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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y Come, Easy Go’ 라는 서양의 격언이 말해주듯, 뭐든지 쉽게 얻어지는 것들은 그만큼 빨리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나 손에 닿을 것 같지 않던 ‘재즈’라는 음악이 조금씩 귀에 들리고 리듬을 타게 되는 순간, 즐거움과 희열은 여느 팝 음악들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감동을 전해줄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Johnk

#21 Tribute - 불세출의 거장에 바치는 추도사 - 칙 코리아(Chick Corea)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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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k Corea.jpg

 

Armando Anthony ‘Chick’ Corea(1941.6~2021.2)

영원으로 떠나버린 불세출의 거장에 바치는 추도사

 

평생 최고의 경지유지해낸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지난 한해부터 올해 초까지 우리 곁을 떠난 재즈 뮤지션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20명이 훌쩍 넘습니다. (한 해에 이렇게 많은 뮤지션이 운명을 달리한 경우는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에는 없었습니다. 그 분들 중엔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사인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죠) 그 중에는 리 코니츠와 매코이 타이너, 게리 피콕처럼 최상의 지명도와 명성을 지닌 초거물급 아티스트도 있었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연주자도 있습니다만, 그 어느 누구도 칙 코리아만큼 장르의 범주를 넘어 큰 영향을 미친 슈퍼스타 연주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타계소식은 근 몇 년간 재즈 팬들에게 전해진 가장 놀랍고 충격적인 뉴스가 아니었나 싶어요.

가공할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편곡가이며 다채로운 편성의 밴드를 평생에 걸쳐 두루 이끌었던 밴드 리더 칙 코리아가 79세의 일기를 끝으로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타계소식이 전해졌던 그 시점까지도 별다른 건강상의 문제점이 기사로 보도된 바 없었기에 아마도 가까운 주변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다들 무척이나 놀랐고 또 믿어지지 않았을거라 생각됩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지 근 보름이 넘은 시점에도 적지 않은 공허함과 상실감이 가슴에 남아 괜스레 그의 작품들을 뒤적거리고 찾아 듣게 만듭니다.

10대 후반부터 정말이지 깊이 심취해 그의 음악을 열렬히 찾아듣곤 했던 기억이 있어서일까요? 혹은 동시대를 함께 호흡해왔고 내한공연도 여러 차례 직접 보며 감동을 받은 탓일 수도 있겠죠. 어린 시절 ‘Love Castle’ 을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서(‘Spain’보다 이 곡을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국적이면서도 그 청아한 멜로디 테마와 환상적인 보컬 코러스에 매료되어 그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하나씩 사 모으곤 했던 제게 칙 코리아는 여느 재즈 레전드들의 타계소식과는 다가오는 감정의 진폭이 완전히 다릅니다.

 

2 게리 버튼과 다시 투어를 가졌던 2007도 공연당시의 모습.jpg

게리 버튼과 다시 투어를 가졌던 2007도 공연당시의 모습. 당시 이 듀오가 처음으로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었다. 

 

감수성과 집중력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시기 절 사로잡았던 몇 안 되는 재즈 아티스트중 하나였던 그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합니다. 지금까지 내한한 여러 해외 재즈 아티스트들 가운데 무대 위가 아닌 대면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음반에 사인까지 받았던 첫 뮤지션이 바로 칙 코리아였죠. 정확히 21년전인 2000년도 피아노 솔로 공연차 그가 내한했을 때 당시 20대 젊은이였던 전 공연 끝나고 흥분된 나머지 무작정 대기실로 찾아가 노크를 했었습니다. 그때엔 음악관련 일을 하기도 전이어서 관계자 인맥도 전혀 없었는데 타이밍 좋게 들어간 탓인지 중간에 아무도 제지를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매니저의 입장에선 다소 돌발적인 상황이었음에도 제 손에 한 아름 들고 있던 CD와 테이프를 보면서 팬이라는 걸 직감하고 대기실로 들여 보내주었고 칙 코리아 또한 절 반갑게 맞아주셨죠. 제가 갖고 갔던 9장 정도의 CD를 살펴보시더니 음악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가볍게 포옹까지 해주시더군요. 가져간 CD에 모두 사인을 해주진 않으셨고 <My Spanish Heart> 딱 하나에만 해주셨지만 대신 당시 발매되었던 피아노 솔로 연작 앨범 두 장을 직접 선물로 챙겨주셔서 너무나 기뻤더랬지요.

