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ncert Review - 커트 엘링(Kurt Elling) 이보다 더 쿨(Coooool) 할수 있을까? & 메신저의 노래 -김희준 편집장과 보컬리스트 말로의 리뷰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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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rt Review
커리어 첫 본격 펑크(Funk), 소울, 블루스 프로젝트 수퍼블루(SuperBlue) 내한공연
커트 엘링(Kurt Elling)
이보다 더 쿨(Coooool)할 수 있을까?
글/MMJAZZ 편집장 김희준 사진/JazzBridge Company
재즈 보컬이란 무엇인가? 기존의 타 장르 보컬과 어떤 점이 다르기에 별도의 구분된 명칭을 갖고 있으며 그 특징을 대표하는 가수들은 누가 있을까? 사실 이 질문은 단순한 것 같지만 의외로 세세한 부분을 따지기 시작하면 의견이 분분해질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세상을 떠난 토니 베넷은 재즈 보컬리스트일까? 프랭크 시나트라와 냇 ‘킹’ 콜은 또 어떠한가?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보컬리스트 쉴라 조던과 인터뷰를 하던 중 그녀에게 재즈 보컬에 관한 당신만의 정의, 인식을 이야기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지면 인터뷰에 따로 그 내용을 포함시키진 않았지만 그녀는 재즈 보컬의 정의에 가장 첫 번째로 비밥 프레이즈를 자신의 노래와 스캣으로 제대로 표현해낼 줄 아는 걸 제일 중요하게 꼽더군요. 그때 제가 프랭크 시나트라, 토니 베넷 같은 가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더니 자신은 그들을 재즈 보컬리스트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꽤 단호한 답변을 줬었죠. 그러면서 현재 자기가 현재 활동하는 후배들 중 가장 훌륭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생각하는 이가 바로 커트 엘링이라고 부연해주기도 했습니다. 재즈 보컬의 정의, 범주를 어디까지 잡아야 할까를 논하는 지면이 아니기에 그 점에 관한 이야기는 더 지속하진 않겠지만(저 개인적인 생각은 쉴라 조던과 좀 다르긴 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커트 엘링의 노래를 두고 재즈 보컬이라 보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 고개를 끄떡일만큼 명백한 사실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협의의 개념으로 보나 넓은 광의의 개념으로 보나 이 점은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는 분명히 현존 남성 가수들 중 재즈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소급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그런 성격과 음악성을 함께 지닌 보컬리스트입니다.
커트 엘링이 2017년 이후 6여년 만에 내한공연을 가졌습니다. 지난 달 8월 19일 팝, 록 공연을 주로 소화해내는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커트 엘링은 자신의 최신 프로젝트인 수퍼블루 밴드를 대동하고 첫 단독 공연을 가졌죠.(그의 지난 공연은 모두 페스티벌 무대에서 치러졌습니다) 사실 이 수퍼블루 프로젝트는 앞서 쉴라 조던이 이야기한 커트 엘링에 관한 평가를 꽤나 당혹스럽게(?) 만드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활동하는 재즈 보컬리스트들 가운데 성별을 초월해 가장 재즈의 본질과 특성에 부합하는 음악성을 지닌 그가 아이러니하게 가장 노골적으로 팝 영역을 전면에 차용한 첫 프로젝트이기 때문이죠. 스윙이 아닌 백비트(1,3박에 악센트를 주는)리듬으로 이뤄진 록, 펑크(Funk), R&B를 핵심 뼈대로 한 음악들을 전면에 내건 프로젝트가 바로 수퍼블루이며 이는 커트 엘링의 커리어 통틀어 처음 시도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프로젝트로 다른 음악장르를 넘보는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것일까요?
