아온 모든 수상 트로피와 저널및 평단의 찬사를 끌어내어 온 것이다. 언론 홍보도 홍보이거니와 기존의 저널리스트에게 전달이 되기 위한 로비도 예나 지금이나 꼭 필요한 과정인데, 그걸 쟁쟁한 음반사들의 힘없이 손수 컨트롤 하면서 독자적인 행보를 시도해왔음에도 비견하기 어려울만큼 탁월한 성과를 이뤄낸 것은 그저 놀랍다는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음악에 과연 무엇이 담겨져 있기에 앨범을 발매하는 족족 다운비트나 재즈타임즈, 재즈저널리스트연합 같은 유수의 재즈 미디어에서 올해의 뮤지션, 올해의 앨범, 올해의 작, 편곡가 같은 부문 트로피를 끊임없이 수여하고 심지어 앨범을 발표하지도 않은 시기에도 지속적인 공연을 이유로 올해의 작, 편곡가로 적극 추대할 만큼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온 것일까?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궁금증이 무척이나 컸었는데 마침내 직접 눈과 귀로 보고 느낄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이달 마지막 날인 31일 우리에게 단 한차례 주어진다. 그녀를 포함한 19명의 레귤러 오케스트라 단원이 함께 내한해 처음 그녀의 음악을 실연하는 유일무이한 순간! 과연 그녀의 음악에 담긴 예술성이 어느 정도일지 흥분과 설레임을 간직한 채 기다리자. 그리고 그녀가 직접 상세히 전해준 자신의 음악에 대한 가감 없는 이야기들, 처음 이 빅밴드 음악을 시작하면서 가르침을 준 대선배들을 통해 받아온 음악적 동기와 영감, 그녀 개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열정과 창의적인 도전, 여러 가지 개인적, 혹은 사회적 이슈들, 지금 현 시대의 디지털 환경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까지 흥미롭고도 명료하게 담아낸 이 장문의 인터뷰를 읽어보시면 더욱 구체적으로 마리아 슈나이더의 미적 기반과 창작 동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파악하실 수 있을 것이다.
서문/MMJAZZ 편집장 김희준 인터뷰 진행/재즈 기타리스트 정수욱, 김희준
사진/Briene Lermitte, Jimmy Katz, Takehiko Tokiwa; Dina Regine, Greg Helgeson, Gustav Eckart

이렇게 선생님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정말 영광입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기꺼이 해야죠. 잠시만요. 제 목소리 잘 들리시나요?
네. 잘 들립니다. 한국에 오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시죠?
네. 처음입니다. 저희도 무척 기대하고 있어요.
세계 최고의 재즈 오케스트라 중 하나를 드디어 한국에서 만나게 된다는 게 무척 놀랍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공연이 될 거예요. 사람들이 많이 와주면 좋겠어요. 아마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곳까지 가는 데는 정말 많은 일이 필요하거든요. 누가 알겠어요?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이야기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1996년도 즈음 뉴욕에 있었어요. 아마 겨울이었을 겁니다. 친구와 음반가게에 갔다가 거기서 팻 메시니를 만났습니다. 제가 물었죠. “오늘 밤 뭐 하세요? 연주하시나요?” 그랬더니 “아니요. 블루노트 바로 옆에 위치한 클럽 비전(Visions)에서 하는 재즈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갈 거예요”라고 하더군요. 그날 누가 연주하는지도 모르고 메시니와 그의 친구들을 따라갔고, 표를 사서 들어갔는데, 그곳은 이미 꽉 차 있었습니다. 저희는 아주 뒤쪽에 서 있어야 했어요. 그리고 마리아 슈나이더 재즈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습니다.
재미있네요. 팻이 제 밴드를 들으러 왔다는 건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제 기억에는 팻 메시니가 넋을 잃고 공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또 다른 기타리스트도 있었는데, 아마 애덤 로저스였던 것 같아요.
아, 네. 애덤 로저스요.
두 사람이 음악을 정말 집중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어요. “와, 이 음악이 정말 대단한가 보다” 라고 생각했죠. 한 달쯤 뒤였던 것 같은데, 선생님의 첫 음반 전체 스코어가 나왔고 보스턴의 재즈 학생들이 대부분 그것을 샀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이건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때 이후로 저는 선생님의 음악 팬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처럼요.
그렇게 이야기해줘서 감사해요.
오늘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리고 한국 관객들이 이제 악보나 CD가 아니라 공연을 직접 보게 된다는 것도 정말 기쁩니다.
이 밴드를 라이브로 듣는 건 정말 특별합니다. 밴드가 매번 같은 방식으로 연주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정말 많은 것을 바꿔낼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연주해온 곡에서도 서로가 하는 것을 얼마나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지 들을 수 있죠. 그래서 음악이 살아 있고 그 순간 계속 진화해나갑니다.
