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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드 자말(Ahmad Jamal) 추모 칼럼 - 독보적인 여백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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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독보적인 여백의 미학

아마드 자말(Ahmad Jamal) 1930.7 ~ 2023.4

/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지난 20202월 아마드 자말은 자신의 아흔 번째 생일을 4개월 여 앞두고 90세를 기념하는 음악회를 뉴욕 링컨센터 콘서트홀에서 가졌다. 96세까지 무대에서 연주했던 전설의 유비 블레이크, 92세에 녹음을 남긴 행크 존스, 지난 201992세에 현역에서 은퇴한 마르시알 솔랄과 더불어 아마드 자말의 소식은 내가 기억하는 최고령 재즈 피아니스트들의 공개 연주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소식이 전해지고 3년 뒤인 2023416일 재즈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자말의 부음 소식이 전해졌다. 매사추세츠 주 애실리 폴스에 있었던 자택에서 그는 아흔 세 번째 생일을 두 달 여 앞두고 있었다.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부터 프랑스에서 거주했던 그는(이때부터 자말은 2016년까지 주로 프랑스에서 음반을 녹음했다)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세상의 명성과 평가라는 것은 섬세하기 보다는 거칠고 때로는 부정확하기까지 하다. 이 점은 아마드 자말에게도 해당된다. 그가 이미 왕성하게 활동했던 1955년부터 ‘75년까지 20년 동안 <다운비트>, <메트로놈>, <멜로디 메이커>, <재즈 핫>, <재즈 에코>, <재즈 백과사전 연감>, <플레이보이>, <스윙저널> 등 여러 재즈 전문지에서 매해 선정한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는 고작 13명으로 압축된다. 이 전문지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다양한 나라에서 출간되었고 선정에 참여한 사람들도 재즈 팬에서부터 재즈 평론가, 재즈 연주자까지 다채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열 세 명의 피아니스트는 아트 테이텀, 오스카 피터슨, 데이브 브루벡, 버드 파월, 에럴 가너, 얼 하인스, 존 루이스, 텔로니어스 멍크, 빌 에번스, 허비 행콕, 칙 코리아, 매코이 타이너, 키스 재럿이 전부다. 누군가는 당시의 20년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이름은 위의 열 세 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드 자말을 생각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평론가 스탠리 크라우치의 말을 빌리자면 자말은 그 혁신성과 영향력 측면에서 텔로니어스 멍크와 동등한 위치에 놓여야 할 인물이다. 심지어 크라우치는 이렇게 썼다. “새로운 재즈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아마드 자말보다 중요한 사람은 찰리 파커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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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크와 동급에 놓여야 할 피아니스트

 

역사적으로 인색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말은 무명의 피아니스트가 결코 아니었다. 1958년에 발매된 [퍼싱에서의 아마드 자말: 나를 위한 것은 아니죠 Ahmad Jamal at the Pershing: But Not For Me](아르고)는 일반적으로 한 해에 15천장에서 2만장이 판매되면 대박이라는 재즈 음반 시장에서 무려 47천 장이 팔리면서 그해에 가장 많이 팔린 재즈 연주 앨범으로 기록되었고 <빌보드> 앨범 차트 107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상업적인 성공은 웨스 몽고메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인생에 오히려 짐을 안겼다. 그가 활동했던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재즈 뮤지션이었던 그는(당시 그의 일주일 수입은 3천 달러에 이르렀다. 오늘날 원화로 환산하면 무려 4천만원이 넘는다) 그의 소원했던 직접 경영하는 재즈 클럽 알함브라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신념(어쩌면 교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로 알코올을 취급하지 않았던 그의 클럽은 결국 그에게 경제적 파산과 이혼이라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것은 그 시기에 그의 음악에 대한 평가였다. [퍼싱에서의 아마드 자말]에 대해 <다운비트>는 무성의하게 칵테일 음악이라고 평가했고 이 용어는 자말이 존경했던 같은 고향의 피아니스트 에럴 가너에 대한 평론가들의 공격과 동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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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드 자말에게 초기 커다란 상업적 성과를 안겨줬던 작품.  1958년도 녹음, 발매

 