이러한 직접적인 기억은 연주자의 음악과 맞물려 해당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을 더욱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추억의 일부로 작용하게 됨으로써 기억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죠.

또 하나, 게리 버튼과 함께 듀오로 연주했던 명 라이브 앨범 <In Concert, Zurich, October 28>의 그 다이내믹하고 화려한, 테크니컬함의 극치, 연주의 끝판왕과도 같은 두사 람의 솔로와 살벌한 인터플레이에 전율이 느껴지는 경험을 했었던 저는 운 좋게도 2007년 이 듀오의 첫 내한공연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엔 본지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일반 팬이 아닌, 잡지사 기자의 입장에서 두 사람의 연주와 백 스테이지에서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죠. 하지만 역시나 그저 감탄만 하게 될 뿐이었죠. 객관적으로 그들의 음악을 따져듣고 앨범에서와 뭐가 다르게 진행되는 지를 면밀히 체크하려고 했건만 공연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두 괴물 같은 연주자의 플레이에 감탄만 연신 해댔습니다.

너무나도 고난이도의 인터플레이를 그저 숨쉬듯 편안하게 소화해내면서 서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너무나도 낯설고 기이한 경험이었습니다. “아니 저런 연주를 계속 해내는데 저렇게 긴장감 없이 편하게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거야?” 그때의 제 심정이 딱 이랬습니다. 마지막 앙코르에선 칙 코리아도 함께 말렛을 들고서 게리 버튼과 바이브라폰을 장난스럽게 연주하는 걸 보며 아 음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하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저 영역에서 놀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도 그때 비로소 실감했던 거 같아요.

 

