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포르탈(Michel Portal)추모칼럼 - 음악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혹은 야수파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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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재즈와 클래식, 월드뮤직까지 넘나들었던 클라리넷 명인
미셸 포르탈 (Michel Portal) 1935.11 ~2026.2
음악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혹은 야수파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20세기 초, 그러니까 재즈가 탄생할 무렵에 엔리코 카루소의 음반이 최고의 베스트 셀러였다는 사실은 그 시기에도 클래식 음악이 여전히 누리고 있던 위세를 이야기해 준다. 그 무렵에 어떤 연주자가 근대 유럽에서 탄생한 악기를 가지고 음악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린 시절 클래식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점은 당시의 신생 음악 재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00년대 전반기 재즈 연주자들 가운데서 클래식 음악을 기초로 음악을 연마한 인물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가운데는 자신의 작품에 그 흔적을 남긴 인물들도 있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피아노 비르투오소 아트 테이텀은 1930년대부터 클래식 소품들을 현란한 즉흥연주로 녹음에 남겼다. 심지어 그의 선배 격에 해당하는 스트라이드 피아노의 대가 제임스 P. 존슨은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혹은 오케스트라만을 위한 음악회용 작품들을 여러 곡 남겼다. 하지만 이 점은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 있지 않다.
그럼에도 재즈 연주자가 클래식 작품을 편곡 없이 정격으로 녹음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재즈 연주자로서 무척 부담스러운 이 작업은 1938년 베니 굿맨이 부다페스트 현악 사중주단과 녹음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 A장조를 통해 그 문턱을 넘어섰다. 이후에도 굿맨은 그에게 초연을 위촉한 버르토크, 코플랜드, 모턴 굴드의 작품들을 녹음했고 그 유명한 모차르트 협주곡까지 녹음을 남겼다.
하지만 아무리 재즈 연주자들이 어린 시절 클래식 음악을 통해 악기를 익혔다고 한들 클래식 작품을 녹음하던 베니 굿맨의 전통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클래식 음악을 주 무대로 삼고 있던 앙드레 프레빈, 프리드리히 굴다와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재즈를 통해 음악적 자유를 누리는 경우를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칙 코리아, 휴버트 로스, 아르투로 산도발, 브랜퍼드 마살리스, 엘리안 엘리아스 등 일급의 재즈 연주자들이 클래식 작품 녹음에 도전하는 것은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연주자의 극히 예외적인 시도였고 제한적인 레퍼토리에 한해서였다. 그런 면에서 베니 굿맨의 전통을 이을 정도로 이 부문에 노력을 기울인 재즈 연주자는 키스 재럿과 윈턴 마살리스 두 사람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두 연주자가 녹음으로 남긴 클래식 작품들은 이 지면에 일일이 적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은, 실은 한 대가의 이름을 누락한 것이다. 미셸 포르탈. 고백하자면 나는 한동안 그를 클래식 연주자로만 알고 있을 정도였다.

클래식 연주자로만 알았던 그의 이름
1993년에 내가 처음 만난 포르탈의 녹음은 피아니스트 조르주 플뤼더마허와 녹음한 브람스의 클라리넷 소나타(프랑스 아르모니아문디)였다. 우연히 읽은 한 외국 잡지의 평대로 그의 클라리넷 소리는 풍부한 ‘목질’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리코더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던 그의 소리는, 솔직히 말하면 내게 조금 이질감을 느끼게 한 브람스 연주였다.
아무튼 이후에도 그의 음반들은 시내 레코드숍에서 종종 눈에 띄었다. 모차르트 협주곡, 오중주, 슈만의 <환상 소곡집>, 브람스의 오중주, 트리오 등. 그래서 미셸 포르탈은 당연히 내게 클라리넷의 주요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클래식 연주자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을 만났다. 몇 년 후 한 음반사 담당자가 건넨 홍보용 CD로 미셸 포르탈의 [Mineapolis]을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아니, 이 미셸 포르탈이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던 그 미셸 포르탈이란 말인가?(그때까지 난 그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Mineapolis]는 ‘두 얼굴’의 미셸 포르탈의 모습을 더욱 이질적으로 느끼게 한 앨범이었다.