사람들은 종종 “라이브는 음반만큼 소리가 완벽하지 않지 않다”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제 공연을 본 많은 사람들이 제게 라이브로 듣는 것이 음반으로 듣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게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경험을 감각으로 느끼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 순간에 직접 듣는 것. 거기서 재즈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재즈는 바로 그 순간의 듣기 예술이거든요. 저는 음악 안에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리듬 섹션이 단순히 누군가 뒤에서 코드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듣고 반응하는 것이죠. 그게 참 좋습니다.

마리아 슈나이더의 첫 데뷔작. 고유의 사운드를 첫 앨범에서부터 이미 확인할 수 있다.
첫 시작점에 관하여
1992년에 첫 앨범 <Evanescence>를 녹음하시기 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 앨범은 저뿐 아니라 재즈 빅밴드 역사에 새겨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녹음 세션에서는 분명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까지 어떻게 활동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한 뒤 뉴욕에 왔습니다. 1985년부터 첫 앨범을 녹음한 1992년까지는 풀타임으로 음악 카피스트 일을 했어요. 그때는 컴퓨터가 아니라 펜과 잉크로 직접 악보를 베끼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악보를 채보했죠. 훌륭한 작곡가들의 일을 많이 했고, 그렇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 돈으로 첫 녹음 비용을 마련했어요. 음반사가 “당신의 작품을 녹음하고 싶다”고 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제 앨범을 녹음했습니다.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곡을 썼습니다. 당시 밥 브룩마이어에게 배우고 있었고, 길 에번스의 어시스턴트로도 일하고 있었습니다. 강한 자기 목소리를 가진 훌륭한 작곡가들 곁에 있었던 셈이죠. 저도 정말 제 목소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밴드를 시작해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알았습니다. 원래 그 밴드는 제 전 남편인 존 페드척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남자친구였고, 함께 밴드를 만들었죠. 그때 함께했던 많은 음악가들이 지금도 여전히 밴드에 있습니다. 그렉 기스버트, 스콧 로빈슨, 키스 오퀸, 조지 플린 같은 사람들이요. 많은 이들이 그 밴드에 있었습니다.
베이시스트 제이 앤더슨도 있었나요?
그는 첫 음반에는 참여했지만, 이 밴드에 소속되어 베이스를 치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작업을 진행해가면서 저는 우리 둘의 음악이 매우 다르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존 페드척의 음악은 매우 전통적입니다. 반면 제 음악에는 좀 더 이야기하는 듯한 성격이 있었어요. 그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음악이 잘 맞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따로 녹음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기타를 추가하고 싶어 벤 몬더를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리듬 섹션도 바꾸었습니다. 그 이후 제이 앤더슨을 데려왔고, 피아노에는 정말 놀라운 연주자인 케니 워너가 왔습니다. 드럼에는 환상적인 데니스 맥크렐이 있었죠. 트럼펫 섹션에는 로리 프링크도 데려왔습니다. 몇몇 사람들을 바꾼 이유는, 그 당시 저의 밴드가 존의 밴드와 똑같이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 음악을 녹음하기로 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악보 카피스트로 열심히 일하며 모아둔 돈이 있었죠. 그것은 꽤 마법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구성의 음악가들 중 많은 관악기 연주자들은 존과 함께 밴드를 할 때 제 음악을 연주해본 사람들이었지만, 리듬 섹션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될지 정말 몰랐습니다. 케니 워너와 데니스 맥크렐은 멜 루이스 밴드에서 함께 많이 연주했지만, 제이 앤더슨은 데니스와 한 번도 연주한 적이 없었어요. 저는 그것이 어떻게 그림을 만들어내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이에게 리허설에 한번 와서 잘 맞는지 보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나는 오디션을 보지 않는다. 오디션은 안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디션이 아니라, 서로 함께 연주하는 데 편한지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말했죠. 어쨌든 리허설을 했고, 며칠 뒤 스튜디오에 들어갔습니다. 첫날은 그리 잘 되지 않았지만, 그 뒤 무언가가 일어났습니다. 그 녹음에서 우리가 얻은 것, 그리고 팀 헤이건스가 트럼펫을 연주했던 것, 그것은 정말 마법 같았어요. 지금 들어도 뭔가가 일어났다는 느낌, 무언가 다른 일이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그 시절 저는 제 음악을 시작하기 위해 돈을 벌고, 밥 브룩마이어와 길 에번스 같은 거장의 곁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건 미투 운동 같은 것이 있기 훨씬 전의 일이잖아요. 뉴욕 재즈 뮤지션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위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나요?
저는 그저 그 사람들의 위대함 때문에 위압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미네소타의 아주 작은 농촌 마을 출신이거든요. 언젠가 공항에서 윈턴 마살리스가 제게 다가온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는데, 우연하게도 그의 밴드가 제가 타는 같은 비행기에 있었죠. 당시 그가 다가와서 “당신은 그런 곳에서 와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가요?”라고 묻더군요.