아마드 자말은 193072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철강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프리츠로 불렸던 그의 본명은 프레드릭 존스였다. 세 살 때 삼촌으로부터 처음 피아노를 배웠던 그는 일곱 살 때부터 정식으로 피아노를 공부했고 그때부터 드뷔시와 라벨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그의 우상은 피츠버그에서 활동 중이었던 매리 루 윌리엄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아홉 살 위인 에럴 가너였다. 만년의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 당시 우리는 클래식과 재즈를 구분하지 않았다. 바흐와 엘링턴을, 모차르트와 테이텀을 함께 공부했다.”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경제적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직업 연주자로 활동했던 프리츠는 그 무렵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을 만났다. 우선 그는 바이올린 주자 조 케네디와 함께 피아노, 기타, 베이스로 이뤄진 포 스트링스를 결성했는데 케네디가 곧 팀을 이탈하면서 밴드는 스리 스트링스로 변경되었다. 그 결과는 뜻하지 않게 과거의 냇 킹 콜 트리오와 같은 편성이었다.

아울러 그는 이 무렵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는데 그때 얻게 된 그의 새로운 이름이 아마드 자말이었다.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이름을 계속 사용했던 아트 블레이키(압둘라 이븐 부하이나), 케니 도햄(압둘 하미드)과는 달리 그는 유세프 라티프(윌리엄 허들스턴), 사힙 시합(에드먼드 그레고리)과 더불어 세례명으로 활동한 소수의 재즈 음악인들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자말은 고향 피츠버그를 떠나 시카고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그의 비상한 연주를 알아본 인물은 컬럼비아 레코드의 명프로듀서 존 해먼드였다. 그렇게 해서 자말은 컬럼비아 레코드 산하 오케이에서 1951년부터 녹음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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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영감은 자말에게서 온 것이다.”

 

1951년부터 ‘55년까지 오케이와 에픽(역시 컬럼비아 산하의 레이블)에서 있었던 세 번의 레코딩 세션을 모아 훗날 발매된 [전설의 오케이, 에픽 녹음들 The Legendary Okeh & Epic Recordings](에픽)은 재즈 피아노의 역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명반이자 아마도 그 역사적 비중만큼 외면 받아온 대표적인 저주받은 걸작일 것이다. 잘 알려졌다 시피 자말 음악의 막대한 영향력은 ‘50년대 중반부터 재즈계의 리더로 급부상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에서 명백히 나타났다. 그 무렵 마일스가 ‘55년부터 ‘56년까지 녹음한 일련의 앨범에는(여기에는 마일스의 첫 번째 오중주단의 명반들이 포함된다) <내 곁에 있을까요? Will You Still Be Mine?>, <칼리코의 소녀 A Gal in Calico>, <아마드의 블루스 Ahmad’s Blues>, <천장을 장식한 마차 Surrey with the Fringe on Top> 등이 매혹적으로 담겨 있었는데 이 곡들은 모두 자말 트리오의 [전설의 오케이, 에픽 녹음들]에 이미 담겨 있던 곡들이었다. 마일스가 길 에번스의 편곡, 지휘로 1957년 앨범 [마일스 어헤드 Miles Ahead]에 담은 자말의 곡 <뉴 룸바 New Rhumba> 역시 2년 전 자말 트리오의 앨범 [새로운 재즈의 실내악 Chamber Music of the New Jazz](아르고)에 실려 있었다. 1958년 마일스 육중주단 소속의 캐넌볼 애덜리가 녹음한 솔로 앨범 [특별한 것 Something Else](블루노트)에서 마일스의 권유로 녹음한 <가을 낙엽 Autumn Leaves>(이 앨범에서 마일스는 사이드맨으로 직접 연주했다)에서 독특한 인트로의 뱀프 역시 [전설의 오케이, 에픽 녹음들]을 들어보면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모던재즈의 역사를 일궈온 거장 마일스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이토록 명백하게 드러낸 경우는 아마도 아마드 자말이 유일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레퍼토리뿐만이 아니라 연주의 템포, 음과 음사이, 악절과 악절 사이의 여백 그리고 해석 전반에 있어서 매우 명백했다. 자말은 카운트 베이시, 멍크, 존 루이스, 마일스와 더불어 여백의 대가였고 그런 점에서 자말은 멍크와 동등하게 평가받아야 한다는 크라우치의 평가는 설득력을 지닌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적 기여는 당시의 평론가들이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아마드 자말의 영향력은 마일스가 그의 자서전 [마일스 Miles](1989)를 통해 명백히 밝힘으로써 비로소 알려졌고 여기에 마일스는 오늘날 잘 알려진 결정적인 한 마디를 보탰다. “나의 모든 영감은 자말에게서 온 것이다.”

