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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코이 타이너 (McCoy Ty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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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2.11 ~ 2020.3.6.)

추모기획

음악이 도달할 수 있는 감동은 어디까지인가

 

시대가 흘러, 트렌드가 달라지면서 이전보다 조명을 덜 받는 경우도 간혹 생깁니다. 아마도 피아니스트 매코이 타이너는 그런 쪽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젊은 재즈 팬들에게도 칙 코리아, 키스 재럿, 허비 행콕의 존재감은 크고 뚜렷합니다만, 상대적으로 매코이 타이너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명도는 그들에 비견될 만큼 높은데도 이에 상응하는 관심과 애정, 지지는 적다는 거죠. 이에 관해 평소 아쉬움을 갖고 있던 열혈 재즈 애호가이자 칼럼니스트 황덕호씨가 그의 타계에 맞춰 추모 글을 작성해 보내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의 외피는 늘 어디 한군데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바뀌어 나갑니다만, 그 속에 숨겨진 본질은 사실 일정하게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재즈사에 확고히 이름을 남긴 이 불세출의 거인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늘 자신의 진실된 소리를 표현하길 원했습니다. 그 점 때문에 그는 때론 시대에 적응을 하지 못한 것처럼 비춰집니다만, 매코이 타이너의 진가, 그의 음악에 담긴 핵심을 이해한다면 트렌드는 사실 별 의미가 없어지죠. 이 칼럼을 작성한 필자의 의도 또한 거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트렌드를 넘어선 그의 음악적 진가를 이해하고 헤아리는 것. 음악 팬의 입장에서 그것만큼 제대로 된 추모행위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문/편집부  사진/Half Note Rec.

 


 

우리 시간으로 지난 3월 7일, 피아니스트 매코이 타이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한 재즈 연주자와의 이별, 그 이상의 의미를 담은 소식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왔던 존 콜트레인 사중주단의 마지막 생존자가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는 전갈이었으며 동시에 다채롭게 펼쳐졌던 재즈 피아노의 여러 계보 중 하나의 출발점이었던 그가 이제 찬란했던 그의 불빛을 꺼뜨렸다는 비보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활동하던 시기, 재즈 피아노는 다양한 흐름 속에서 뛰어난 스타일리스트들이 서로 경쟁하며 각기 개성을 발휘하던 때였다. 매코이가 존 콜트레인 쿼텟을 떠나 밴드 리더로서 활동을 시작할 1960년대 후반, 재즈 피아노의 세계는 주류와 비주류, 정통파와 혁신파가 공존하는 백가쟁명의 시기였다. 버드 파월은 떠났지만 그의 후계자인 배리 해리스, 토미 플래내건이 계보를 잇고 있었고, 셀로니어스 멍크의 쇠락이 눈에 띄었지만 맬 왈드런이 역시 그를 계승하고 있었다. 오스카 피터슨은 여전히 건재했으며, 이제 대가의 반열에 오른 빌 에번스의 뒤를 이어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키스 재럿이 등장해 제각기 자기 노선을 만들고 가던 때였다.

 

1938년생인 매코이 타이너는 그의 나이, 활동시기 등으로 인해 그와 비슷한 연배인 행콕, 코리아, 재럿 등과 자주 비교되었다. 이들 모두가 당시 재즈 피아노의 새로운 스타일을 주도해 나갔기에 그런 비교는 자연스러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중에서 매코이 타이너는 나머지 세 명의 피아니스트와 전혀 다른 성격의 연주자였다.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를 거쳐 간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각기 자신만의 개성 속에서도 같은 밴드의 전임자였던 빌 에번스를 공통의 분모로 삼고 있었다면 매코이 타이너는 그 자신이 하나의 스타일을 탄생시킨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어떤 의견들은 매코이 타이너의 음악이 나머지 3인의 음악에 비해 정통적 혹은 보수적이었다는 평을 내놓기도 한다. 행콕과 코리아가 당대의 펑크(funk), 록 음악과 재즈를 결합시켰고 전기 건반악기를 비중 있게 다룬 점, 키스 재럿이 독보적인 즉흥 피아노 솔로 음악회로 재즈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것에 비해 매코이 타이너에게는 그런 면이 없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견은 피상적인 인상일 뿐이다.

 

타이너의 음악은 존 콜트레인의 유산을 계승했지만 그것은 그만의 독자적인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콜트레인이 ’60년대 중반 이후 프리재즈로 접어들었던 것과는 달리 타이너는 앨범 <지고의 사랑 A Love Supreme>을 출발점으로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한때 아프리카 민족주의적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즉흥연주의 가능성을 최대한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타이너와 같은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인물은 정통파, 전위파 그 어디에도 없었다. 비록 그의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따른 피아니스트를 꼽자면 조안 브래킨, 고(故) 멀그류 밀러 정도이겠지만 이렇게 소수의 추종자만이 남은 것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직계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세상을 떠난 돈 풀렌과 오늘날의 비제이 아이어도 타이너가 만들어 놓은 전통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들의 연주는 생전의 혹은 현재의 스타일과는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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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재즈 계보의 독자적인 출발점

 