하지만 제가 여자라는 사실은 다행히 제 머릿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제 아버지는 저를 아주 어릴 때부터 오리 사냥에 데려가셨어요. 여덟 살 때부터 저는 늘 남자들, 아버지의 친구들 주변에 있었습니다.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게 익숙했어요. 많은 젊은 여성들은 그런 남자들 사이에 있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제 멘토들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길 에번스도, 밥 브룩마이어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저를 지지해주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오래전 처음 질문을 받았을 때도, 저는 사실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첫 음반을 낸 뒤 한 기자가 제게 “여성 재즈 작곡가라는 건 어떤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남성 기자라는 건 어떤가요?”라고 답했죠(웃음) 제가 음악을 쓸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합니다.
물론 지금도 가끔 밴드 앞에 서 있는 제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면 살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성적인 형상이 보이니까요. 하지만 제 머릿속에서 저는 중립적입니다. 성적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뮤지션으로서 저는 제 자신을 성별로 보고 있지 않으며, 그저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보다 제가 훨씬 더 걱정하는 것은 음악이 과연 좋은 소리로 들리는가, 연주자들이 그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가입니다. 제가 남자였어도 똑같은 것을 걱정했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저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초기에 저에게 영향을 준 일이 하나 있습니다. 길 에번스와 밥 브룩마이어를 만나기 전, 미네소타에 있을 때였습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토시코 아키요시의 공연을 보았는데, 그것은 제게 정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공연을 보면서“나도 저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여성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던 기억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놀라웠던 것은 그녀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자신의 밴드와 함께 미니애폴리스에서 연주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나라의 절반을 가로질러 온 것이죠. 그는 클래식 음악 홀에서 빅밴드와 함께 연주하고 있었고, 그녀의 음악에는 그분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일본적인 영향을 받은 곡들도 있었죠. 그것이 저로 하여금 “나도 저걸 할 수 있을까?”라고 느끼게 했습니다. 당시 저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때의 클래식 작곡 영역에서 하는 일들을 싫어했습니다. 모든 게 무조성이었고, 불협화음이 가득했죠. 저는 거기에 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반면 재즈 세계는 매우 열려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화성이 있을 수도 있고, 아주 멀리 나갈 수도 있고, 때론 무조성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노래일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오, 세상에. 어쩌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토시코는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많은 젊은 여성 뮤지션들이 제가 밴드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 그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범위를 자연스럽게 넓혔으면 합니다. “아, 저 사람은 여자니까 할 수 있구나” 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 모두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1996년 그날 밤 저는 팻 메시니와 애덤 로저스를 따라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벤 몬더를 보러 갔겠죠. 그런데 선생님이 무대에 나오셨을 때, 왼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무대 위에는 아주 터프한 뉴욕 재즈 뮤지션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악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체구의 여성이 와인 잔을 들고 올라오자, 단 1초 만에 모두가 음악과 선생님에게 집중했습니다. 공기가 아주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면, 그것은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음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밴드에서 늘 그렇게 느꼈습니다. 제 밴드와 있을 때 제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의식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커다란 상호 존중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존중했고, 저 역시 그들을 존중했습니다. 이 밴드의 많은 음악가들이 30년 넘게 저와 함께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밴드 안에는 좋은 느낌과 기운이 있습니다. 물론 가끔 누군가가 삶의 변화를 겪으며 좋지 않은 에너지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저는 변화를 줍니다. 왜냐하면 제겐 음악가들 사이의 에너지가 정말 훌륭해야 좋은 팀워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그 느낌이 정말 좋습니다.
선생님의 작곡가로서의 긍정적인 영향력이 이곳 한국에서도 울려 퍼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 일본과 한국에는 음악을 쓰고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여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확실히 그런 흐름이 생기고 있어요.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어떤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아, 나도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고유한 사운드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마리아 슈나이더 재즈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첫 앨범 <Evanescence> 에서 상당부분 형성되었다고 보는데,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들은 <Evanescence>, <Concert in the Garden>, <The Thompson Fields>, <Data Lords> 입니다. 물론 다른 음반들에도 제가 사랑하는 곡들이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Hang Gliding 이나 Cerulean Skies 같은 곡들이죠. <Coming About> 에도 물론 타이틀 곡을 포함해 좋아하는 곡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종종 연주하고요. 하지만 서울에서는 Hang Gliding 을 연주할 예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곡을 좋아하니까요.
제 사운드에 대해 말하자면, 1985년에 대학을 나왔을 때 저는 사운드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찾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것이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죠. 저는 밥 브룩마이어가 제 사운드를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늘 말합니다. 첫 레슨 때 그가 했던 말 때문입니다.