앨범 가운데서 제일 먼저 들었던 찰스 밍거스의 <Goodbye Pork Pie Hat>에서 힙합 리듬을 만들어 낸 소니 톰프슨(베이스)과 마이클 블랜드(드럼)는 팝 스타 프린스의 밴드 ‘뉴파워 제너레이션’의 멤버였고 딜레이 이펙트의 기타 연주는 록밴드 ‘리빙 컬러’의 버넌 리드였으니까 말이다. 미셸 포르탈은 그들의 사운드 위에서 마치 에릭 돌피처럼 짙고 어두운 베이스 클라리넷 솔로를 쏟아냈다. 그 느낌은 비교적 규범적인 영역의 재즈와 클래식 사이를 오갔던 키스 재럿과 윈턴 마살리스가 준 충격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후 그의 음반을 향한 나의 여정은 한발, 한발 꾸준히 이어졌다.
![3 다채로운 음악적 면모가 담긴 작품 [Mineapolis] 2001년 발매작.jpg](http://www.mmjazz.net/./files/attach/images/7293/499/042/14c19752f3b8805e4aac8f5b6cb9ee39.jpg)
다채로운 음악적 면모가 담긴 문제작 [Mineapolis] 2001년 발매작
그런데 그러한 경험은 어느덧 25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 사이의 시간은 우리에게 한 장의 부고장을 전하기에 그리 어색하지 않은 세월이 된 것이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2월 12일 미셸 포르탈은 90세의 일기로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공영 라디오 방송국 <프랑스 뮈지크>는 포르탈을 “경계를 넘어선 음악가”로 칭하면서 2월 16일 그에 관한 다섯 편의 프로그램을 특별 방송했다.
“나는 즉흥연주자다. 그러므로 나는 한곳에 정착할 수 없다.”

1935년 미셸이 태어난 장소는 음악의 전방위로 활동했던 그의 이력을 많은 부분 설명해 준다. 그의 고향인 남프랑스의 바욘은 스페인과 인접한 소위 바스크 지역 중 프랑스 영토에 속한 소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 문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고향 시부르는 포르탈의 바욘으로부터 스페인 국경 방향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두 사람의 고향은 자동차로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모두 프랑스적이기보다는 무국적의 빛깔을 갖고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성을 지닌다. 미셸은 바욘을 방문한 한 아르헨티나 연주자로부터 반도네온을 배웠고 그것이 클라리넷보다 먼저 익힌 그의 첫 악기였다는 점은 하나의 전설처럼 들린다(그는 유명 연주자가 된 이후에도 늘 반도네온을 연주했다).
미셸의 집안은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바욘시 브라스 밴드의 지휘자였다. 그럼에도 미셸의 아버지는 음악이란 직업이 될 수 없다며 아들이 음악을 전공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클라리넷 연주에 이미 심취했던 미셸은 파리 음악원으로 진학했고 부전공으로 지휘를 선택했다(그는 음악이 직업이 될 수 있는지를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부모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클라리넷 전공자 중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고 이어서 제네바 콩쿠르(1963년)와 부다페스트 콩쿠르(1965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필자가 제일 처음 들었던 미셸의 브람스 소나타는 그의 나이 32세(1967년)에 녹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그는 이미 정통적인 클래식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미셸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즉흥연주를 중심으로 새로운 음악을 이끌고 있던 작곡가 루치아노 베리오,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과 교류를 갖고 있었고 이때 그의 가까운 동료는 트롬본 연주자 빈코 글로보카르였다. 미셸은 베리오가 조직한 ‘뮈지크 비방테(살아있는 음악)’의 회원이었으며 이어서 글로보카르가 조직한 ‘뉴 포닉 아트’에 참여하면서 슈토크하우젠의 즉흥연주 작품(보통 ‘직관적 음악’이라고 표현하는) <일곱 개의 날로부터>(1968)에 참여했다. 1971년 포르탈은 피에르 불레즈의 작품 <도메인>(1968) 녹음에서 클라리넷 독주자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현대음악의 즉흥연주에 눈을 돌린 미셸이 재즈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이미 프랑스 모던재즈의 선구자인 베이시스트 피에르 미셸로의 앨범 [Round About a Bass](1963)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수아 투스크, 앙드레 오데르의 녹음에 참가했으며 1969년 그의 첫 재즈 앨범 [Our Memories & Our Feelings]을 녹음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그의 재즈 앨범은 약 30장에 이른다.
