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렌 그리모(Helene Grimaud) 의 특별 수업] - 엘렌 그리모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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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그리모(Helene Grimaud) 의 특별 수업
엘렌 그리모 저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김남주 번역 | 2007년 12월 14일 | 264P
제목이 표시내지 않더라도『엘렌 그리모의 특별수업』(현실문화,2007)은 특별한 책임에 틀림없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엘렌 그리모는 강하고 웅장한 타건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멸종 위기에 있는 늑대들의 보존을 위해 뉴욕 사우스살렘에 늑대보호센터를 공동 설립한 생태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글쓰기에도 깊은 관심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현대의 파트롱(후원자)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 소비자(구매자)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와 무관해 보이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예술가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 이미지가 공적인 것이 된 이후 나는 줄곧 그것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늑대들과의 관계, 피아노, 여자라는 것, 글쓰기를 두고 많은 이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중 한가지만을 선택해야 하는데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 지상에서의 내 길에 그 어떤 교차로나 분기점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늑대와의 만남 이후 쇼팽의 작품 속에서 달의 얼굴을, 내 연주를 듣는 청중들에게 부드러운 달빛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준 그런 경이로운 공존 같은 것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여자로 태어난 만큼 결혼을 한다면 음악을, 피아니스트로 활동한다면 글쓰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듯이.”
엘렌 그리모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이 책은 여행기이자, 예술가의 원형을 탐구하는 ‘예술가 소설’이기도 하다. 여행기와 ‘예술가 소설’은 무엇인가를 탐색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에 두 형식이 통합되어 단일한 효과를 낳기가 쉽다. 대개의 여행기나 ‘예술가 소설’은 깨달음으로 마무리되곤 하는데,『엘렌 그리모의 특별수업』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은 “나는 심한 허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인 엘렌은 아침에 일어나자 마음속으로 공허를 느꼈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구가 밀려왔다. 그녀는 지난 몇 년 동안 작품을 해석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청중을 만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나쁜 일인가? “사람들이 결혼으로 행복해하듯 나도 음악 안에서 행복하지 않았던가?” 음악이 내 삶의 전체를 독차지하면서 나 자신도 음악도 피로와 나태 속에 허우적거리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고갈’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 속에서 나는 몇 주 전부터 나를 짓눌러 온 온갖 징후들을 발견했다. 나는 판에 박힌 일상이 나 자신을 고갈시키도록 방기해 온 셈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잠에서 깨운 이 허기는 바로 내 본질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른 것이었다.” 마침 주인공 앞에는 3주간의 휴가가 있었다. “떠나리라. 걸으리라. 숨 쉬리라.”
뉴욕을 떠나 로마에서 일박을 한 엘렌은 로마에서 아시시로 자동차를 운전해 가는 도중에, 자동차가 고장 나서 약속을 놓치게 되었다는 한 60대 남자를 태워주게 된다. 은퇴한 문학 교사인 이 동승객은 엘렌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피에르 바르비제 선생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엘렌은 이 작품을 쓰면서 이제는 세상에 없는 바르비제를 다시 등장시켜, 자신의 고민을 상상의 대화에 맡겼던 것이다(“스승과 닮은 사람이 아니라 내 삶의 퍼즐을 다시 맞추는 것을 도와주러 온 내 스승의 화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60대 동승객은 엘렌에게 “예술은 개인적인 허영이나 목표로 이용되어서는 안”되며, 예술가는 “자유로워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음악을 해석하는 열쇠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음악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아시시 시내에서 60대 동승객과 헤어진 엘렌은 빈 방을 구할 수 없어서 수녀원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60대 동승객은 이튿날 아침 그녀가 짐을 푼 수녀원을 겨우 찾아내 수녀에게 엘렌에게 주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그 편지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연주자는 음악과 청중 사이의 전달자(영매)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당신의 삶이 음악의 연장선상에 놓여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60대 동승객은 편지와 함께, 야코프 프로베르거의 음악이 사용된 된 오래된 ‘뮤직 박스’ 하나를 엘렌에게 맡기며, 함부르크에 가는 길이 있으면 한스 엥겔브히트라는 사람에게 전해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남겼다. 여로형(旅路型) 소설이나 모험소설은 서사의 근저에 ‘보물찾기’ 구조를 깔아놓고는 하는데, 예술가 내면의 모험을 이끌어가고 있는 엘렌 그리모는 보물찾기 구조룰 뒤집은 ‘우편배달부’ 구조를 채택했다. 보물찾기와 우편배달부 구조는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우편배달부 구조 역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수신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니 보물찾기 구조이기는 마차가지다.
엘렌은 함부르크에 도달하기 전에 예술은 물론이고 세계와 삶을 부정하는 두 명의 비관 주의자를 차례대로 만난다. 이탈리아의 코모에서 만난 한 젊은이는 사랑을 믿지 못하고(“사랑이라뇨? 대문자로 시작되는 특별한 사랑은 제가 생각하기에 이 시대의 퇴물입니다.”, “제겐 아스피린도 있고 향정신성 약도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골칫거리를 찾아나서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스위스의 작은 도시에서 만난 노인은 문명에 절망한 나머지 세상의 종말을 바란다(“인간은 매일같이 낙원에서 스스로를 쫓아냅니다. 인간의 타락은 영구적이고 일상적입니다. 인간은 타락에 동의했고 타락을 요구한 셈입니다.”, “선이라고요! 악이 선보다 열등하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승리하는 건 언제나 악입니다.”)
한스 엥겔브히트는 누구이며, 그와 엘렌의 대화 내용은 직접 책을 읽을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대신 늑대에 매료된 엘렌 그리모의 육성을 옮겨둔다. “늑대들과 함께 있으면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들의 풍성한 털 속에 두 손을 깊게 찔러 넣고 그들로 하여금 내 귀를 가볍게 깨물게 하고 그들과 함께 달리면 내 안에서 자유롭고 잘 웃는 여자, 야성적이고 창의적인 여자, 평소의 나를 압도하는 여자, 발가벗고 눈 속을 구르고 깊은 호수 속에 몸을 던지며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빽빽한 밀림 속을 누비는 여자가 깨어난다.” 독소에서 많은 해답을 찾는다는 엘렌은 클라리사 P. 에스테스의『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고려원,1994)을 읽은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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