그의 공연은 예전에도 그랬듯 역시나 나무랄 데 없이 멋지고 훌륭했습니다. 남성미 가득한 특유의 보이스 톤, 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정교한 보컬 테크닉, 출중한 리듬감, 밴드와 함께 어우러지는 협응력등 모든 점에서 그는 흠잡을 데가 없었죠. 사실 재즈의 기본 스윙 그루브는 거의 없다시피한, 백비트 기반의 전통적 흑인음악들을 한껏 지향함에도 전혀 어색함 없이 멋지게 소화해내는 전천후 음악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음악 고유의 끈적함과 진득함이 배인 감정 선을 적절히 수렴한 가운데 상대적으로 세련되고 모던한 면을 잘 보여주지 않았나 생각되더군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필자가 이번 ‘수퍼블루 공연’에서 감탄하며 본 부분이 이런 다른 장르의 음악을 중점적으로 구사하면서도 자신의 근본이 재즈에 있다는 점 또한 결코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동시대 재즈 뮤지션의 입장에서 바라본 소울, 록, 펑크계열의 음악은 이런 맛이라는 걸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찰리 헌터를 포함, 함께 한 세 뮤지션 또한 그 점을 충분히 공유하면서 상호 음악적 합을 이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비밥과 블루스에 기반한 즉흥 스캣을 통해 계속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연결점을 수퍼블루 음악 안에 녹여내는 걸 보면서 역시나 커트 엘링은 어떤 음악적 시도를 하더라도 근본부터 재즈 뮤지션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스캣은 들을 때마다 놀라운 게 과거 엘라나 멜 토메, 베티 카터가 들려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음절 하나하나가 악기연주자들의 그것처럼 정교하게 이어집니다. 업템포로 치닫을 때에도 그는 감정적으로 오버하지 않고 소리도 여간해선 마구잡이로 내지 않죠. 이걸 미리 짜놓은 선율로 만들어놓고 행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즉흥으로 풀어내는 데도 엇나가지 않게, 음악적인 흐름을 잘 유지한 채 만들어간다는 게 정말 대단한 거라고 봅니다.
공연 막바지 커트 엘링과 함께 임프로비제이션을 주고받는 장면. 그의 스캣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던, 더없이 멋진 순간이었다.
많은 분들이 스캣을 그냥 리듬을 탄 상태에서 구음형태의 흥얼거리는 것으로 대충 이해하시는 편인데(작년인가 한 국내 웹툰 만화가가 장난치다시피 어쭙잖게 엘라 피츠제럴드의 스캣을 흉내낸 게 온라인 상에 확산된 이후로 이게 한층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그 퍼포먼스에는 각 아티스트들만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음악적 타당성과 오랜 훈련을 바탕으로 한 언어적 표현, 자기만의 개성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커트 엘링 또한 이 점은 마찬가지이며 현재 활동하는 가수들 중 그만큼 폭넓은 장르적 언어들을 바탕으로 입체적인 스캣 능력을 구사할 능력을 가진 가수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관습적인 패턴이나 화려함에 치우치지 않고 곡의 전체 맥락에 잘 들어맞게 표현하는 균형감도 지니고 있죠.
그의 노래에 관한 이야기만 언급했는데 실제로 이 프로젝트의 비중이 커트 엘링과 맞먹을만큼 큰 기타리스트 찰리 헌터의 음악적 서포트 또한 알찼습니다. 이런 세련미 넘치는 백비트 그루브 사운드를 위해서는 그의 존재가 필요불가결이며 커트 엘링 역시 공연 전 인터뷰에서 이 점을 완전 동의하시더군요. 그의 전매특허처럼 인식되는, 베이스 줄이 3개 포함된 하이브리드 기타로 혼자 1인2역을 담당하면서 오밀조밀한 블루스 연주를 듣는 맛 역시 매력적이었으며, 오리지널 레코딩 라인업은 아니었지만 그들에 비해 전혀 부족함 없는 연주력으로 사운드를 채워준 키보드 주자 케니 뱅크스 주니어와 드러머 마커스 피니 또한 이 그루브 파티에 충분히 한 주역으로 자리할 실력을 들려주었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잠깐 뒷이야기를 하자면 이번 한국 공연을 거치는 아시아 투어 일정이 사실 많이 타이트해서 체력적으로 무척 힘들었습니다. 공연당일 점심 즈음 서울에 도착해 곧바로 공연장으로 이동해서 리허설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무대를 치렀습니다. 공연 전 인터뷰를 위해 잠깐 대기실에서 그와 만났을 때에도 눈이 거의 반쯤 감겨져 있어서 '이거 공연 제대로 소화하시겠나‘ 하는 우려마저 들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는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공연 초반부 피곤으로 인해 잠깐 목이 안풀린 듯 했지만 이내 자기 페이스를 찾아갔고,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 모든 에너지를 송두리째 쏟아내는 모습을 보며 진정한 프로페셔널 뮤지션으로서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었죠.