아울러 그는 1970년대부터 영화음악을 맡기 시작했는데 그가 작곡한 50여 편의 영화음악을 통해 그는 ’80년대에 세 번에 걸쳐 세자르상을 수상했다. 다방면에 걸친 그의 음악 활동에 대해 그는 스스로 이야기했다. “나는 즉흥연주자다. 그러므로 나는 한곳에 정착할 수 없다.”

다수의 협연앨범을 아코디언 주자 리샤르 갈리아노와 함께한 미셸 포르탈. 1995년도
음악의 색채
그는 만년의 한 인터뷰에서 “나는 평생 동안 음악에 색채를 불어 넣고자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그가 다양한 목관악기들을 두루 연주했던 것은 바로 그 목표를 향한 것이었다. 그의 ’79년 작 [날 혼자 놔둬 Dejarme Solo](드레퓌스)는 클라리넷, 베이스 클라리넷, 더블베이스 클라리넷, 소프라니노, 소프라노, 알토, 테너 색소폰을 모두 연주한 음반으로 이 악기들의 오버더빙을 통해 싱글리드 악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색감을 펼쳐 보인 앨범이었다.
그의 재즈는 실험적이며 독특했지만 한편으로 재즈의 주류와 교감하는 것에도 그는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데이브 리브먼, 잭 디조넷, 미노 시넬루 등과 함께 한 1987년 작 [Men’s Land]와 스티브 스왈로우, 조이 배런 등과 연주한 ’97년 작 [Dockings](이상 라벨 블루)는 대표적인 수작이다. 2016년 독일 귀터슬로 극장에서 녹음한 실황 앨범(인튜이션)에서 그는 피아니스트 리치 베이락과 공동으로 작곡한 아름다운 3악장의 작품 <소묘 Esquisse>를 남겼으며 최근에 발매된 베이시스트 미로슬라브 비토우쉬의 앨범 [Mountain Call](ECM)에서도 비투스와 인상적인 이중주를 녹음했다. 2020년 그가 85세의 나이에 보얀 지 등 오랫동안 함께 해온 유럽 연주자들과 녹음한 [MP85](라벨 블루)는 그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충만한 마지막 녹음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할 때 악보를 배신 할 것 같은 압박감, 공포감이 자연스럽게 즉흥연주와 재즈로 자신을 인도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즉흥연주를 통해 음악적 해방감을 맛보았다는 것이다(키스 재럿 역시 비슷한 심정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즉흥연주란 편안했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연주자들과 만나면 나는 늘 궁금합니다. 그들과의 연주에서 난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을까? 하지만 연주가 끝나면 늘 고민했죠. 왜 난 더 훌륭한 즉흥연주를 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평생 사라지지 않는 만성 두통 같은 것이었어요.”
자신을 ‘지킬박사와 하이드’라고 표현했던 그의 음악적 고뇌에 대해 그래도 세상은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 바욘시 중심가에 있는 공연장은 ‘미셸 포르탈 극장’으로 명명되어 있으며 라디오 프랑스 뮈지크는 포르탈의 생일인 11월 27일을 ‘미셸 포르탈의 날’로 지정했으니까.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미셸 포트탈. 2007년도 프랑스에서의 라이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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