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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해리스(Barry Harris) 추모 칼럼 - 비밥(Bebop)의 가치 일깨운 대가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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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배리 해리스(Barry Harris)    1929.12 ~2021.12

비밥(Bebop)의 가치 일깨운 대가의 발자취

 

 

코로나가 햇수로 3년째 전 지구를 덮치고 있다. 이 전대미문의 전염병 속에서 재즈는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예술 장르다. 이 음악의 생태계를 조성해온 클럽이라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협소한 규모, 음식과 술을 취급하는 장소란 점에서 그 어느 공연장보다 심한 규제를 받아야 했다. 더욱이 가끔씩 코로나에 의한 재즈 음악인들의 타계 소식은 재즈 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마누 디방고 (2020324, 86), 왈러스 로니 (331, 59), 버키 피자렐리(41, 94), 엘리스 마설리스(41, 85) 리 코니츠(415, 92). 여기에 작년 말, 한 사람의 이름이 더해졌다. 배리 해리스. 2021128, 그의 나이 9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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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밥의 계몽가

배리 해리스의 부음 기사에는 모두 비밥이 언급되었다. “비밥에 헌신한 학자”(<뉴욕타임스>), “헌신적인 비밥 피아니스트”(<내셔널 퍼블릭 라디오>), “비밥의 계몽가” (<재즈 FM91>). 21세기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삶을 비밥이란 단어로 요약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지만 확실히 배리 해리스 인생의 열쇠 말은 비밥이며 이 단어로 누군가를 수식한다는 것은 이제 배리 해리스가 마지막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비밥의 창시자들로부터 횃불을 이어받은 마지막 사람이었다. 1972년 텔로니어스 멍크가 모든 활동을 접고 칩거에 들어갔을 때 그의 충실한 후원자 패노니카 드 쾨니그스워터가 멍크를 위해 뉴저지주 위호켄에 마련해 준 집에서 배리 해리스는 멍크와 함께 살면서 그를 보살폈다. 그리고 멍크, 패노니카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배리 해리스는 생애 마지막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해리스는 멍크의 작품을 평생 자신의 레퍼토리로 삼았지만 그뿐 만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배리 해리스는 버드 파월의 계승자였으며(그의 경쾌하고 날렵했던 핑거링을 보라) 그의 영혼을 지배했던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의 음악이 색소폰, 트럼펫 주자만의 것이 아니라 피아니스트의 레퍼토리로 정착하는데 있어 배리 해리스의 노력은 결정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한 대목을 꼽자면, 찰리 파커의 ‘47년 작 ‘Chasing the Bird’, 원래 이 곡은 버드의 색소폰과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이 대위법적 선율로 이어졌던 곡이었다. 배리 해리스는 ‘62년 녹음에서 이 부분을 양손을 이용한 2성 푸가로 연주해 원곡의 악상을 건반 위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배리 해리스의 앨범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1975년 앨범 <Barry Harris Plays Tadd Dameron> (Xanadu/1975년 녹음, 발매작) 은 제목 그대로 당시로서는 거의 잊힌 비밥의 개척자 태드 데머런의 작품집이다. 해리스가 피아노 트리오로 정갈하게 연주한 데머런의 작품들은 훗날 그의 작품을 전문으로 연주했던 밴드 데머러니아와 컨티누엄의 등장보다 무려 10년 앞선 것이었다.

 

 

3-1배리 해리스가 연주한 태드 대머론의 작품집. 1975년 녹음, 발매작.jpg

배리 해리스가 연주한 태드 대머론의 작품집. 1975년 녹음, 발매작

 

 

디트로이트 악파

1970년대에 태드 데머런의 비밥을 연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비밥에 대한 깊은 천착은 해리스가 세상에 나서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1950~’60년대 수많은 하드 바퍼들을 배출했던 디트로이트 출신이었다. 19291215일 대표적인 자동차 공업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토미 플래네건, 페퍼 애덤스, 케니 버럴, 도널드 버드, 폴 체임버스 모두를 고향 후배로 두고 있었다. 특히 같은 피아니스트였던 토미 플래네건과는 매우 가까웠는데 그들의 선배였던 행크 존스(1918년생인 그는 미시시피주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디트로이트가 있는 미시건주에서 성장했다)에서 시작된 정갈한 비밥 터치는 해리스, 플래네건으로 선명하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그는 후배들보다도 몇 년 늦게 등장했다. 1956년 플래네건이 뉴욕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도 해리스는 여전히 디트로이트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1950년대 그의 녹음은 도널드 버드, 폴 체임버스, 새드 존스, 프랭크 로솔리노(이들은 모두 디트로이트 출신이다), 소니 스팃, 아트 파머, 행크 모블리의 사이드 맨으로 남긴 것이 거의 전부였다. 1958년에 녹음한 그의 데뷔 앨범 <Breakin’ It Up> (Argo/1958년 녹음, 59년 발매)만이 ‘50년대에 녹음한 그의 유일한 리더 앨범이었다.

