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Tribute -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았던 자유로운 보헤미안 - '리 코니츠(Lee Konitz)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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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Lee Konitz (1927.10.13 ~ 2020.4.15)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았던
자유로운 보헤미안’
초기 비밥 시대부터 커리어를 시작해 명성을 쌓아올린 연주자들 가운데 가장 오랜 현역기간을 이어온 인물. 드러머 고(故) 폴 모션과 함께 비밥, 웨스트 코스트, 포스트 밥, 프리/아방가르드까지, 일렉트릭 퓨전을 제외한 재즈사의 주요 핵심 사조를 모두 다 소화해낸 몇 안되는 연주자였던 알토 스페셜리스트 리 코니츠가 지난 4월 15일 92세의 일기로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사망원인은 알려진 대로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의한 합병증입니다. (비록 사인은 그러하다지만 보기 드문 장수 연주자인데다 말년까지 공연 및 작품 활동을 계속 지속해 왔기 때문에,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의 명운을 달리 했을 지라도 아쉬움이 덜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재즈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팬 분들이시라면, 리 코니츠의 이름이 낯설지 않으실 겁니다. 과거 세대 거장이라는 인식이 크게 남아 있어서 비록 그의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별로 없을지라도 말이죠. 심지어 그가 아직까지 생존해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하다가 이번 사망 소식 때문에 되레 그가 지금껏 현역으로 계속 음악을 해왔다는 사실에 놀라는 분들이 저의 주위에 있기도 했었습니다.
처음 10대 유년시절 리 코니츠가 잡은 악기는 클라리넷이었습니다. 당시 1930년대 중반 베니 굿맨과 그의 빅밴드가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고 실제 인터뷰에서도 베니 굿맨이나 아티 쇼 같은 연주자들에 대한 언급을 직접 하기도 했었죠.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메인악기를 색소폰으로 바꾸고 이후 자신의 진로를 그걸로 정해나가게 됩니다. (처음 그는 테너를 불었으나 자신에게 더 맞는 악기가 알토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거의 대부분 알토로만 연주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다만 아주 가끔씩 테너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의 시작은 그가 18살이 되던 해인 1945년도부터였는데 이 즈음에 그는 스승격인 피아니스트 레니 트리스타노(Lennie Tristano)를 만나게 됩니다. 리 코니츠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연중 하나라고 봐도 될 그와 함께 연주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비밥에서 현대 클래식의 이론을 통해 새로운 표현과 음악적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법을 알게 되고, 또 뒤이어 거장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의 교류도 50년대 초반에 이뤄지면서 리 코니츠는 본격적인 음악적 개안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템포, 테크닉과 스피드, 기교의 경쟁이 아니라 재즈가 더 세련되고 지적이면서도 다양하고 깊이 있는 음악적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른 나이에 깨닫게 되면서 리 코니츠는 비밥, 하드 밥, 웨스트 코스트 계열 아티스트는 물론이고 프리/아방가르드 연주자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재즈의 새로운 가능성을 레니 트리스타노를 통해 처음 인식하게 된 뒤 리 코니츠의 이후 행보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변화무쌍하게 전개됩니다. 쳇 베이커와 제리 멀리건, 데이브 브루벡, 원 마쉬 같은 쿨 계열의 동료들과 협연하면서도 그는 오넷 콜맨, 앤소니 브랙스턴 같은 프리/아방가르드 대표주자, 길 에반스, 건서 슐러 같은 써드 스트림 작,편곡가들과도 거리낌 없이 교류하는 등 극과극의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작품 성향 또한 그러했었는데, 사실상 그의 높은 지명도에 비해 다분히 비주류적인 행보를 보여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Birth of the Cool 세션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한 젊은 시절의 리 코니츠
한때 필자는 리 코니츠의 음악에 깊이 빠져 그의 앨범을 꽤 많이 수집해 모니터했었고 10여년전 독일 명문 레이블 엔자(Enja)를 통해 그의 신작<Deep Lee>가 발매되던 차에 국내수입사인 굿 인터내셔널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성격의 뮤지션들과 계속 협연하고 끊임없이 앨범을 남길 수 있느냐'는 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난 무언가 새롭게 시도하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에서 연주하고 녹음하는 것, 이제껏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뮤지션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고 사랑해요. 그들과의 연주에서 긴장감과 설레임이 함께 되살아납니다. 또한 사전에 의도적으로 뭔가를 미리 만들어야겠다고 계획하고 시도하는 것보다는, 이제껏 함께 해오지 못했던 뮤지션들과 연결이 되어 즉각적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결과를 담아내다보니 이렇게 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인 즉, 자신과 공감이 되는 뮤지션이라면 상대가 명성이 있건 없건, 자신과 친분이 있건 없건, 나이가 많건 어리건 그리 개의치 않고 여건이 허락되는 한 자유롭게 협연을 하길 원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의 디스코그래피에는 트럼페터 마일스 데이비스, 테너 색소포니스트 스탄 겟츠,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왈로우, 드러머 폴 모션,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 피아니스트 브래드 멜다우, 알토이스트 필 우즈, 기타리스트 빌 프리셀, 피아니스트 미셸 페트루치아니와 케니 워너 같은 유명한 당대 최고의 스타급 연주자들이 협연자로 있는 한편, 피아니스트 단 테퍼와 플로이안 웨버,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기 전의 스테파노 볼라니나 동향의 피아니스트 스테파노 바타글리아, 기타리스트 야콥 브로, 편곡자겸 베이시스트 오하드 탈머같이 상대적으로 명성이 일천한 젊은 연주자들도 두루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계 알토이스트인 그레이스 켈리와도 12년 전 앨범을 만든 적이 있었죠) 거기에 발매 레이블 또한 일관성이 하나도 없을 만큼 매번 제각각인데다, 편성도 완전한 알토 독주에서 듀오, 트리오, 쿼텟 같은 캄보에서부터 옥텟, 노넷, 빅밴드, 심지어 스트링 협연까지 아주 다양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스튜디오 레코딩이 될 가능성이 높은 작년 발매작 <Old Songs New>는 그가 평소 애정하는 편성중 하나인 9중주였죠.
