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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 베이락(Richie Beirach)추모 칼럼 - 조용하고도 깊게, 재즈 신의 은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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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조용하고도 깊게, 재즈 신의 은둔자 

 

리치 베이락(Richie Beirach)    1947.5~ 2026.1

/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20231214일 독일 서남쪽의 도시 루드비히스하펜에서는 당시 76세의 피아니스트 리치 베이락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함께 무대에 오를 연주자들은 레지나 리트비노바 (피아노), 토비아스 프론회퍼 (드럼), 이 무렵 베이락은 두 대의 피아노와 드럼이 함께하는 독특한 편성의 트리오를 무대에 자주 올렸다. 하지만 이날 연주는 갑자기 열리지 못했다. 공연 직전에 베이락은 심한 통증을 호소했고 그는 근처 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그곳에서 결국 담낭 제거 수술을 받은 베이락은 이후 수술 후유증과 싸우다가 9개월 뒤인 20249월에야 헤스하임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간신히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병세는 또다시 나빠졌다. 그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그 무렵에 사이트 ‘GoFundMe’에는 베이락을 위한 모금 청원이 올라왔다. 그의 투병 사실은 이때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 소식은 황망했다. 2010년대까지 한국의 재즈 팬에게는 오로지 음반만으로 근황을 전한 채, 재즈의 중심 무대와는 일체 교류가 없었던 그가 갑자기 온라인을 통해 전한 소식은 투병과 경제적 곤궁이었다.

1년 뒤인 202511월 베이락은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보름스에 있는 한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약 두 달 뒤인 2026126, 결국 그는 고통스러운 투병을 끝내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79세였다.

 

 

2 자신의 우상인 빌 에번스와 만난 젊은 시절의 리치 베이락. 1978년도.jpg

자신의 우상인 빌 에번스와 만난 젊은 시절의 리치 베이락. 1978년도

 

재즈의 메인스트림에서 등을 돌리다.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베이락의 연주를 ’93년도에 처음 들었다. 1987년 도쿄에서 열린 재즈 페스티벌 라이브 언더 더 스카이중에서 존 콜트레인 헌정 무대였고 지금은 사라진 레이저 디스크로 본 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웨인 쇼터, 데이비드 리브먼, 에디 고메즈, 잭 디조넷으로 짜인 화려한 올스타 퀸텟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리브먼과 베이락을 그 영상을 통해 처음 보았다. 리브먼의 색소폰은 함께했던 웨인의 연주와 비교해도 결코 물러섬이 없었고 베이락의 연주는 날렵하면서도 그 강렬한 타건이 매코이 타이너를 떠올리게 했다. 궁금했다. 이 피아니스트는 누구일까.

그런데 얼마 후 시내 레코드숍에서 그의 CD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도 국내 발매 음반이었고 할인 가격으로 팔리고 있었다. 안 집어 들 리 없었다. 일본 이스트윈드 레코드가 제작한 앨범 [Continuum]이었다. 그런데 이 음반을 통해 들은 그의 연주는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피아노 독주 앨범이었던 이 작품에서 그의 모습은 놀랍게도 빌 에번스와 유사했다. 특히 레너드 번스타인의 곡 <Some Other Time> (주지하다시피 이 곡은 에번스의 주요 레퍼토리다) 에서 그 점은 분명했다. 이후 난 기회가 될 때마다 그의 앨범을 한 장씩 구했고 그 앨범들을 통해 베이락이 빌 에번스 적통의 피아니스트란 점을 확인했다. 특히 1981(이 해는 빌 에번스가 타계한 이듬해였다)에 녹음한 [Elegy For Bill Evans] 는 그 생각을 더욱 굳혀 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재즈계의 중심인물 중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인터넷을 통해 그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독일의 ACT 레코드에서의 녹음을 통해 이따금 그의 근황을 알리고 있었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베이락은 2021년에 그의 피아노 교본을 출간한 트롬보니스트 마이크 레이크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다소 소극적인 활동 이유를 암시하는 자신의 생각을 밝힌 바 있다.

 

2_1빌 에번스 헌정의미를 담아 녹음한 트리오 작품. 1981년도 발매.jpg

 빌 에번스 헌정의미를 담아 녹음한 트리오 작품. 1981년도 발매

 

세상은 젊은 연주자들에게 너를 팔 수 있도록 누군가처럼 소리 내라고 요구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많은 공연 기획사와 음반 회사는 내게 전화해서 말했죠. ‘안녕, 리치. 호러스 실버나 멍크처럼 연주하는 젊은 친구가 필요해. 관심 있어? 돈은 좀 챙겨 줄게.’ 그럼 나는 대답했죠.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광이에요. 그런데요, 제 말을 들어주세요. 저도 제 음악이라는 게 있어요.’ 그러면 그들도 이야기하죠. ‘알아, 알아, 자네에게도 자네의 음악이 있지. 하지만 돈 좀 벌고 싶지 않나?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했어요. ‘몸을 팔라고요? 절대 안 해!’”

 

리브먼과의 협업과 우정

리처드 앨런 베이락은 1947523일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배웠는데 교사 제임스 팔메리와 함께 시작한 이 레슨은 12년 동안, 그러니까 그의 나이 18세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당시 접했던 고전음악들은 그의 음악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열세 살 때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Milestones]에 담긴 <Billy Boy>(이 곡은 관악기가 빠진 피아노 트리오 편성의 곡이다)에서 레드 갈런드의 연주를 우연히 들은 소년 리치는 자신의 찾고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클래식 레슨과 더불어 레니 트리스타노로부터 재즈수업을 듣기 시작한 리치는 아직 10대였던 ’60년대 중반부터 뉴욕 클럽가에서 연주를 시작했다(당시 그는 리 코니츠, 프레디 허버드 등 일급 연주자와도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67년 버클리 음대에 진학했고(이때 학교에서 존 애버크롬비, 키스 재럿, 미로슬라브 비투스 등과 함께 공부했다) 1년 뒤 그는 맨해튼 음대로 전학해 작곡을 공부했다. ’72년 그는 이 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무렵 같은 브루클린 출신의 색소포니스트 데이비드 리브먼을 만나 향후 50년 넘게 지속된 음악적 우정을 시작한 점이었다. 데이브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명석하고 유머 있는 친구라고 리치에 대해 말했다.