그는 제가 멜 루이스 밴드를 위해 뭔가를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멜 루이스에게도 “이 친구에게 밴드를 위해 곡을 쓰게 해보자”고 이야기했죠. 저는 약간 스트레이트 어헤드에 가까운, 조금은 태드 존스풍의 곡을 가져갔습니다. “이 밴드가 연주하기 좋아할 만한 것, 스윙하는 것을 써야지”라고 생각했던 거죠. 밥은 그것을 보고 있었고, 저는 그가 이미 짜증이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솔로가 있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곡이 진행되고, 이제 솔로가 나오는 거죠”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솔로는 솔로밖에 일어날 수 없을 때에만 나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왜 베이스 주자가 그 코드 진행 위에서 연주하고 있지?”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게 곡의 코드 진행이니까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지. 하지만 베이스 주자는 무엇 위에서든 연주할 수 있어. 피치 셀도 되고, 뭐든 될 수 있지”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제게 일어난 일은, “무엇을 써야 하지?”라고 생각하며 쓰는 대신 “어떤 선택지들이 있고, 나는 정말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채 쓰는 것을 멈추고 조금 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저는 가능성들과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내 목소리는 무엇인가? 내 사운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이 사라진 것입니다.

마리아 슈나이더의 은사이자 훌륭한 작, 편곡가로 많은 가르침을 전해준 밥 브룩마이어
저는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사운드를 찾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모로코 음악을 듣고 모자를 쓰고 멋진 안경을 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모든 가능성을 앞에 펼쳐놓고 “그런데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라고 진실 되게 물어야 합니다. 그것을 작동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소리를 꿈꾸어야 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제 사운드가 생겼습니다.
『Evanescence』에 들어간 음악 대부분은 밥에게 배운 뒤에 쓴 것입니다. 단 Gumba Blue 와 Last Season 두 곡은 아닙니다. 그 곡들은 대학 시절 작은 편성을 위해 쓴 뒤 다시 오케스트레이션한 것입니다. 나머지 곡들, Green Piece, Dance You Monster to My Soft Song, Evanescence 같은 곡들은 모두 밥에게 배운 뒤에 쓴 것입니다.
길 에번스는 오케스트레이션과 색채 면에서 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밥은 노래 너머를 보았다는 점에서 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많은 재즈 곡들은 주제와 변주입니다. 하나의 노래가 있고, 그 노래에 대한 다양한 변주가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그 위에서 솔로를 하고, 밴드가 샤우트 코러스를 연주하고, 색소폰 솔로가 나오죠. 소규모 그룹을 들으러 가도 모두가 한 곡을 연주하고, 그 코드 위에서 차례로 솔로를 합니다. 밥 브룩마이어는 그것을 더 해체했습니다. 그는 모티브에 대해, 그리고 긴 형식의 작곡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밥은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선생님의 공연을 처음 본 공연 이후 CD를 샀고, 선생님의 스코어를 발견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거의 종교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저는 작곡가는 아니지만, 첫 앨범에서부터 선생님은 이미 그 스타일의 새로운 세대, 어쩌면 멜 루이스/뱅가드 전통 이후의 새로운 스타일로 식별될 만큼 분리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새로운 흐름을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음악을 제3자의 입장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Evanescence』를 듣는 일은 과거 전통과의 분명한 구분을 느끼게 했습니다. 저는 빅밴드 음악을 좋아합니다. 카운트 베이시, 듀크 엘링턴, 태드 존스/멜 루이스 같은 거장들의 음악이요. 그런데 1990년대 후반에 선생님이 등장하면서 뭔가가 바뀌었습니다. 음악적으로만이 아니라, 재즈 경제와 산업 자체도 변하고 있던 시기였죠.
제가 정말 음악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느낀 음반은 멜 루이스 밴드와 함께한 밥 브룩마이어의 1982년도 발매작 <Make Me Smile> 입니다. 그 앨범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음반은 제게 “이 어법 안에서도 매우 정교한 음악, 클래식 음악과 견줄 수 있는 음악을 쓸 수 있구나”라고 깨닫게 해줬습니다. 길 에번스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오케스트레이션과 표현의 영역에 더 가까웠습니다. 밥의 것은 좀 더 원형질에 가까운 지적인 영역이었습니다. 저는 그 앨범이야말로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작품은 멜 루이스 밴드의 음반이었는데, 동시에 밴드 안에서 문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밴드의 멤버들은 태드 존스의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태드는 유럽으로 갔고, 갑자기 밥이 전혀 다른 사운드를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 회복 과정을 지나고 여러 변화를 겪은 뒤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밴드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밥에게는 그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음반을 하나의 전환으로 봅니다. 그 전환은 저에게 “빅밴드가 꼭 주제와 변주의 형식일 필요는 없구나”라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빅밴드는 보통 트럼펫, 색소폰, 트롬본으로 이루어집니다. 빨강, 파랑, 노랑이라는 세 가지 기본색 같은 것이죠. 길 에번스는 저에게 특정한 것들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미국의 모든 학교에 빅밴드가 있고, 유럽에도 빅밴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 밴드에 이상한 악기들을 추가하기보다는, 빅밴드를 위해 쓰되 그것을 오케스트라처럼 들리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더블링, 목관 더블링, 뮤트, 악기들의 독특한 조합을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길 에번스는 더블 리드와 프렌치 호른 같은 것들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빨강, 노랑, 파랑을 사용해 그 안에서 모든 색의 혼합을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저는 늘 어머니에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엄마 덕분이에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크레욜라 크레용이 들어있는 큰 상자를 받곤 합니다. 크레용 깎이가 달려 있고, 초록, 주황, 파랑의 온갖 변형이 들어 있는 상자 말이죠. 하지만 제 어머니는 저에게 여덟 색짜리 상자만 사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직접 색을 섞는 법을 배우길 바란다”고 하셨죠. 그래서 저는 빅밴드와 함께 많은 색을 내려고 할 때마다 어머니와 크레욜라 크레용을 떠올립니다.