2-1 2013년도 마지막으로 앨범을 만들도 투어를 가질때의 모습. 칙 코리아 생전 가장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어내었던 듀오 프로젝트가 바로 게리 피콕과의 작업이었다. 이들은 라이브 앨범포함 총 6장의 협연작을 만들어내었다..jpg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고 여러 뮤지션들의 음악세계를 접하게 되면서 다소 냉소적이고 차가워진 저는 젊은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칙 코리아의 음악도 다소 비판적인 시선으로 따져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죠. 자신이 젊은 시절 구축해 놓은 프로젝트의 음악적 틀과 컨셉을 자기 복제에 가깝게 계속 반복한다는 것, 그리고 지나치게 탁월한 기술과 빈틈없는 아티큘레이션을 갖고 있는 탓에 오히려 감성, 영혼의 깊이가 피아노 연주에 잘 새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선 과거 수차례 그에 대한 리뷰와 칼럼을 쓰면서 간헐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다른 점을 차치해 두고서라도 그의 프로젝트는 몇 가지 굵직한 틀 안에서 계속 반복해 이어지는 면이 분명 있습니다. 멤버가 바뀌고 그로 인해 사운드가 좀 달라졌을 뿐, 리턴 투 포에버와 일렉트릭 밴드간의 음악적 유사성도 그렇고, 게리 버튼과 함께한 피아노-비브라폰 듀오 음악들, 멤버가 계속 바뀌긴 했지만 데뷔 때부터 말년까지 늘 유지해온 피아노 트리오 편성은 마치 드라마의 시즌 별 진행을 보는 것처럼 일정한 기간 지속하고 또 앨범을 발표하고 투어를 돌며 마무리하는 식이었습니다. 전 그 점이 그리 탐탁하게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종의 이벤트를 꾸준히 진행하는 것 같다고 생각해왔고 그 관점은 지금도 일견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 이벤트 같은 형태의 프로젝트를 한차례의 쉼도 없이 계속 꾸준하게 돌리는 걸 보면서 부정적인 시각이 점차 경외감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를 다시금 바라보게 된 것은 바로 2015년 절친 허비 행콕과의 피아노 듀오 공연으로 다시금 내한했을 때였어요. 1978년 함께 투어를 돌며 공연을 했던 두 사람이 37년이 지나서 다시금 함께 무대에 선다는 소식은 재즈 팬의 입장에선 결코 놓칠 수 없는 빅 이슈였죠. 비록 새로운 레퍼토리가 준비되지 않았고 익히 잘 알려진 이들의 유명 레퍼토리로 셋 리스트가 채워졌지만 이 듀오 연주에서 예전 젊은 시절의 날카로움과 생동감, 탄력이 살아있는 쪽은 허비 행콕이 아니라 칙 코리아더군요. 지금에 와서야 하는 얘기입니다만 당시 두 사람의 듀오는 허비 행콕이 케미스트리를 다소 망가뜨린 측면이 간간히 있었습니다. 칙 코리아는 여전히 예전 그때처럼 이야기를 더 풀어가려고 하는데 허비 행콕은 다소 심드렁하고 귀찮게 반응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저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게 이것이니 이것만 보여줘도 돼하는 식의 안일한 태도가 음악 안에 묻어나있었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칙 코리아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허비 행콕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대충 무마시키려는 데에도 그걸 살려 이야기를 끌고가고 또 어색하지 않게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움을 느꼈죠. 그가 이전 자신의 프로젝트를 다시금 시도하더라도 그게 단순한 도돌이표 반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어요. 그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영민함과 음악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있었고 상대가 누구이건 계속 적극적으로 교감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해마다 1~2장씩 끊임없이 새로운 앨범을 낼 수 있었으며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싶어요. 과거 함께 해왔던 절친한 동료들과 다시 만나 연주를 하건, 완전히 새로운 젊은 후배들과 호흡을 맞추건 그는 동일한 열정과 집중력으로 그 프로젝트의 마지막 지점까지 끌고 가려고 했기에 성공적인 결과가 그렇게 많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며, 간혹 결과물이 좋지 않더라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되었습니다.

 

 

4 2015년도 허비 행콕과의 재결합 공연 당시 스위스 몽트뢰 재즈페스티벌에서 퀸시 존스와 함께 한 모습.jpg

2015년도 허비 행콕과의 재결합 공연 당시 스위스 몽트뢰 재즈페스티벌에서 퀸시 존스와 함께 한 모습

 

누군가와 함께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는 과정은 무대만 바라보는 팬의 입장에서는 무척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 생활을 매일 끝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연주자의 입장은 생각보다 무척 힘들고 또 지루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또 무대 위에서 팬들의 환호와 성원에 취해 있다가 현실로 돌아올 때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 술과 약물에 의존하는 경우도 무척 많습니다.

그걸 50년 넘는 세월동안 일상으로 쉼 없이 겪어온 연주자가 단 한 번의 슬럼프도 없이, 술과 약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매번 자신의 기술을 가다듬고 마인드와 감성을 유지, 통제해낸다는 건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닌 것이죠. 정신력, 의지력이 남다르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만큼 음악과 자신이 행하는 이 소통과 교감의 작업에 깊은 만족감을 갖고 있지 않으면, 다시 말해 그 창작의 과정이 그저 기계적인 루틴으로만 이뤄지는 것이라면 결코 버텨낼 수 없는 일입니다. 칙 코리아는 진심으로 음악에 빠져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거기에 걸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더불어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완벽에 가깝게 관리해내었던 극소수 연주자중 한명이었죠. 우리에게 평생 들려주었던 멋지고 아름다운 음악만큼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흐트러짐 없이 대단했었던 그에게 오랜 팬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존경과 경의를 바칩니다.              

To the Infinity, Return to Forever!           

사진/Concord, ECM, Chick Corea Produ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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