.자말은 확실히 일급 뮤지션의 뮤지션이었다. 를 재빨리 영입하기도 했다)드럼(와 버널 퍼니어)베이스(년 자말이 경제적 파산과 법적인 문제로 그의 트리오를 해산하자 그의 사운드를 탐냈던 조지 시어링은 자말 트리오의 이스라엘 크로스비. 1962뿐만이 아니었다. 키스 재럿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허비 행콕, 빅터 펠드먼, 윈턴 켈리, 빌 에번스 )그는 자말과 마찬가지로 에럴 가너의 추종자이기도 했다(마일스는 그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아마드 자말의 연주를 들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는데 그것은 레드 갈런드를 시작으로. 하지만 그 영향력은 지속적이었다. 하지만 시카고에서의 활동을 고집했던 자말은 마일스의 권유를 완곡하게 거절했고 대신에 이후 마일스 밴드의 피아니스트들에게 그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전했을 뿐이다. 년대에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당대에 인정받았을 것이다’50-‘60만약 자말이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 연주했다면 그는 분명히 . 그래서 마일스는 당연히 자신의 밴드에 아마드 자말을 영입하고 싶었고 그의 입단을 여러 차례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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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60년대 경제적 문제와 이혼 후 전처가 기르던 아이들에 대한 양육비에 관한 법적인 문제에 휩싸였던 자말은 이러한 난관들을 정리하고 ‘60년대 말 시카고를 떠나 뉴욕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50년대 중반부터 그의 연주를 녹음했던 시카고의 대표적인 독립 음반사 체스(이 레이블은 아르고란 이름을 겸해서 사용했다)‘60년대 말부터 대형 음반사 ABC 레코드 산하의 임펄스로 바뀌었다. 그의 즉흥성은 점점 더 확장되었으며 영롱한 그의 피아노 음색에는 다이내믹의 강렬한 대조마저 더해졌다. ‘50년대부터 그가 즐겨 연주했던 <포인시아나 Poinciana>는 이 시기에 이르러 환상적인 농담(濃淡)을 담아냈다. 그 시대의 재즈는 이미 록, 소울과 뒤섞이며 순수한 피아니즘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계속 진화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같은 시대의 오스카 피터슨, 빌 에번스와 같은 모습을 보인 소수의 연주자 중 한 명이었다(심지어 그는 에번스와 마찬가지로 일렉트릭 피아노를 겸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자말이 온전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던 것은 그가 여전히 진화를 멈추지 않고 있었던 ‘80년대부터였다. 60대의 나이에 들어섰던 ‘90년대에 그는 청년 시대의 경이로운 연주를 넘어선 거의 유일한 피아니스트였으며 주 무대를 프랑스로 옮겨 드레퓌스 레코드에서 녹음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한결 같이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매코이 타이너와 키스 재럿은 그들이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로 자말을 늘 첫 손에 꼽았으며 재키 테라송은 자말의 노선을 따라간 새로운 세대의 대표 주자였다. 그는 1997년에 국립 예술기금(NEA)이 선정한 재즈 마스터가 되었으며 2007년에는 프랑스 정정부로부터 문예공로훈장을 받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피아노에 앉을 때마다 내게는 아직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아울러 만년에 <보스턴 글로브>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남긴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어디서든 피아노 앞을 지나가게 되면 나는 여전히 그 건반을 두드리거나 연주하게 된다. 음악가에 대한 보상은 돈이 아니다. 그 보상은 연주의 절정에서 느끼게 되는 멋진,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다. 그것은 영적인 느낌이다.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은 늘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 느낌을 갖는 순간이야 말로 궁극의 자유일 것이다.”

이 말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 그의 많은 녹음들이 그 점을 말해주고 있으니까. [1996년 파리 실황 Live in Paris 1996](드레퓌스)에 실린 <가을 낙엽>에서 한 동안의 뱀프가 끝난 뒤 첫 두 소절을 연주하고 그 여백 사이에 자말이 탄성을 뱉었을 때 그것을 듣는 우리의 입에서도 똑같은 감탄사가 여지없이 흘러나오니까. 그것은 음악이 주는 궁극의 희열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그것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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