그렇다면 어머니께 공을 돌려야겠네요.
마리아 슈나이더: 네. 맞아요. 어머니죠(웃음)
음악적 색채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Concert in the Garden』 이후 선생님이 아코디언을 포함한 다양한 음향과 색채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그것도 선생님이 발전시키려 했던 또 하나의 고유한 사운드였나요?
그에 관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전 <Concert in the Garden> 의 타이틀 곡을 작업하고 있었고, 헌터 칼리지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새로운 곡을 시도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죠. 트럼페터인 잉그리드 젠슨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앉아 있었고, 방 안에는 작은 오르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음식을 사러 나갔고, 저는 거기 앉아 오르간으로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게 이렇게 들렸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들리게 만들 수가 없다”고 말했죠. 잉그리드가 말했습니다. “게리 베르세시를 아코디언으로 불러보세요. 그 소리, 아코디언 같아요.” 저는 “흥미로운 생각이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게리가 왔고, 저는 즉시 아코디언에 대해 뭔가를 깨달았습니다. 빅밴드에서 제가 가장 답답해했던 점은 아무도 높은 음을 부드럽고 작게, 오래 지속해서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리드 연주자들은 플루트를 어느 정도 연주하지만 클래식 플루트 연주자는 아니고, 음을 오래 붙잡을 수 있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소프라노 색소폰은 그렇게 할 경우 음정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날카로워집니다. 트럼펫은 날카롭고 커지고, 그렇게 오래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뮤트를 주면 금방 피곤해집니다. 피아노, 기타 또한 음량이 줄어듭니다. 아무것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코디언에서는 작은 높은 음들이 바이올린처럼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오, 세상에, 이건 계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새 리듬 섹션 안에서도 새로운 사운드를 더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음악이 갑자기 프랑스적으로, 혹은 페루적으로 느껴지게 하거나, 감정적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하게 해주었습니다. 팔레트가 더 복잡해졌어요. 이제 피아노, 기타, 아코디언이라는 여러 화성 악기가 함께 있게 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연주자들이 언제 빠져야 하는지, 언제 들어와야 하는지, 함께 연주할 때 모두가 동시에 계속 연주하지 않도록 더 민감해져야 했습니다. 그 앨범에서는 아코디언을 아마 두 곡 정도에 넣었을 겁니다. 타이틀인 Concert in the Garden 을 포함해서요. 그 뒤 저는 모든 곡에 그걸 더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에피소드가 떠오르네요. 2000년대 초반 어느 날 재즈 스탠더드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대타가 정말 많았습니다. 저는 완전히 불안해하기 시작했죠. 7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존 드러머가 못 왔고, 피아니스트도 못 왔고, 아무도 그 공연을 할 수 없었습니다. 리듬 섹션에서 정규 멤버로 남은 사람은 벤 몬더 뿐이었을거에요. <Evanescence> 를 만든 뒤, 제이 앤더슨은 투어가 너무 많아서 월요일 밤 공연을 할 수 없었습니다. 케니 워너도 월요일 밤에는 멜 루이스 밴드와 연주하고 있어서 할 수 없었죠. 저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피아니스트 프랭크 킴브로우를 찾았고, 베이스에 토니 셔가 들어왔습니다. 데니스 맥크렐도 멜 루이스 밴드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드러머 팀 호너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약 10년 동안 함께 연주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저는 드러머 클라렌스 펜을 초대했습니다. 그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었고, 이 빅밴드와 아주 훌륭하게 어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이 앤더슨에게도 와서 연주해달라고 했습니다. 거의 10년 만에 다시 연주하는 것이었죠. 게리 베르세시는 그날 프랭크 킴브로우의 대타로 피아노를 쳤습니다. 프랭크는 그 공연을 할 수 없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의 다른 공연이 취소되어 밴드 연주를 들으러 왔습니다.
바로 그날 밤 밴드의 소리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에너지가 바뀌었습니다. 저는 그 전의 밴드와도 10년 동안 훌륭한 공연들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뭔가가 바뀌었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당시 저는 밴드를 그만둘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지친 것 같았고, 더 할 말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더 잘 연주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뭔가를 다르게 연주했다는 뜻입니다.
