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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시알 솔랄(Martial Solal) 추모칼럼 - 유럽인이면서 경계인이었던 재즈 피아노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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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유럽인이면서 경계인이었던 재즈 피아노의 거장

마르시알 솔랄(Martial Solal)     1927. 8~2024. 12

 

 

재즈가 유럽으로 전해진 역사는 재즈의 원산지인 미국에서의 확산과 시간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최초의 재즈 음반인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밴드의 첫 녹음, 그리고 뉴올리언스 재즈 음악인들의 이주를 부채질했던 스토리빌 폐쇄가 있었던 1917년에 몇몇 재즈밴드는 이미 유럽 땅을 밟고 있었다는 것이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주장이다. 시드니 베셰가 속했던 윌 매리언 쿠크의 싱코페이티드 오케스트라가 런던의 로열 필하모닉 홀에서 공연했던 것이 1919년이었으니 재즈가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던 1920년대가 되기 전에 이미 대서양을 건넜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럽의 재즈는, 비록 그 연주자의 수가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역사에서 또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역시 1930년대의 장고 라인하르트였다. 유럽 대륙의 집시음악과 재즈를 접목한 그의 음악은 유럽 재즈의 첫 번째 독립 선언문이었고 동시에 찰리 크리스천이 등장하기 이전에 재즈에서 기타라는 악기의 위상을 한 단계 올려놓는 것은 유럽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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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의 젊은 시절 모습 

 

하지만 재즈 역사에서 유럽 재즈의 두 번째 기여는 장고로부터 30여 년 뒤인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가능했다. 그것은 재즈 록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등장한 ECM 레코드를 통해서였는데 헝가리의 가보르 서보(Garbo Zabo), 영국의 존 맥러플린과 데이브 홀랜드, 폴란드의 토마스 스탄코, 노르웨이의 얀 가바렉과 테르예 립달 등과 같은 독자적인 색채의 재즈 음악인들의 등장은 재즈가 미국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 음악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들려주었다.

그렇다면 유럽의 재즈는 1930년대부터 ’60년대 사이의 30년 동안 아무런 독자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 30년 동안 유럽 재즈를 좀 더 들여다본다면 오로지 미국 재즈의 답습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해였던 2024121297세의 일기로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마르시알 솔랄은 훌륭한 하나의 보기다. 그는 동시대의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재즈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손에 꼽을 만한 탁월한 기교를 겸한 재즈 피아노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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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재즈에서도 탁월한 피아노의 대가들이 등장했지만 20세기 전반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유럽 재즈 연주자 속에서 유독 피아노의 거장이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피아노의 명인을 낳은 이 대륙의 풍토에서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시 말해 마르시알 솔랄은, 장고 라인하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도 유럽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소수의 미국 평론가들이 솔랄을 발견했을 때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다. 1963년 솔랄이 미국 무대에 첫 모습을 보였을 때 까탈스러운 평론가 마틴 윌리엄스는 세계 최고의 재즈 음악가 중 한 사람이라고 평했으며 평론가 댄 모겐스턴은 1994년 앨범 [Improvise Pour France Musique]을 위한 라이너 노트에서 우리가 이 음반에서 듣고 있는 것은 동시대의 음악 가운데 가장 높은 경지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미국 평론가, 음악인만이 그의 가치를 알아봤다는 아쉬움은 완벽주의자이자 클래식 피아노의 거장인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가 남긴 솔랄에 대한 평가를 통해 충분히 보상받을 것이다.

 

마르시알 솔랄은 말 그대로 나를 마비시켰다.......정말 자유가 충만한 연주회였다. 이런 자유가 용인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일부의 청중은 약간 충격을 받았는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박수에 브라보 소리를 섞어가면서 마음껏 흥분했다.” (1983)

 

찬란하다. 명인의 기량, 진정한 축제......모든 게 즉흥연주다.......재즈의 이른바 새로운 양식은 내가 오늘 밤에 들은 솔랄의 연주보다 사실 훨씬 낡아빠진 것이다.”