수퍼 블루 프로젝트의 핵심 브레인이라 볼 수 있는 기타리스트 찰리 헌터(Charlie Hunter)
커트 엘링에 대한 저의 존경과 애정은 ‘Nature Boy’와 ‘My Foolish Heart’ 를 처음 라디오에서 들었던(당시 제겐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죠)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어느 새 25년이 훌쩍 넘었으니, 아무리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려고 해도 팬심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그의 퍼포먼스는 현 재즈 신 전체를 놓고 봐도 두말할 나위없는 최고 수준인데다가 그 어느 누구와도 차별되는 오리지널리티 또한 갖고 있음은 명백하죠. 앞선 2차례의 내한 무대에서도 그는 멋진 무대를 보여주었고(자라섬과 서재페 무대에 섰던 두 공연 모두 당시 좋은 공연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2007년 자라섬때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왔었고 2016년 서재페때에는 꽂가루로 인해 목 컨디션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었다고 했었죠. 그런데도 그는 최고의 보컬 퍼포먼스를 들려줬습니다) 전자의 공연들과 음악적 성격이 다른 이번 공연에서도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을 훌륭히 증명해냈습니다. 아마도 지난 8월 19일 공연장에 있던 대부분의 관객들, 심지어 그를 처음 만난 관객들도 쉬이 잊혀지지 않을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겁니다.
음악적 소화력이 워낙 뛰어난 탓에 재즈 외에 다른 장르의 미감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이지만(실제로 유년시절부터 그는 재즈 외에 여러 장르의 음악을 들으면서 성장해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기본을 절대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수퍼 블루를 통해 이 점은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고 전 봅니다) 이번 수퍼블루 프로젝트에 이어 앞으로도 그가 다른 새로운 시도를 또 할 수 있을 텐데, 아마도 그는 장르적 요소들을 새로이 가져오더라도 자신이 체득한 재즈를 통해 이를 바라보고 재즈와의 접점을 유지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새로운 것을 소화해내려고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는 재즈가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며 여러 장르적 변화를 거치는 과정을 통해 생명력을 유지해온 것과 맥락이 이어지는 것이며, 이는 어디에 고정되지 않는 유연한 창조성이 담보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죠. 앞선 여러 작품들에서 증명되었듯 커트 엘링은 보컬리스트로서는 보기 드물게 그걸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뮤지션과 함께 작업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죠. 그렇기에 앞으로 그가 어떤 시도를 하건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그가 시도할 또 다른 프로젝트로 내한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것만으로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커트 엘링(Kurt Elling), 메신저의 노래
글/재즈보컬리스트 말로
노래는 그 사람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보컬이라는 악기야 말로 몸에서 직접 발화되기에 언뜻 수긍하기 쉽지만, 그 내밀한 의미를 체감하기는 그리 간단치 않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쌓인 스스로의 경험이 있은 후에야, 그의 노래가 내비치는 바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20년 남짓 노래해 온 나도 요즘 들어 가끔, ‘아, 과거의 그 일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노래하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 다른 이들의 노래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의 출신지나 살아온 삶에 대한 정보가 들리기도 하고,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보이기도 한다. 가사를 발음하는 투나 목소리를 컨트롤하는 방법에도 그런 것이 다 묻어날 때가 많다.