그 공연이 끝난 뒤 프랭크 킴브로우가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다시는 대타를 쓰지 않을 거야. 절대, 절대 대타를 쓰지 않을 거야.” 그는 그날 공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드럼과 베이스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게리 베르세시의 피아노도 정말 훌륭했죠, 하지만 제가 그 자리에 변화를 주지 않은 것에 조금 아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게리, 내가 하려는 건 밴드에 아코디언을 더하는 거야.”라고 말해주었고 바로 그 시점에 게리를 아코디언 주자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 뒤 프랭크 킴브로우는 202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거의 18년 동안 아마 한 번 정도만 빠졌던 것 같습니다. 프랭크는 마리아 슈나이더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핵심적인 일부였습니다. 그의 열린 귀와 마인드는 연주를 멈추고 어떤 미친 일이 일어나게 열어둘 수 있었죠. 클라렌스 펜도 들어왔을 때 완전히 다른 것들을 시도하곤 했습니다. 갑자기 연주를 멈추면, 스콧 로빈슨이 솔로 섹션에서 혼자 서 있게 됩니다. “이게 뭐지?”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스콧이 이상한 음을 연주하고, 프랭크 킴브로우가 들어와 그 방향을 지지해줍니다. 그것이 밴드를 살아 있게 만들었습니다. 갑자기 오래된 음악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린 거에요.

마리아 슈나이더 오케스트라의 핵심 멤버로 20년 넘게 활약했던 피아니스트 프랭크 킴브로우. 안타깝게도 2020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게리 베르세시가 함께 오죠?
네. 게리는 그 기간 내내 아코디언을 맡았습니다. 이후 프랭크가 세상을 떠난 뒤 게리는 피아노로 옮겼고, 저는 아코디언에 줄리앙 라브로를 데려왔죠.
이번 7월 한국 공연에 벤 몬더가 오지 않나요?
기타의 경우 최근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저는 벤을 정말 깊이 사랑합니다. 하지만 벤은 배드 플러스와 계속 연주하느라 너무 바빴습니다. 그래서 그가 제프 마일스를 추천했습니다. 제프는 놀라운 연주자입니다. 그는 정말 하고 싶어 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들어왔고, 벤과는 매우 다른 사운드를 가지고 있어요. 물론 벤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벤은 천재이고 기존의 영역 너머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프는 그와는 또 다른 것, 새로운 것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벤과 이야기하며 “음악적으로 잠시 제프와 데이트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벤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그는 정말 바빴으니까요(웃음)
사실 벤은 예전에 한 번 밴드를 그만둔 적이 있습니다. <Sky Blue> 이후 <The Thompson Fields> 에 담긴 음악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저는 기타에 라게 룬드를 데려왔습니다. 나중에 제가 <Data Lords> 음악을 쓰기 시작했을 때 라게 룬드가 몇 공연에 빠졌고, 거기에 벤이 들어왔죠. 사실 그 앨범은 훨씬 더 벤에게 맞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쓰던 어떤 목가적인 음악은 자기와 조금 거리가 있다고 벤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른 종류의 음악을 쓰기 시작하자, 저는 “벤, 다시 돌아올래?”라고 물었고. 그는 그러겠다고 했죠. 그렇게 돌아왔고, 그 뒤 제가 데이비드 보위와 작업할 때 벤을 보위에게 소개했죠.
연결이 보입니다. 저희가 선생님의 첫 앨범을 탐구할 때, 그 음악에서 나오는 신선함과 새로움, 가장 큰 충격 중 하나가 일렉 기타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보위가 마지막 앨범을 만드는 데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요. 데이빗과 제가 함께한 Sue 를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당시 데이빗이 저에게 연락해 밴드와 뭔가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정신이에요? 제 빅밴드와 노래를 하고 싶다고요?”라고 말했죠. 사실 아주 이상한 일이었죠. 하지만 그는 진짜로 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우리는 함께 작업 했습니다. 그가 제 음악 중 가장 좋아했던 것은 첫 앨범에 수록된 Dance You Monster to My Soft Song 이었더군요. 그는 어두운 것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업을 시작했고, Sue 를 함께 썼습니다. 그는 밴드와 녹음했고, 그 뒤 에도 더 같이 하고 싶어했어요. 하지만 당시 저는 <The Thompson Fields> 를 녹음하고 믹싱하는 중이었고 몇 달 치 편집과 믹스 일정이 잡혀 있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정말로 내 일정에는 하루도 비어 있지 않다”고 말해야 했죠. 저는 그가 도니 메카슬린의 연주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의 밴드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 아파트에 있었고, 그가 드럼 앤 베이스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저는 도니의 녹음을 틀어주었습니다. “이 밴드를 한번 들어보세요. 이 사람들과 협업해서 앨범을 만들면 좋을 거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들어 했고, 우리는 55 Bar 에 가서 도니의 그룹 공연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벤 몬더의 기타를 추천했는데 데이빗이 그의 연주를 무척 좋아해 결국 <Blackstar> 의 라인업이 완성 되었죠.

팝 스타 데이빗 보위와 함께 Sue 를 작업할 때의 마리아 슈나이더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 만남의 중매자였던 셈이네요.
