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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윤이상] - 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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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윤이상

 

이수자 지음 | 창작과비평사 | 1998년 09월 01일 출간 | 356P 상,하권 |

 

 

『내 남편 윤이상』(창작과비평사,1998)은 윤이상(1917~1995)의 부인 이수자 여사가 쓴 남편의 평전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면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란 윤이상은 보통학교 3학년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쏟았다. 이웃에는 일본 유학을 갔다 와서 취미삼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윤이상은 싼 바이올린 하나를 힘들여 구해서 청년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3세가 될 무렵 그는 ‘나도 내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일찌감치 작곡을 시작했다. 당시는 음악을 하는 사람을 ‘굿쟁이’라고 천시하던 시대였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을 하지 못하도록 바이올린을 마당에 내동댕이쳐 부수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부모의 강권에 따라 서울에 있는 상업학교에 진학하였으나, 학교 공부보다는 자신에게 음악이론을 가르쳐 줄 선생을 찾는 데 더 열심이었다. 2년 동안의 서울에서 음악이론을 공부한 그는 통영으로 내려와 아버지에게 일본 유학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아버지는 상업 공부를 한다는 조건으로 아들의 유학을 허락했는데, 막상 오사카에 도착한 아들은 상업학교가 아닌 오사카음악학교大阪音樂學校에 입학(1935)해 버렸다. 2년 동안 작곡과 음악이론, 첼로 등을 배운 그는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 돈을 벌기 위해 산양면에 있는 화양학원에 취직(1937)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9년 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작곡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우池內友次郞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1년 태평양전쟁 벌어지기 직전에 귀국한 윤이상은 징용 대상이 되어 미곡창고에 배치되었는데, 그의 사상을 의심한 일본 경찰이 가택 수색을 하여 우리말로 작곡한 가곡을 발견하고 그를 체포했다. 이 일로 윤이상은 두 달 동안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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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통영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취직(1948)했던 윤이상은 얼마 후 부산사범학교로 전근하였다. 이때 같은 학교 국어교사인 이수자와 만나 결혼(1950)하였다. 그해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시작곡가협회를 조직했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이주하여 여러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며 가곡과 실내악곡 등을 발표했다. 1955년 제5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자 10만원의 상금을 갖고 파리유학을 준비했다. 1956년, 마흔 살에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생활비도 적게 들고 등록금도 필요 없는 서베를린음악대학으로 다시 학교를 옮겨 그곳의 학장이자 유명한 작곡가인 보리스 블라흐Boris Blacher에게 작곡을 배우고,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제자이자 빈악파의 가장 정통한 이론가인 요제프 루퍼Josef Rufer 교수에게 12음 기법을 배웠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일본어로 번역된 루퍼의 저서『12음 작곡』을 읽고 초기의 몇 작품을 쇤베르크와 같은 기법으로 작곡하기도 했으나, 그 후 윤이상은 12음 기법과 다른 길을 갔다.

 

1958년 9월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 참석하여 카를 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루이즈 노노Luigi Nono,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존 케이지John Cage 등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전위적인 급진파 작곡가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혼돈된 상태에서 자신의 진로를 생각했다. 이들 급진적인 전위파 속에서 자리를 견고히 할 것인가, 아니면 동아시아적인 음악 전통과 결합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인가, 그것은 그에게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그가 이 음악제를 위해 작곡한「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은 12음 음기법으로 작곡된 것이지만 동양적인 요소가 개제되어 있었다. 윤이상은 이 곡으로 현대 작곡가들의 극찬을 받았고, 도쿄대학교 미술과를 나온 후 작곡으로 목표를 바꾼 나이 서른 미만의 백남준을 이때 처음 만났다. 1961년 9월, 5년 4개월 만에 이수자 여사가 독일로 왔고, 그 후에 두 아이가 합세하여 8년 만에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

 

윤이상의 작품은 연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의 작품은 그의 작품만 연주하는 전문 연주가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런 문제는 윤이상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나 니톨로 가스띨리요니Niccolo Castiglioni, 보 닐손Bo Nilson등의 작품은 연주자들로부터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불만을 들어야 했고, 이러한 음악을 연주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의사의 진단서를 제출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도 있었다.

“현대음악으로 인해 새로운 음악 표현의 가능성의 폭이 넓어지니 연주법도 새로이 개척되었으나 그때마다 연주가들은 불만이었고 그리고 연주기법도 작곡가가 요구하는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하던 곡들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제는 음악대학 학생들까지도 미끈히 연주해내게 된 것을 보면, 인간의 노력으로 인한 기술의 가능성은 무진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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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의 음악은 “동양적 의미성을 서구음악의 수법을 빌려 표현하는 양양성兩洋性에 있다”고 한다. 일본의 음악학자 야노 토오루는 윤이상의 양양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수많은 작품이 동양세계, 즉 중국과 조선의 사상, 문물에서 곡상曲想을 얻고 있는 특징이 먼저 지적된다. 즉, 윤은 아시아의 총체總體를 짊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에 서본 작곡가는 내가 아는 한도에서, 윤이상 말고는 전무후무하다. 그리고 그의 음악 자체에 아시아라는 의미공간에 뿌리박은, 타협이 없는 ‘문법’이 관통되어 있다. 윤은 동아시아의 음악문화를 원천으로 하고, 모국 한국의 음의 이미지를 유럽 현대음악의 수법으로써 음악화 하고 있는 것이다.”

 

1967년, 그해의 6ㆍ8총선을 부정으로 치른 박정희 정권은 부정 선거로 인한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동베를린 사건을 조작하였다. 이 사건을 주도한 중앙정보부는 베를린에 있는 한국인 예술가ㆍ유학생ㆍ광부 등 17명을 서울로 납치하여 간첩단을 조작했다. 국내에서 체포된 관련자들을 포함 모두 34명이 기소된 이 사건은 약 1년 반 동안의 재판 끝에 윤이상 등 3명에게 사형, 1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되었다. 하지만 1969년 2월, 대통령 특사로 윤이상이 풀려나고, 1970년 12월에 나머지 사형수가 모두 풀려남으로써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냈다.

 

이 사건 이후, 원래 민족주의자였던 윤이상의 작품은 “정치적 표현주의”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가는 음악가가 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예술작품 혹은 예술행위가 놀랄 만한 일을 이루어낼 수도 있다. 민족의 혼과 양심을 불러일으키고 민중을 각성시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예술이다.

 

시벨리우스의 교향시곡 <핀란디아>는 핀란드 국민을 민족독립운동으로 그 혼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또 체코의 스메타나가 작곡한 <나의 조국>은 체코의 민중을 순결의 애국심으로 불타게 했다.” 윤이상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매해 한 곡씩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순환적으로 연결된 5개의 교향곡은 전부 본질적으로 강한 정치적 의식을 갖고 있다. 그는 “교향곡이란 형식은 정치적 문제의식의 표현으로서는 가장 적절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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