한국 재즈의 대모라 불리는 1세대 박성연 선생님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짙어진다. 척박한 국내 재즈 환경 속에서 꿋꿋이 재즈클럽 야누스를 운영하신 선생님은 나이를 드실수록 목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대쪽 같고 힘 있지만, 고생을 달게 떠안아야 하는 처연한 떨림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날 때부터 부여받은 목소리에 더해서, 선생님이 겪은 모진 세월이 주는 일종의 선물이며 결국 사라지지 않게 된 문신 같은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타계하신 토니 베넷의 목소리에도 그런 경이로움이 묻어있다. 삶을 끊임없이 낙관하고, 낭만적으로 받아 들인 사람의 포근한 인생관이 넉넉히 풍겨 나온다. 빌리 홀리데이의 쓸쓸한 표정과 엘라 핏제랄드의 순정한 미소는 그들이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부연 설명한다.
어떤 이는 노래하며 울고, 또 다른 이는 꿈꾸기 위해 노래한다. 재즈 보컬의 필수 덕목이라 여겨지는 즉흥 연주의 기교를 습득하는 것이 한 때 내게는 너무나 시급했지만, 지금은 ‘나는 왜 노래 하는가’ 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그렇게 조금씩 깨달아 가며 찾은 이유가 나의 외부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이 언제까지나 안심이 된다. 보석 같은 재즈 스탠더드 곡을 부르는 것이 주는 즐거움은, 발견하고 여러 번 되풀이 해서 부르며 그 멜로디와 화성, 가사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는 것이 가장 앞선다. 그리고는 곧 그 원곡에서 떠나 연주하는 내 자신과 한 편이 되어, 내 목소리로 육화된 삶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둘째다. 이렇게 알아낸 즐거움과 내 헐벗은 모습을 사람들에게 내 보이면서, 끝이 예정된 인생의 시간에 잠시나마 같이 머무르는 기쁨이 그 셋째가 될 것 같다. 둘째와 셋째는 여러 장르의 다른 노래나, 창작곡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의 기준이 된다.
MMJazz에서 이번 내한공연에 즈음해 커트 엘링의 노래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사흘 내내 그의 음악을 다시 찾아 들었다. 모든 발표곡을 꼼꼼히 듣지는 않았으니, 그의 음반에 대해 평하는 것은 평론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다만, 같은 직종에 있다 보니 남들과 다르게 들리는 부분이 있다. 그의 노래는 시종일관 자신감이 넘친다. 바리톤의 목소리가 갖는 중후한 질감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맥을 이으며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남성적인 매력을 풍긴다. 업템포의 현란한 스캣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웨인 쇼터를 망라하는 현대적인 재즈 곡들을 장쾌하게 해석하며, 때로는 시와 소설의 주제를 가로지르고, 여러 나라 출신의 뮤지션들과 폭넓은 교류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다채로운 장르의 결과물들은 힘 있고 알차면서도 유연한 소리, 흔들림 없이 정확한 음정과 리듬에 대한 해석으로 ‘이것이 커트 엘링이다’ 라는 표식이 된다. 한 번 뻗어 나온 소리는 직선으로 쭉 뻗어 거칠 것 없이 먼 바다까지 이르는 *붕새를 연상시킨다. *한 번에 구만리를 날며 길이가 수천리에 이르는 중국 전설 속의 동물
그렇게 며칠 동안 그의 목소리를 듣다가, 토니 베넷의 노래를 잠시 찾아 들었는데(타계하신 소식을 듣고나서 였다) 긴장했던 귀가 갑자기 편안해졌다. 마치 회사에서 유능한 상사의 활약상에 고개만 회회 젓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 엄마가 끓여 놓은 된장찌개를 먹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자문했다. 데뷔 음반을 블루노트에서 내고 그 이후로 쭉 남성 재즈 보컬로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그의 음악을 왜 자주 찾아듣지 않게 되는 걸까. 그래, 어쩌면 음반으로만 접하는 그의 모습은 라이브와 완전히 다를지도 몰라. 마침 내한 공연이 잡혀 있길래 주저 없이 예매했다.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좌석이 깔려 있지 않은 조그만 홀. 곧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와 섰고 나는 내 선택과 무관하게 두 시간 가까이 ‘업’ 된 채로 서서 공연을 봤다. 빠르거나 느린 펑키 리듬 속에서 관객들이 한마음으로 흥분할 것을 예상한 공연 형태일지도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무리였다. 여유 없는 일정 속에 내한 공연을 치러야 했던 뮤지션들은 관객의 열기와 호응 속에 힘을 더욱 얻었겠지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순간을 기대했던 나는 어느새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폭격처럼 쏟아지는 목소리는 블루스의 3연음마저 정확한 분절음으로 표현했고, 초저음과 초고음의 음역을 일정한 데시벨을 유지하면서 매끄럽게 이어갔다. 역시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서 있기가 힘들고 공연자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아 리듬에 맞춰 몸도 흔들고 박수도 쳤지만, 자주 팔짱을 낀 자세로 되돌아 왔다. 그러면서 내가 가졌던 의문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구나. 어쩌면 나는 그 흔들림 없음과 음악적 정확성으로 가득한 자신감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밀리거나 뒤쳐져 본 적이 없는 사람, 소중한 것을 잃거나 기회를 놓쳐 고꾸라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끊임없는 자신감, 그런 것들을 나도 모르게 느꼈던 것이다.