네. 또 데이빗과 제가 녹음한 뒤, 그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그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밴드가 알게 되었죠. 하지만 그는 저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밴드는 아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데이빗이 사실상 말기라는 것을 알고서 그 앨범 작업을 했습니다. 이 음악 세계에서는 때때로 변화를 만들고, 다른 영향들이 자신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이 연주자들 대부분은 소규모 그룹에서 연주하고 늘 다른 사람들과 작업합니다. 그런데 저는 빅밴드와 함께 있고, 늘 같은 사람들과 작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연주자를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올해 초 발표한 EP <American Crow> 에 담긴 A World Lost 에서도 기타리스트 제프 마일스가 무엇을 하는지 들을 수 있습니다. 벤 몬더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게 좋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솔리스트들이 즉흥 연주를 시도할 때 특정한 방향을 어느 정도 지시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완전히 풀어놓고 스스로 창조하게 하시나요?
와! 먼저 말해야겠어요. 당신은 최고의 인터뷰어입니다. 질문이 정말 좋아요. 지금까지 많은 인터뷰를 해왔는데, 정말 좋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이 인터뷰를 위해 저와 편집장이 공들여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질문 하신 그 부분은 사실 매우 복잡해서 단순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제가 무언가를 듣고 있고, 연주자중 스스로 어딘가에 다다르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리허설을 하기 전에는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듣는지 우선 보게 두려고 하죠. 만약 제가 원하는 곳에 정확히 닿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 “조금 더 이런 방향이면 좋겠다”거나 “저런 느낌이 필요하다”는 말을 아주 섬세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바리톤 색소폰을 주로 다루는 스콧 로빈슨이 <Data Lords> 의 Sputnik 을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우리는 그 곡을 이번에 한국에서 연주할 예정인데, 우리는 여러 공연을 거치며 무엇을 해야 할지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제가 그에게 해야 할 말을 깨달았습니다. “밴드가 높이 올라가면 당신은 낮게 연주하세요. 밴드가 낮게 가면 당신은 높게 가세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죠.
또 다른 예는 The Thompson Fields 입니다. 그 솔로는 프랭크 킴브로우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어려움이 있었고, 저에게도 꽤나 답답한 것이었습니다. 트롬본들이 낮은 B 코드를 연주하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프랭크가 그 위에서 다른 조성의 작은 노래들을 연주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계속 “밴드를 듣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코드들을 더 크게 만들면 그도 더 크게 연주했고, 제가 더 작게 만들면 그도 더 작게 연주했기 때문입니다. 공연 뒤에 저는 “프랭크, 당신은 듣고 있어요. 듣지 마세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나는 평생 듣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는데, 이제 듣지 말라고 하네요. 나는 듣지 않을 수가 없어요”라고 했죠.
시간이 지나 프랭크가 세상을 떠났고, 우리는 그 곡이 정말 성공적으로 표현된 공연을 몇 번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괜찮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원한 것을 표현하지는 못했죠. 그 바이토널리티(bitonality)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코드의 확장처럼 느껴졌지만, 저는 찰스 아이브스처럼, 진짜 (bitonality)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그 곡을 2008년부터 연주해왔고, 저는 답답해서 한동안 그 곡을 많이 연주하지 않게 되었더랬죠
그러다가 최근 공연들을 할 때, 제이 앤더슨에게 말했습니다. “그 섹션 전체에서 아르코로 B음을 계속 연주하면 어떨까요? 계속 B 코드가 있게 하고, 공간이 비지 않게요.” 바로 그거였습니다. 갑자기 작동했습니다. 게리는 “오, 세상에. 훨씬 연주하기 쉬워졌어요. 모든 것이 멈추던 그 공간들에서 저는 무엇을 연주해야 할지 몰랐어요. 어떻게 바이토널하게 만들어야 할지 몰랐거든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 프랭크, 정말 미안해요. 내 잘못이었어요. 처음부터 제이가 B음을 계속 연주하게 했어야 했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이렇듯 때로는 그들에게 왜 어려운지를 제가 직접 알아내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선생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작곡가는 작곡가이고 연주자는 연주자라는 제 고정관념이 깨집니다. 선생님의 음악, 선생님, 연주자들이 너무나 유기적입니다. 작곡가, 음악, 연주자가 모두 함께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일을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제 음악이 그저 곡이고, 그 다음 누군가가 멋진 솔로를 폭발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저는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곡들도 있습니다. Gumba Blue 처럼 모두가 훌륭한 마이너 블루스 솔로를 하는 것을 듣는 것도 재미있고, 저는 그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는 솔로가 곡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묘사할 때가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세계를 함께 창조하고 있을 때가 가장 만족스럽습니다. 제가 단지 그들이 솔로에서 마음껏 쏟아내도록 곡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빅밴드가 해나가야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듀크 엘링턴의 밴드는 정말 유기적이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악보도 없었죠. 길 에번스와 마일스 데이비스도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마리아 슈나이더 재즈 오케스트라는 그 계보 안에 있습니다. 작곡가, 음악, 연주자를 따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독특하게 조직해 하나의 유기적인 음악 단위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연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개인에 관하여
기술과 예술에 대해 짧게 여쭤봐도 될까요? 선생님은 자신의 음악을 스트리밍 서비스에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자주 언급되어 왔습니다.
