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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첫 등단한 이후 40년 이상 시와 소설을 두루 써오고 있는 장정일 작가가 음악 이야기가 담긴 종류의 여러장르 책들을 직접 읽고서 쓴 서평, 리뷰 혹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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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 브루니 ; 완벽한 퍼스트 레이디] - 키아라 제미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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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 브루니 완벽한 퍼스트 레이디

/키아라 제미올리, /강현주 /디자인이음 /20100524/256P 원제 Carla Bru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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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 브루니는 토리노 시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피에몬테 주의 유서 깊은 고성인 카스타그네토 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605천 평이나 되는 이 성에는 예술품과 귀중품이 가득했고, 그녀의 부모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마리아 칼라스를 초대해 가정 음악회를 열었다. 브루니 가문은 1973, 이탈리아의 극좌 단체의 암살과 인신 납치를 피해 프랑스로 주거를 옮겼다. 다섯 살 난 카를라는 에펠탑이 보이는 816평 넘는 아파트에 살면서 파리의 유명 정치인들이 집에 오가는 지켜보며 성장했다. 사실 이글은 카를라에 대한 이야기이기보다 브루니 가문의 이야기이다.

비르지니오 테데스키의 아버지는 1888, 토리노에 전기 케이블 공장을 세웠다. 전기 산업이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운 작은 공장은 순식간에 대재벌로 변신하게 된다. 파리 이공과대학을 졸업한 젊은 비르지오 테데스키는 아버지로부터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산업 분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경험하는 것만큼 기업가로 훈련받는 데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조언을 받고 영국과 독일을 차례로 방문하게 된다.

산업 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을 둘러보게 된 젊은 비르지니오는 자동차 산업이 계속해서 팽창하게 된다면 타이어 산업 역시 그 뒤를 따라갈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상에 확신을 가진 그는 토리노로 돌아와 전기 케이블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타이어 제조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의 예견은 틀리지 않았다. 1960년대에 그가 재창업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CEAT는 이탈리아 최고의 타이어 회사인 피렐리에 이은 두 번째 타이어 회사가 되어, 3만 명의 종업원을 고용해 53개의 공장을 가동하게 된다.

영국 방문이 타이어 제조업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면 독일 방문은 유대인인 그에게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심각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불안한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지체 없이 이탈리아로 돌아와 토리노 산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 사회와 차츰 관계를 끊기 시작했다(유대인을 직원으로 고용하지도 않았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탈리아인 오르솔라 브루니와 결혼하면서 가톨릭 교도로 개종했다. 그러나 키아라 제미올리의완벽한 퍼스트레이디 카를라 브루니(디자인이음,2010)에 기술되어 있는 젊은 비르지니오의 독일 여행담은 문면 그대로 믿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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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 브루니의 친부이자 작곡가  알베르토 브루니 테데스키 

 

가톨릭 교도로 개종한 비르지니오는 단 한 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았다. 경제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던 유대인 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었지만, 비르지니오는 늑대들이 이탈리아에도 곧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1915년에 아들인 알베르토(Alberto)가 태어나자, 비르지니오는 자신의 뿌리를 조금이라도 지우려고 아들의 이름에 아내의 성을 덧붙였다. 그때부터 테데스키는 부루니-테데스키가 되었다.” 그러나 1915년은 아직 제1차 세계대전도 끝나지 않았을 때며, 패전의 충격과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반발로 세를 불리기 시작한 나치와 반유대주의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다. 이런 오류는 비르지니오의 출생 년도를 알면 단번에 해결 될 수 있지만 이 책은 물론이고 크리스틴 리샤르에두아르 블롱-클뤼젤의카를라 브루니 사랑할 자유(북쇼컴퍼니,2010)에서도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비르지니오 테데스키는 냉혹한 사업가였다. 그는 자기 사업체에서 독재자로 행동했고, 인색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사업 이외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대상이 음악이었다. 바그너광이기도 했던 그는 저녁마다 피아노로 자신이 좋아하는 작곡가의 소곡을 연주했다. 이런 자질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 알베르토에게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악보와 피아노에 열중했던 알베르토는 법학 공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 자연스럽게 가업에 합류하게 되었으나, 마음은 늘 음악에 가 있었다. 연주를 즐겼던 아버지와 달리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열두 살에 첫 번째 작품을 썼고, 법학을 공부하는 동안 이탈리아 작곡가 조르지오 페데리코 게디니에게 정식으로 작곡을 배웠다. 그가 작곡한 <오케스트라 변주곡>1948년 베니스 음악 축제에서 초연되었고, 1953년에 발표한 교향시 <비켄헤드>로 트리에스테상을 받았다.

바람둥이었던 아버지와 달리 알베르토는 색욕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간청으로 마흔세 살 때에야 스물여덟 살 된 피아니스트 마리사 보리니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결혼했을 때나 그 후에나 연인으로서보다 서로의 음악적 자질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동료에 더욱 의미를 두었다. 두 사람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아들 비르지니오와 딸 발레리아를 낳고 나서, 각자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하에 서로의 사생활을 양해하기로 합의한다. 마리사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로와 연인이 되었고 그와 헤어진 후, 열네 살 연하의 클래식 기타 연주자 마우리찌오 레메르트와 6년 동안 열애를 했다. 둘 사이에서 카를라가 태어났는데, 알베르토는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자신의 딸로 받아들였다.

197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알베르토는 연간 160억 유로를 벌어들이던 CEAT를 미련 없이 매각했다. 그는 작곡가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고 피아니스트 마리사 역시 활발하게 순회공연을 했다. 직업 음악가가 된 알베르토는 1996년 파리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미올리에 따르면, “동료로부터 인정받던 작곡가로서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토는 많은 사람들에게 단지 음악을 취미로 즐겼던 음악 애호가이자 부유한 기업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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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는 건축가가 되기 위해 소르본느 대학 건축예술학과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하고 모델 에이전시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패션디자이너와 사진작가들의 총애를 받는 세계 톱 모델로 10여 년 동안 활약하다가, 2002년 돌연 가수로 전향하여 첫 앨범 누군가 내게 말했지(Quelqu’un m’a dit)200만장이나 팔았다. 그리고 2008년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와 결혼한다.

그 사이에 카를라는 기혼 미혼을 따지지 않고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다. “진정한 여자 돈 주앙”(완벽한 퍼스트레이디 카를라 브루니), “카사노바의 딸과도 같은 여자”(카를라 브루니 사랑할 자유)라는 유명세는 그녀의 어머니 마리사에 대한 복수일까, 아니면 어머니의 삶에 대한 뒤늦은 승인일까?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자신도 없었을 데니, 답은 후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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