그가 재즈 비즈니스의 중심지인 뉴욕으로 무대를 옮긴 것은 다른 동료들보다 몇 해 늦은 1960, 31세 때였다. 캐넌볼 애덜리는 보비 티먼스의 후임 피아니스트로 배리 해리스를 지목했고, 그의 설득으로 해리스의 뉴욕 생활은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리 모건 그리고 당시 마지막 음악활동에 들어섰던 콜먼 호킨스, 역시 디트로이트 출신의 선배인 유제프 라티프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리버사이드, 프레스티지 레코드에서 자신의 리더 앨범을 녹음했는데 사이드맨으로서 그는 스윙, 하드 밥, 포스트 밥 등 다양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의 리더 앨범들만큼은 정통 비밥을 지속적으로 고수했다. 특히 <Luminescence!> (Prestige/1967년 녹음,발매작)<Bull’s Eye!> (Presige/1968년 녹음, 발매작)는 기존의 트리오에서 벗어나 3관 편성 6중주로 녹음했는데 이는 비밥의 고전시대에도 흔히 들을 수 없었던 배리 해리스의 참신한 도전이었다.

1970년대는 비밥이 역사 박물관에 갇힌 것처럼 보였던 시대였다. 하지만 시대를 역행했던 몇몇 비바퍼들은 이 시대에 오히려 자신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빛나는 역작들을 녹음했다. 그중 대표적이었던 소니 스팃, 덱스터 고든 그리고 당시 비밥의 계승자이자 해리스의 제자였던 찰스 맥퍼슨의 음반에는 늘 배리 해리스의 화려한 피아노가 함께했다.

 

4 '80년대 초 재즈 컬쳐 씨어터의 내부전경. 가운데가 배리 해리스이다..jpg

1980년대 초 재즈 컬쳐 씨어터의 내부전경. 가운데가 배리 해리스. 

 

재즈 시민학교의 스승

비밥에 대한 그의 유별난 매료는 결국 계몽주의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1974년 그는 뉴욕에서 주말 재즈 워크숍을 열었는데 매우 싼 참가비로 참여할 수 있는 이 워크숍은 직업 연주자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개방되었다. 재즈를 듣고 싶은 사람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던 이 워크숍에서 해리스는 시민들에게 재즈, 특히 비밥 멜로디를 쉬운 것부터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지도했으며 리듬에 맞춰 춤을 추도록 이끌었다.

 

이 재즈 워크숍의 뜻하지 않은 반응은 다음 단계로 이어졌다. 그는 1982년 맨해튼 첼시에 재즈 컬처 시어터를 개관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매일 열리는 재즈 교실을 운영한 것이다(공간 내부에는 재즈는 뉴욕에서 건재하다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교실은 역시 패노니카의 경제적 후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패노니카의 도움으로 빌 하드먼, 주니어 쿡, 토미 터렌틴, 클리퍼드 조던, 찰스 맥퍼슨, 루 도널드슨, 크리스 앤더슨, 월터 데이비스 주니어, 잭 윌슨 등 일급의 재즈 음악인들이 강사로 출연했다.

 

재정적 안정을 위해 재즈 컬처 시어터에서 약간의 술을 팔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배리 해리스는 이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는 어린 학생들에게 재즈를 가르쳐 주고 싶었고, 알코올을 취급하면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장소는 계속 오르는 임대료 때문에 5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지만 해리스는 이전에 시도했던 주말 워크숍을 다시 시작했고 동시에 연주자로서의 그의 활동도 계속 이어갔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그의 녹음은 왕성했으며, 재너두 레코드에서 녹음한 그의 앨범들은(1975~’76년의 일본 실황 앨범을 포함해) 절정의 기량을 들려주었다. 이런 공로로 그는 ‘89년 국립 예술기금 재즈 마스터로 일찍이 선정되었다.

그는 90년대 후반까지도 앨범을 발표했는데, 하지만 그 음반을 들은 재즈 팬들 가운데는 다소 실망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93년에 겪은 중풍으로 그의 기량이 급속히 퇴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재즈교육에 더욱 열정을 쏟았다. 1999년에 제작된 배리 해리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Spirit Of Bebop](에드거 하워드 감독)은 그의 교실을 거쳐 간 학생이 이미 5천 명이 넘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비밥의 즐거움과 더불어 배리 해리스의 깊은 인품을 경험했다. 그의 재즈교실에는 뉴욕 시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참가했고 그 결과로 한 스페인 제자는 그의 나라에 재즈 컬처 시어터 빌바오를 열었다.

배리 해리스의 재즈교실은 코로나가 이미 유행했던 2020년까지 계속되었다. 50년 동안 계속된 이 교실에 대해 재즈 평론가 로버트 팔머는 전 세계 유일한 ‘1인 재즈학교라고 불렀다. 비밥의 전도사로, 재즈의 스승으로 산 그였기에 현재도 유튜브에는 그의 강의 화면이 수없이 올라와 있다. 지난 1217일 뉴욕 아비시니아 침례교회에서 있었던 그의 장례식에서 제자들이 불렀던 합창은 배리 해리스의 장례식이었기에 볼 수 있었던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5 그는 2020년도까지 매주 재즈워크샵을 개최하며 후배들에게 재즈를 가르쳤다. 사진은 2020년도 당시 배리 해리스의 모습.jpg

그는 2020년도까지 매주 재즈워크샵을 개최하며 후배들에게 재즈를 가르쳤다. 사진은 2020년도 당시 배리 해리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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