개인적으로 그의 이런 종잡을 수 없는 행보와 작품들을 이야기할 때 가장 적절한 예로 들 만한 대표작중 하나가 바로 <The Lee Konitz Duets>라고 생각합니다. 1967년에 녹음되어 이듬해 마일스톤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이 작품은 당대 재즈 신의 주류였던 하드 밥과 프리재즈, 이 사이의 경계에 놓인 초기 포스트 밥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운드의 결, 접근방식이 다릅니다. 테너 색소포니스트 조 헨더슨, 기타리스트 짐 홀, 베이시스트 에디 고메즈, 바이올린 주자 레이 낸스, 바이브라폰 주자 칼 버거등 서로 다른 악기 주자들과의 듀엣 협연을 통해 상호자유즉흥 협연을 시도하고 있으면서 아주 지적이면서 모던한 대위 진행이 지금 들어도 진부하지 않고 무척 고급스러우면서 세련됨을 느끼게 합니다. 잘 알려진 스탠더드에서 자신의 오리지널까지 두루 담아낸 이 작품은 생전 200장이 훌쩍 넘는 리 코니츠의 전체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그의 음악세계 핵심을 잘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절친인 테너 색소포니스트 원 마쉬와 함께 연주하는 모습 1970년대 중반
한편 리 코니츠는 생전 인터뷰를 통해 동일한 코드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프레이즈와 멜로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반적인 화성적 토대를 넘어서도 자신의 즉흥언어를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었다고 하죠. 오랜 노력과 고민의 결과로 전통과 전위의 경계를 넘어 자유자재의 즉흥연주능력을 체득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재즈사를 통틀어 이러한 즉흥연주 경지에 도달한 인물은 키스 재럿, 찰리 헤이든, 게리 피콕, 폴 블레이, 웨인 쇼터 정도 외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가 커리어 중, 후반기에 자주 들려주었던 프리/아방가르드적인 시도는 기존의 이 방면 음악가들이 의례히 선보였던 공격적인 파열음과 무조성에 기반한 하드한 즉흥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유니크함이 빛나는데, 그는 무척이나 리리컬하면서 지적인 뉘앙스를 담아내려고 고민했고 심지어 프리한 연주를 하면서도 밥적인 스타일의 프레이즈를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레니 트리스타노의 12음계를 활용한 연주에 기인한 이 방식은 분명 전위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음에도 세실 테일러나 앨버트 아일러, 존 콜트레인 같은 연주자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프리/아방가르드 재즈와는 사운드자체가 판이하게 달랐죠. 이러한 그의 연주아이디어를 두고 프리 밥(Free Bop)이라고 표현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피아니스트 플로리안 웨버가 이끄는 트리오 민사라(Minsarah)와 함께 한 리 코니츠
이렇듯 재즈사의 주요 사조들을 직접 체화하고 이걸 토대로 자신의 새로운 언어와 소리들을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리 코니츠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커리어에서 필자 개인적으로 한 가지 아쉬움을 갖고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일관된 밴드, 또는 레이블과의 연결고리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점이에요. 테너 색소포니스트 원 마쉬나 베이시스트 레드 미첼 기타리스트 짐 홀처럼 자신과 상성이 잘 맞는 동료들이 그의 주변에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메이저 레이블과의 접점도 분명히 있었으며, 그토록 다양한 성격을 가진 연주자들과 기꺼이 앨범도 만들고 공연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리 코니츠 쿼텟, 혹은 리 코니츠 밴드 같은 레귤러 팀을 단 한번도 조직해 꾸준하게 운영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오리지널이 중심이 된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인 적도 별로 없었죠. 이 점은 그가 명실공히 재즈사에 길이 남을 대가 알토이스트라고 누구나 다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소니 롤린스, 찰스 로이드, 키스 재럿, 웨인 쇼터 같은 연주자들이 일궈온 리더로서의 영역을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워낙 자유로운 마인드를 갖고 있으며 어디에 귀속되는 걸 싫어한데다, 앞서 인터뷰에서 언급한대로 미리 무언가를 계획해 작업하는 것보다 자유롭게 연주자들과 협연하고 그 순간 교류하는 걸 더 즐겼기에 정해진 틀과 계약 같은 조건에 구애받으려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리더의 위치에서 최소한 지속적인 팀워크만 꾸려서 안정된 레이블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을 했더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널리, 크게 이름을 알렸을 겁니다. 더불어 명성도 더 얻었겠죠.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표현해낼 수 있는 연주를 마음에 맞는 어느 누군가와 함께 교감하고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던 인물이 바로 리 코니츠였던 거죠. 이런 점에서 볼 때, 1945년부터 2019년까지 75여년의 세월동안 이어져온 그의 오랜 음악여정은 어디에 얽매이길 거부하는 자유로운 방랑자의 행보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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