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 - 딕 파운드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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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
딕 파운드 외 지음 | 이동연 옮김 | 사람과책 | 2003년 10월 30일 출간 | 212P
한때 영국과 미국에서는 ‘쿨Cool’이라는 개념 없이는 그 어떤 문화 현상도 설명하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특히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쿨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 시절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부터 대학의 강의실에 이르기까지 ‘좋다’, ‘근사하다’, ‘패션이 멋지다’라는 의미로 쿨을 들먹였다. 하지만 이 단어가 단순하게 ‘좋다’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소문자 cool이 백포도주를 숙성하기에 좋은 온도를 가리킨다면, 대문자 Cool은 “공식적 가치에 진지하게 맞서는 대안적 가치의 집합개념”이기 때문이다.
딕 파운틴과 데이비드 로빈스의『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사람과 책,2003)은 20세기 중반부터 약 50년 동안 청년 문화의 핵을 이루었던 쿨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하고 있다. 결론을 앞질러 말하면, 서아프리카의 고대 문명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쿨은 대처가 영국 수상이 되고(1979),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1981)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망을 선고받았다.
많은 연구자들은 쿨이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대중문화에 의해 재창조된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 기원은 아프리카에 있다는 것을 지지한다. 예를 들어 미술사가인 로버트 패리스 톰프슨은 1979년과 1984년에 잇달아 낸 두 권의 저서에서, 서아프리카에 최초의 도시 국가를 건설했던 요루바와 이그보 문명의 핵심 가치였던 ‘이투투itutu’라는 개념이 쿨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이투투는 유머와 유희를 토대로 친화력 있고 정다운 성격, 싸움과 분쟁을 해소하는 능력, 관대하고 우아한 자질이다. 이투투는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보다는 내적인 인격에 더 가치를 두며 신성한 가치와 접선하려고 한다.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노예무역은 이투투를 미국에 옮겨 심었다. 미국으로 팔려간 아프리카 흑인들은 오늘날 쿨이라고 지칭되는 것과 똑같은 태도를 통해 영혼의 존엄성을 보호하려고 했다. 흑인들은 농장 주인의 가혹한 지배를 견뎌내기 위해 비밀스럽게 공유되는 그들만의 냉소와 방어 의식을 가다듬었다. “노예들은 백인 지주 앞에서 복종에 대한 희화화와 역설적 악역이라는 쿨한 가면을 씀으로써 그들이 느꼈던 모욕과 분노, 고된 육체적 처벌을 전복하려는 직설적인 감정을 감추었다.” 흑인은 백인의 인종차별과 박해로부터 자존심을 지키는 수단으로 비순응과 거리두기라는 쿨의 태도를 양식화하고 내면화했다.
쿨과 유사한 태도를 백인 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르세상스 시기 이탈리아 귀족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이다. ‘비난하다, 경멸하다’라는 어원을 가진 스프레차투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데 드는 노력을 노련하게 숨겨서 하나도 어렵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고상한 태도를 일컫는다. 자신의 외향적 성공을 우습게 여기는 이런 태도는 역으로 자신의 내면(자아)을 소중하게 여긴다. 훗날 스프레차투차는 영국의 귀족들에게 영향을 주어 나르시시즘과 냉담함, 위트와 쾌락주의가 혼합된 개성을 낳는다.
19세기에 태어난 낭만주의도 쿨과 유사하다. 이상 세계(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속악한 현실을 거부했던 낭만주의자들은 비순응과 거리두기라는 쿨의 핵심을 공유한다.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이런 특질은 1960~1970년대의 히피들에게 다시 구현되지만, 서구 사회 전체에 현대적 쿨의 주요 주제와 행동 양식의 씨앗을 뿌린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복종과 자기부정이란 19세기의 잔재를 파괴했고, 부르주아지와 기성세대에 대한 조롱과 공격을 감행했다. 히피 이전에 다다이스트가 있었고, 1960년대의 반문화가 있기 전에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아방가르드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젊은 세대에 의해 쿨의 씨앗이 뿌려졌으나, 30~40년이 지난 후에야 그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기간 동안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청년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쿨함의 상징중 하나로 인식되곤 했던 리바이스 데님 청바지.
1999년 3월에 세계 최대의 의류 브랜드이자 카우보이와 십대에게 청바지를 조달하던 샌프란시스코의 리바이스사가 미국 공장 절반을 휴업한다고 발표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판매부진(1990~1998년 리바이스사의 시장점유율은 반으로 줄었다)이지만, 정작 심각한 이유는 리바이스 청바지가 더 이상 쿨하지 않게 된 것이다. 리바이스의 쿨한 이미지는 푸른 천으로 직조된 청바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청바지가 노동자 계급과 연관되어 있는 의상이어서였다. 다시 말해 1950~1960년대 중산층 아이들에게 회색 플란넬이 아닌 푸른 데님은 부모세대에 대한 반역을 뜻했다.하지만 세월이 흘러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 입는 유니폼이 청바지가 되자 그 아랫세대는 청바지를 그냥 입지 않고 구멍을 뚫거나 찢어서 입는 것으로 저항했다.
리바이스 청바지의 사례는 쿨의 핵심이 철저히 세대론 적이라고 말해 준다.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쿨해 질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쿨의 역사는 곧 음악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음악은 세대 사이에 문화 투쟁이 벌어지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즈를 빼고 나면 미국에서 쿨이 형성되고 확산된 역사가 사라지고 만다. 재즈 뮤지션들은 백인 청중에게 뜨거운 음악을 선사했지만, 무대 밖에서는 쿨한 인생을 살았다(무대에서는 광대 행세를 한 루이 암스트롱이 그랬다). 1940년대에 출현한 비밥은 앞 세대와 완전히 절연하는 스타일을 선보였고, 마일스 데이비스가 1949년에 발표한 앨범 ≪쿨의 탄생Birth of the Cool≫은 비밥에 반기를 들면서 새로운 청중을 규합했다. 젊은 세대는 재즈(1950년대), 록(1960년대), 펑크(1970년대)를 영접하면서 “‘진짜’ 쿨한 것은 자신들만이 이해하는 순수하고 본질적인 어떤 것”이라고 믿었다.
쿨은 기성의 것에 비순응적인 태도이며 자기 자신은 물론 그 어떤 사회적 행동주의와도 거리를 둔다. 예를 들자면 1960년대 후반 미국의 반문화 참여자들은 체 게바라에 대해 열광했지만, 반역의 상징인 체의 개인성에 대한 열광이었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쿨에 침윤된 세대는 탈 정치적이고 개인적이 된 때문에 복지를 축소하고 경쟁을 권장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쿨은 경제적ㆍ사회적 자유방임주의 모두를 포용함으로써, 그리고 도덕주의나 ‘가족주의 가치관’이 아닌 정부의 감시와 간섭에 대한 극우파의 불신을 공유”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선택을 지지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앞 세대가 잃어버린 위반과 반항의 쿨 정신이 힙합문화에서 되살아나고 있다고 본다.
미국,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쿨함의 대명사격으로 등가를 이루곤 했던 남미의 사회주의 운동가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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