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터 베커(Walter Becker) 추모 칼럼 - 재즈를 너무나 사랑했던 천재 괴짜 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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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Walter Becker & Steely Dan 1950.2 ~ 2017.9
재즈를 깊이 사랑했던 천재 괴짜 로커!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1981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교련복에 국방색 학교 가방을 들고 하교하던 나는 그날도 미아리에 있는 단골 레코드 가게에 들렀다. 그리고 주인아저씨가 추천해준 이름 모를 밴드의 음반 한 장을 들고 집으로 왔다. 스틸리 댄의 <가우초 Gaucho>. 매우 정교하게, 규칙적으로 울리는 드럼 비트 위로 몽롱한 일렉트릭 피아노의 화음이 깔리는 ‘바빌론 시스터즈 Babylon Sisters’ 의 전주가 시작되면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에 이 음악을 들으며 머리에 떠올렸던 어느 이국 도시의 저녁노을을 그리게 된다. 올해로 45년 경력의 이 독특한 밴드 스틸리 댄과 나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시 ‘빽판’이라고 불렸던 해적음반으로 그들의 전작 <에이자 Aja> 와 그 무렵 나온 두 장짜리 스틸리 댄 베스트 음반을 사서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난 그들의 음악이 뭔가 모르게 매력적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알쏭달쏭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도 없는데다가, 무엇보다도 그들의 음악은 ‘너무’ 독특했기 때문이다. 난 당시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 리턴 투 포에버, 알 디메올라, 팻 메시니 그룹 등의 음악을 재즈라고 알고 듣고 있었다. 대부분 현란한 테크닉의 음악이었고 그것은 내가 좋아하던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과 연결되어 있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스틸리 댄은 달랐다. 내가 기존에 듣던 음악의 기준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위) Deacon Blues 가 수록된 그들의 6집 앨범 <Aja> (아래) 어마어마한 세션과 편집이 시도된 7집 앨범 <Gaucho>
신기한 점은 내가 이후에 재즈를 더 넓고 깊이 들어갈수록 유독 ‘록밴드 스틸리 댄’ 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재즈를 듣고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 된 후에도 간혹 다른 음악이 듣고 싶어질 때면 내 손은 종종 스틸리 댄의 음반들에 가 있었다. 어떻게 하다가 재즈란 음악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음에도 재즈로는 채워질 수 없는 나머지의 세계를 - 나는 냇 킹 콜이 죽은 해에 태어난 팝 세대가 아닌가! - 나는 많은 부분 스틸리 댄으로 메워왔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스틸리 댄의 두 멤버 월터 베커와 도널드 페이건이 젊은 시절에 열정을 품었던 재즈 대신에 록을 선택한 것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도 재즈만으로는 그들의 정서 모든 것을 표현해 낼 수 없었으니까.
1967년 뉴욕 주에 위치한 대학 바드 칼리지에서 만난 베커와 페이건은 서로 비슷한 취향의 상대방을 알아보고 만나자 마자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둘은 플로리다에서 방송되는 재즈 FM ‘모트 페가 쇼’를 모두 듣고 있었고 비슷한 취향의 재즈 레코드를 수집하고 있었다. 페이건은 학교 근처 한 카페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베커를 처음 봤는데 그것은 ‘프로페셔널 흑인 연주자의 느낌’이었다고 페이건은 훗날 말했다. 당시는 이미 록의 시대였음에도 주변 사람들이 베커에게 어떤 기타리스트를 가장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베커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랜트 그린.” 당시 페이건은 알토 색소폰과 건반을 연주하며 학교 내의 여러 밴드에 이미 속해 있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은 아방가르드 음악을 포함해서 실로 다양했는데, 페이건은 베커를 만나자 드디어 재즈 성향의 밴드를 결성할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이 1920년대부터 ’60년대 재즈까지를 두루 좋아한 것은 스틸리 댄 만의 독특한 취향과 음악을 만들어 냈다. 당시의 재즈 성향의 록밴드들이 대부분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에게 집중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들의 음악적 취향은 듀크 엘링턴의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의 아장 걸음 East St. Louis Toodle-O’을 ‘와-와-’ 기타를 앞세워 연주한다거나 호러스 실버의 ‘아버지를 위한 노래 Song for My Father’ 의 인트로를 빌려 ‘리키는 그 번호를 잊지 않았어. Rikki don’t Lose that Number’ 를 만들어 내는 기발한 시도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순수한 재즈 연주를 택하지 않았다. 훗날 재즈 피아니스트 마리언 맥파틀랜드가 그 이유를 묻자 그들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재즈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로큰롤, R&B, 시카고 블루스, 잭 캐루악, 앨런 긴스버그, 커트 보니것 등의 비트세대의 소설들, 보스턴의 SF 소설들, 유머집 등 당시 젊은이들의 하위문화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음악 속에 전부 담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아이러니, 냉소, 자조를 담은 가사들, 감상자들이 알아듣든 말든 자신들의 자전적인 내용을 전후 맥락 없이 써내려간 가사들은 세상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대변해 준다.