과연 그가 그런 삶을 살았는지 어땠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최근에도 지적인 탐구의 끈을 놓지 않고, 새로운 곳으로 계속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가고 있음을 알 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통찰할 힘을 가진 나이가 된 그는 이제 메신저가 되기로 한 듯 말도 좀 더 많아졌다. 음반 속의 직접 쓴 가사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나아가 더 큰 세계를 향한 메시지가 종종 들어 있었다. 이번 공연에서도 곡이 최고조에 이르자 숨조차 쉬지 않는 듯한 가사를 마구 쏟아냈다. 아.. 저 가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커트 엘링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관객을 두고 드러머를 향해서 클라이맥스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앨범을 숙지하지 않은 내가 좋은 관객이 아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후반부가 되면서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여러 음역대에서 내기도 하고, 클락 테리처럼 멈블링하며 콩트를 들려주기도 했는데, 이런 비언어적인 부분이 오히려 애틋했다.
일반적으로, 많은 악기가 동원되고 진행이나 편곡이 복잡한 곡은 공연자의 음악적 자유를 제한하기도 하지만, 단순한 형식에 얹히는 블루스라면 그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관객으로서는 소통을 제지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준비되지 않는 관객으로 동참한 나에게도 잘못이 있을 수 있겠으나, 해외 아티스트의 내한 공연은 그 언어라는 벽을 넘어서 전달받을 수 있는 영성이 없다면, 글쎄… 몸이라도 흔들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더 큰 세계를 바라보고, 더 많은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할 것만 같다. 그 흐름에 동참하려면 어떻게 노래해야 할까. 메시지를 너무 우위에 두면, ‘내’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말하고 있는 나를 끊임없이 흔드는 것은 할머니의 옛 이야기 속에서 되풀이되어 온 인간의 감정이고, 그 감정들은 호시탐탐 밖으로 빠져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다. 내게 있어 그 탈출구는 재즈의 즉흥이다. 즉흥의 자유를 얻은 노래는 그 감정들 만큼이나 유연하고 연약하며 종종 불안하다.
커트 엘링은 이제 ‘왜 노래 하는가’ 를 넘어서 ‘무엇에 대해 노래해야 하나’라는 새로운 질문에 답하려 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여정 속에서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블루스의 불안정함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때론 칼같은 음정과 박자의 정확성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과제를 열심히 조사해 온 복학생처럼 진중하고 견고하기에, 절멸을 피할 수 없는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내면의 떨림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작고 힘없는 것들을 곁에 두고 보듬어 주기보다 거시세계를 맞닥뜨려 설명하고 추상화시키는 쪽에 가깝다.
나는 언젠가는 발라드를 잘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대 위에서 보이는 것이 내 일상과 둘이 아니고, 내가 하는 노래가 내 삶에 다름 아니길 원한다. 내가 그냥 나 자신일 수 있는 그 곳에 서서 발라드의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찢어지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더 느려지고 느려져서 세상을 더 천천히 보고 배워가고 싶다. 커트 엘링이 부르는 발라드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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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전 인터뷰 이후 필자와 함께 한 커트 엘링. 이전에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그는 정말 젠틀한 매너의 소유자였다..JPG (File Size: 1.12MB/Download: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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