(1988. 이상 [리히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브뤼노 몽생종/ 이세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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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크 엘링턴과 함께한 젊은 시절의 마르시알 솔랄  1960년

 

마르샬 솔랄은 말 그대로 나를 마비시켰다.”

마르시알 솔랄이라는 인물이 유럽에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실이지만 실상 그는 유럽의 경계인이었다. 마르시알은 회계사였던 아버지와 아마추어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마르시알 사울 코언-솔랄이라는 본명으로 1927823일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였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유럽인이라는 그의 경계성에는 한 가지 요인이 더 숨어 있었다. 사울 코언-솔랄이라는 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다. 1940년 독일 나치의 점령으로 프랑스 비시 정부가 수립되자 당시 열세 살의 마르시알은 본국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일곱 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던 솔랄은 이때부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홀로 집에서 피아노로 치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를 사로잡은 음악이 미국에서 건너온 재즈라는 음악이었다. 경계인으로서의 그의 위치가 필연적으로 대안 음악재즈와 만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이야기 하나가 있다.

 

소년 마르시알은 어느 날 두 사람이 연탄(聯彈)으로 녹음한 피아노 연주를 라디오에서 듣고서 그것이 두 사람의 연주인 줄 모른 채 혼자서 그 곡을 흉내 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 이야기는 아트 테이텀의 연주를 듣고서 틀림없이 오버 더빙 녹음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행크 존스의 증언, 또는 클럽에서 테이텀의 연주를 들으면서 틀림없이 두 사람의 연주일 것이라고 추측했던 레이 찰스의 회고(당연히 그는 앞을 볼 수 없었다)와 일맥상통한다. 피아노 연탄을 혼자의 연주로 구현해 보려던 마르시알의 훈련은 그가 아트 테이텀을 존경하게 된 이유이자 그의 연주가 테이텀의 계보에 닿게 되는 이유였던 것이다.

 

4 클라리넷,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자 시드니 베셰와 함께 듀오로 연주한 작품. 독특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주는 탁월한 듀오 앨범이다. 1957년도 녹음.jpg

클라리넷,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자 시드니 베셰와 함께 듀오로 연주한 작품.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주는 탁월한 듀오 앨범이다.   1957년도 녹음

 

 

나치와 비시 정권이 패망했던 1945, 열여덟 살의 마르시알은 알제리 주둔 미군 부대에서 인생 최초의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그리고 5년 뒤 그는 자신의 이름에서 사울 코언을 지우고,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감춘 채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대 초, 그는 이미 파리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재즈 이론가이자 작곡가였던 앙드레 오데르의 밴드에서 연주했고 이후 전설의 장고 라인하르트는 물론이고 프랑스를 방문한 대표적인 미국 연주자들인 클라크 테리, 돈 바이어스, 럭키 톰프슨, 케니 클라크, 스탠 게츠와 녹음했으며 당시 프랑스에 거주하게 된 시드니 베셰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그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프랑스는 미국의 재즈에 열광하고 있었다. 이 점은 당시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한 흐름 속에서 솔랄은 프랑스에서 제작된 여러 편의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대표적으로 장 피에르 멜빌의 <맨해튼의 두 남자>(1959), 장 콕토의 <오르페우스의 유언>(1960)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솔랄에게 프랑스를 대표하는 모던재즈 피아니스트라는 명성을 안겨 주었다.

동료 피아니스트인 오스카 피터슨은 솔랄의 연주를 듣고 감탄했으며 파리 공연 중에 함께 연주했던 듀크 엘링턴은 솔랄을 소울 브라더라고 인정했다. 그 여파로 솔랄은 1963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면서 첫 미국 무대를 밟았고 당시의 실황녹음은, 안타깝게도 스튜디오 보정작업이 첨가되었지만, 메이저 음반사인 RCA-빅터를 통해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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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토이스트 리 코니츠와 함께 연주하는 마르시알 솔랄  1990년대 중반

 

 