하지만 베커와 페이건이 스트레이트 재즈를 선택하지 않았던 숨은 이유는 그들의 곡 ‘블루스의 집사 Deacon Blues’ 를 통해 은밀히 고백했듯이 연주자로서의 자신들의 한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연주 대신에 과감하게 기용한 막대한 스튜디오 세션맨들의 이름은(그 이름들을 모두 여기에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턱 없이 부족하다) 스틸리 댄을 완벽주의의 대명사로 만들어 놓았다. 적어도 베커와 페이건은 완벽에 집착할 수 있는 예리한 귀를 갖고 있었다. ‘바빌론 시스터즈’에서 잊을 수 없는 뮤트 트럼펫 솔로를 연주했던 랜디 브레커는 베커의 지시로 무려 스무 테이크를 연주했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한다.
이들의 예민한 귀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93년 스틸리 댄 재결성 투어에서 드럼을 연주했던 피터 어스킨의 일화를 빌려야 할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스틸리 댄과 세션맨들은 투어 전에 뉴욕에 모여 3주 반 동안 연습을 했다. 베커와 페이건은 메트로놈을 사용해 모든 곡들의 최적의 BPM(분당 비트수)을 정했고 어스킨은 이를 메모해 두었다가 실제 연주에서도 메트로놈을 옆에 두고 곡이 연주되기 전 박자를 멤버 모두에게 카운트했다. 어떤 곡에서는 118.5 BPM과 같이 소수까지 붙일 정도로 베커와 페이건은 예민했다. 그런데 헤이 나인틴 ‘Hey Nineteen’ 을 연습하면서 어스킨은 관악 파트 박자가 계속 빠르다고 느꼈다. 그래서 어스킨은 원래 베커, 페이건이 주문한 118 BPM 보다 조금 빠른 119 BPM으로 연주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혼자 판단했다. 그리고 실제로 무대에서 119 BPM으로 연주했다. 그날 밤 연주는 무사히 끝났다. 다음날 연주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리허설이었다. 베커가 드럼세트 앞에 오더니 조용히 말했다.
“어제 박자가 좀 빨랐던 것 같아.”
어스킨은 대답했다. “아니, 그걸 알았단 말이야?!”
“어젠 좀 다르게 연주했어?”
“사실 ‘헤이 나인틴’ 템포를 118에서 119로 올렸어. 그걸 알아채다니!”
그러자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난 이 농담꾼은 씨익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신 그런 거 하지 마(Don’t Do it Again).”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한 음악으로 그들의 패배감을 노래했던 스틸리 댄. 음악에 있어서 이런 매력적인 아이러니는 아마도 찾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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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스틸리 댄의 두 리더 도널드 페이건과 월터 베커(좌로부터).jpg (File Size: 271.6KB/Download: 0)
- 3 Deacon Blues 가 수록된 그들의 6집 앨범 Aja.jpg (File Size: 30.0KB/Download: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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