이제 조금은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듣기를 원하기 때문에 American Crow 를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요즘은 그 외에 다른 몇 곡을 스트리밍에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제 음악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선생님이 기술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예술가의 비전과 작업을 이용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유튜브에 대해 가졌던 문제의식은 바로 선택권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fingerprinting 도구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음악을 그들의 데이터베이스에 넣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것을 업로드하면 “아니요, 당신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도구를 큰 회사와 큰 아티스트들에게만 주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이런 식이었죠. “음악을 거기에 넣으세요. 사람들이 올리면 우리가 거기에 광고를 붙이고 돈을 벌겠습니다. 당신에게도 조금 드릴게요.”이제 그것이 AI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음악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글은 사람들의 시선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음악을 그곳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그게 모두의 데이터를 모으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듣는지, 그 다음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사는지, 당신이 누구인지. 일종의 데이터에 굶주린 구조인 것입니다. 저는 꽤 강하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말해왔고 결국 음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Data Lords> 에서 제 좌절감 같은 것들에 대해 곡을 쓰기 시작했죠.
같은 맥락에서 음악 속 메시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가수들은 가사를 통해 메시지를 쉽게 담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같은 재즈 작곡가는 음악 속 메시지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스웨덴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미술가 로버트 헨라이(Robert Henri)의 훌륭한 책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학생들이 그의 수업과 배운 것들을 기록한 내용인데. 로버트 헨라이는 예술가가 작업할 때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어떤 존재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은 그 상태의 흔적을 그대로 전달한다고 말합니다. 그 상태, 즉 명상적인 장소로 들어가 시간이 사라지는 상태 말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다가 갑자기 시간이 녹아 없어지는 순간, 혹은 음악을 쓰고 있을 때 그런 상태가 찾아 옵니다. 그는 그것을 일종의 포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을 더 큰 앎으로 향하는 표지판이라고 이야기했죠.
우리가 그 장소로 가서 거기서 음악을 가져올 때, 우리는 저 바깥에 있는 무언가로부터 한 조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때론 그것을 진실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우주, 무의식, 혹은 더 큰 의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음악이 정말로 당신을 움직일 때, 그런 곳에서 온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사람들이 컴퓨터에서 notation software 에 입력하고 AI를 사용하면서 음악을 만드는 것을 심각하게 걱정합니다. 그렇게 할 때 앞서 이야기한 포털의 문을 여는 것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제게 작곡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그 장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특히 온갖 방해가 있는 지금 같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모두에게 계속 알림이 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끄지 못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과감하게 꺼야 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컴퓨터도 휴대폰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끝없는 시간과 공간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정말 많은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훨씬 더 창조적인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사람들이 이제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가끔 학생들에게 “스포티파이에 너무 많은 음악이 있어서 많은 음악을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나요?”라고 묻습니다. 학생들은 그렇다고 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그럴 필요 없어요. 정말 사랑하는 몇 가지를 찾아서 그것을 집중해서, 반복해서 들으세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앨범이 몇 장밖에 없었고, 저는 그것들을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Sketches of Spain>도 처음에는 앨범의 모든 것이 다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계속 듣고 또 들었고, 그러다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뭔가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른 일을 하면서 음악을 듣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집중해서 반복해서 들으면, 그 공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됩니다.
빌 에번스와 클라우스 오거먼의 <Symbiosis> 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 그 중간 악장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계속해서 들었고, 마치 빌 에번스를 통과시키고 있는 듯한 공간으로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신과 같았습니다. 음악 듣기에서 그 공간을 찾지 못한다면, 자신의 창작 과정에서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새에 대한 관심은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른 동물들 중에서도 새가 특별히 어필하는 이유가 있는지요?
유년시절 미네소타의 작은 시골에서 새소리를 듣고 자라왔고 새를 보면서 기쁨과 행복을 느껴왔죠. 아버지는 제가 새를 볼 수 있도록 나무 위에 집을 지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이후 뉴욕으로 넘어와서는 여러 해 동안 새를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센트럴 파크에 가서 버드워칭(Birdwatching)을 해야 한다”고 제게 말씀하셨고 새와 관련한 책도 선물로 주셨죠. 하지만 당시 전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어요. 그 뒤 수십 년 동안 저는 음악, 음악, 음악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봄 한가운데에 공원을 가로질러 걷다가 정말 많은 종류의 새를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집에 와서 쌍안경을 가져왔고, 그날 이후 버드워칭이 제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주셨던 그 책을 꺼내어 읽으며 새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었어요.
저는 어떤 계기로든 열정을 갖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를 올려다보면 당신은 그 장소로 가게 됩니다. “세상에, 이 새는 브라질의 아마존 숲에서 여기까지 날아왔구나.”어떤 새들은 아르헨티나나 칠레에서부터 날아옵니다. 수천 킬로 이상의 거리를 날아서 오죠. 그들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며, 그 경이의 세계가 바로 음악이 만들어져 나오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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