전후(戰後) 프랑스를 대표하는 모던재즈 피아니스트

그럼에도 솔랄의 명성은 그 실력만큼 미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미국에서 그의 연주회는 극히 드물었다) 근본적으로 당시 미국 재즈의 흐름을 따르지 않았던 그의 비타협적인 음악성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대답일 것이다. 그는 만년의 한 인터뷰에서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해 즉흥연주가 많은 역할을 한 작품을 만들었던 작곡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여기서 창작이 누릴 수 있는 자유란 오로지 최고 수준의 연주 기교만이 허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솔랄의 연주 활동은 끊임없는 연주의 정진을 통해 그의 목표에 도달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그것은 밴드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려는 밴드 리더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울러 사이드 맨 활동을 통해 음악적 역량을 발전시키면서 유명 밴드의 일원으로 경력을 쌓아가는 모습도 그에게는 볼 수 없었다.

 

그는 12인조로 구성된 도데카 밴드를 통해 듀크 엘링턴의 작품들을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그의 음악의 본령은 역시 피아노 독주였다. 거기에 비한다면 피아노 트리오 편성마저도 때로는 그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미국의 인물들을 통해 굳이 비유하자면 아트 테이텀 혹은 오스카 피터슨의 기교를 갖춘 그의 연주는 심지어 텔로니어스 멍크의 파격을 수시로 구사함으로써 듣는 이들을 살짝 긴장시키기도 하는데 그 점은 그의 고정적인 트리오 멤버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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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포니스트 데이브 리브먼과 함께 한 마르시알 솔랄

 

최고의 기교만이 허락할 수 있는 창작의 자유

피아노 독주를 제외한다면 그에게 가장 많은 녹음은 이중주였다. 즉 그와 동등한 기량의 독주자와 좀 더 열린 구조 속에서 일대일의 음악적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앙상블이었다. 그와 이중주를 녹음한 인물들은 리 코니츠(특히 솔랄과 여러 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햄프턴 호스, 요아힘 쿤, 스테판 그라펠리, 투츠 틸레망, 미셸 포르탈, 조니 그리핀, 에릭 르랑, 데이브 더글라스, 데이브 리브먼 등 그 폭이 매우 넓다. 그중에서 베테랑 색소포니스트 데이브 리브먼에게 마저도 솔랄과의 연주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가 솔로를 하거나 내 뒤에서 반주할 때 내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는 걸 인정합니다. 끊임없이 그가 화성을 재구성하는 것은 정말 이 세상 것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그의 박자는 완벽했습니다. 그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악절이 넘어갈 때 그걸 리듬을 통해 느낄 때가 많았거든요. 리듬이 바뀌니까 그때 , 음악이 어디론가 가고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죠.”

2016년 리브먼과의 이중주는 솔랄 생애의 마지막 2중주 녹음이었다. 3년 후인 2019123, 파리 살 가보(그곳은 솔랄이 파리에서 첫 연주회를 가졌던 곳이다)에서 92세의 솔랄은 생애 마지막 은퇴 연주회를 가졌고 이 피아노 독주회는 앨범 [Coming Yesterday]로 발매되었다. 마지막 곡인 리처드 로저스의 <Have You Met Miss Jones> 를 끝내고 환호하는 청중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제가 해야 할 이야기는 모두 마쳤습니다.” 그때 그는 F장조 화음을 한 번 더 누르고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라고 말과 함께 무대에서 내려왔다.

 

미국에서의 명성과는 다르게 그는 유럽에서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989년 시작된 마르시알 솔랄 국제 재즈 피아노 콩쿠르는 4년 혹은 9년에 한 번씩 열려 피아노의 귀재들을 발굴했으며(안토니오 파라오, 프랭크 아비타빌르, 뱁티스트 트로티뇽, 티그란 하마시안은 모두 이 대회의 수상자들이다) 1990년부터 2004년까지 있었던 덴마크의 재즈파 프라이즈(Jazzpar Prize)에서 1999년 솔랄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의 딸 클라우디아 솔랄은 재즈 보컬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사진/kpa/United Archives/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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