 

4 30대 초반 젊은 시절 데이브 리브먼과 리치 베이락의 모습. 1975년 추정.jpg

 

 

1973년 데이브의 앨범 [Lookout Farm](ECM)에 참여했던 리치는 그 앨범에서 함께 연주했던 프랭크 투사 (베이스), 제프 윌리엄스 (드럼)와 함께 그의 첫 앨범 [Eon](ECM)을 이듬해에 녹음했다. 그 무렵 스탠 게츠 쿼텟, 쳇 베이커 밴드에서 연주하기도 했던 리치는 ECM 레코드에서 자신의 앨범 두 장의 더 녹음 한 뒤 1981년 데이브 리브먼과 함께 그룹 더 퀘스트를 결성했다. 리브먼-베이락을 중심으로 약 30년 동안 지속되면서 11장의 앨범을 발표했던 이 밴드는 조지 므라즈, 앨 포스터와 함께 출발했지만 이후 론 매클루어(베이스), 빌리 하트(드럼)로 멤버가 고정되면서 비밥에서부터 프리재즈까지 넓은 즉흥연주의 세계를 종횡무진 했던 최고의 쿼텟이었다.

’80년대 초 리치는 동료 피아니스트 리앤 레저우드와 결혼했지만 그 결혼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동시에 그룹 더 퀘스트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적으로 진행했던 그의 녹음은 피아노 솔로 혹은 이중주가 다수를 이루면서(이중주 역시 데이브와의 듀오가 주축을 이뤘고 여기에 존 애버크롬비, 조지 콜먼과의 특별한 녹음도 있었다) 매우 한정된 연주자들과만 교류하는 그의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이자 영국의 재즈 저널리스트인 찰리 리스는 ’90년대 초반부터 리치 베이락이 심각한 약물중독에 빠졌음을 밝혔다. 인생의 위기에 처한 리치는 2000년 독일 라이프치히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의 멘델스존 음악-연극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학에서 그의 강의는 정년으로 보장되었던 2014(67)까지 계속되었다.

 

2000년대의 그의 연주 활동은 더 퀘스트,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그레고르 휘브너를 제외하면 독일의 젊은 연주자들, 특히 그의 제자들과의 연주가 대부분이었다. 학교를 퇴임한 후 그는 드러머 크리스티안 슈베르, 그의 제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레지나 리트비노바와 함께 독일 헤스하임에 있는 음악인 마을에서 생활했다. 베이락은 이들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연주했으며 이들이 개최한 페스티벌과 잼세션에서 함께 연주했다. 아울러 그의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재즈 숙련의 체계 Framework of Jazz Matery], [재즈 강의와 학습 Teaching and Learning Jazz], [현대 피아노의 계보 The Lineage of Modern Piano]2021년부터 ’24년까지 발간했다. 60장이 넘는 자신의 앨범을 발표했던 그는 반면에 단 한 명의 혈육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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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더 쿼스트 멤버들의 최근 모습.  좌로부터) 론 매클루어, 리치 베이락, 데이브 리브먼, 빌리 하트. 2022년도

 

 

피아노 독주와 밴드 더 퀘스트

리치 베이락은 연주자로서 그다지 화려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연주 실력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숙명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음악은 화려한 무대가 아닌 침잠의 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낭만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의 작품 <Sunday Song>, <Leaving> 그리고 <Elm> 은 미국의 재즈 풍토와는 너무도 이질적인 곡이며 어쩌면 그의 인생이 독일 남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마무리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암시하는 듯하다. 이 곡들은 1970년대 ECM 버전과 ’92년 메이벡 리사이틀홀에서의 연주(콩코드)가 뛰어나다.

하지만 그러한 음악은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밴드 더 퀘스트를 통해 재즈 연주자로서 즉흥연주의 극점에 도달했는데 이점은 그와 동 세대의 어떤 피아니스트들에게서도(특히 빌 에번스 계열의 서정주의 피아니스트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음악적 도전이었다. 그런 점에서 베이락은 키스 재럿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현존하는 소수의 연주자 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 녹음한 더 퀘스트의 후기 음반들은 그 점을 잘 말해준다.

 

리치 베이락은 2016년부터 ’20년까지 데이브 리브먼과 함께 밴드편성을 벗어던진 즉흥 연주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것은 미니멀리즘과 우연성 음악의 영역에 도달했고 만년까지 그의 음악이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드러머 잭 디조넷도 참여한 이 작업은 다섯 장의 CD로 묶인 [Empathy](재즈라인)로 발매되었다.

 

2022년 프랑스에서 실황으로 녹음한 피아노 독주 앨범 [Leaving](재즈라인)은 비록 그 손끝이 전성기에 비해 무뎌졌지만 즉흥 연주자로서의 열정을 끝까지 불태웠던 음반이다. 이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

 

7 커리어 말년 함께 작업한 세 명인의 모습. 좌로부터) 잭 디조넷, 리치 베이락, 데이브 리브먼. 2017년도 추청.jpg

 커리어 말년 함께 작업한 세 명인의 모습. 좌로부터) 잭 디조넷, 리치 베이락, 데이브 리브먼. 2017년도 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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