비록 일렉트릭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그였지만(그는 ’70년대였음에도 일렉트릭 베이스마저도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다) 타이너는 색다른 편성으로 늘 독창적인 사운드를 추구했다. 그의 색소포니스트들은 모두 다양한 목관악기들을 다뤘고(제임스 스폴딩, 게리 바츠, 앤드류 화이트, 소니 포춘, 에이자 로렌스, 조 포드, 조지 애덤스), 금관악기 파트에는 프렌치 호른(밥 노던, 줄리어스 와킨스)과 튜바(하워드 존슨)를 필수적으로 사용했으며 혼 섹션과 리듬섹션으로 짜인 보편적인 재즈밴드에 현악주자들을 넣는가 하면(첼리스트 론 카터, 하피스트 앨리스 콜트레인, 바이올리니스트 마이클 화이트, 존 블레이크, 기타리스트 테드 던바, 얼 클루, 존 애버크롬비), 플루트(휴버트 로스)와 다양한 타악기(음툼므, 귈험 프랑코)를 사용하는 것은 타이너의 밴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피아노는 보비 허처슨의 바이브라폰과 여러 번의 앙상블을 녹음했고 일렉트릭 건반 대신에 하프시코드와 첼레스타를 연주했으며(’75년 앨범 <삼지창 Trident>), 빅밴드 녹음은 물론이고 현악 오케스트라(’76년 앨범 <바람과 함께 날다 Fly with The Wind> ), 합창단(’77년 앨범 <내면의 목소리 Inner Voices>)과 함께 녹음했는데 이렇게 다채로운 편성을 시도한 재즈 음악가는 정통파는 물론이고 그 어떤 진보적인 악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타이너가 재즈-록 퓨전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의 연주에 매료되었던 타이너는 ’82년 앨범 <전망 Looking Out> 에서 산타나를 초대해 ‘세뇨르 카를로스 Señor Carlos’를 녹음했는데(여기에는 스탠리 클라크의 현란한 일렉트릭 베이스 연주도 함께했다), 그럼에도 타이너는 이 곡에서마저도 어쿠스틱 피아노를 고집했다. 그 무렵 한 인터뷰에서 타이너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메이저) 음반사에서는 내가 일렉트릭 건반을 연주하길 종종 요구한다. 나도 그 악기들을 갖고 있으며 가끔 연주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비중을 높일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여전히 피아노에서 영감을 얻기 때문이다. 재즈는 늘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음반사들은 진화를 이야기하면서 재즈를 상업화하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보기 드문 진정한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가 발산하는 하나의 음, 그 음 하나로 음악의 결정적인 순간을 표현하려고 하는 피아니스트는 일렉트릭 건반악기가 등장한 이래로 좀처럼 보기 어려워졌다. 매코이 타이너와 비교되는 행콕, 코리아, 재럿 가운데 피아노에 대한 같은 철학을 갖고 있는 인물은 오로지 키스 재럿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타이너는 코리아와 재럿 모두를 존경했고 그래서 2000년 앨범 <재즈 루츠 Jazz Roots>에서 두 사람에게 모두 자신의 곡을 헌정했지만, 피아노라는 악기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사람은 그들 중에 타이너 그리고 재럿이었다. 두 사람의 음악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말이다.

 

“나는 여전히 피아노에서 영감을 얻는다.”

 

매코이 타이너는 1938년 12월 11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아프리카계 소년이 1940년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곧 재즈 음악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당시 이 도시의 재즈적 토양은 비옥했다. 매코이는 열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년 매코이의 피아노는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미용실 옆 방에 놓여있었고 그는 그곳에서 매일 열심히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피아노를 치고 있는 매코이의 모습을 누군가가 창문을 통해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근처에 살고 있던 명 피아니스트 버드 파월이었다고 훗날 매코이 타이너는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소년 매코이는 당장 뛰쳐나가 버드 파월을 안으로 초대해 피아노 연주를 부탁했고 몇 번에 걸친 그와의 만남은 소년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필라델피아의 그라노프 음악원에서 음악이론을 공부한 매코이는(이 음악원의 선배 가운데는 디지 길레스피와 존 콜트레인이 있다) 1957년부터 트럼펫 주자 캘 매시가 이끄는 빅밴드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당시 이 밴드의 베이스 주자는 훗날 콜트레인 쿼텟에서 함께 연주하게 되는 지미 개리슨이었고 드러머는 지미, 퍼시 형제의 동생인 앨버트 ‘투티’ 히스였다. 이 청소년 빅밴드에는 필라델피아 출신의 일급 연주자들이 객원으로 가끔 참여했는데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의 멤버였던 존 콜트레인을 소년 매코이가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만남을 통해 매코이는 존 콜트레인을 자신의 친형처럼 가깝게 느꼈으며 자신이 작곡한 블루스 넘버 ‘신앙인 The Believer’ 를 콜트레인에게 소개했다. 존 콜트레인은 ‘신앙인’ 을 1958년에 녹음했으며 이는 녹음으로 남게 된 매코이의 첫 작품이 되었다. 동시에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이슬람교로 개종해 평생을 살았던 매코이 타이너가 남긴 최초의 음악적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3 1963년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당시 매코이 타이너와 존 콜트레인.jpg

1963년 루디 반 겔더 스튜디오 녹음당시 두 사람의 모습

 

콜트레인과의 만남, 혼신의 연주를 체득하다.

 

역시 필라델피아 출신의 색소포니스트 베니 골슨은 트럼피터 아트 파머와 함께 그룹 ‘재즈텟’을 결성하자 피아니스트로 매코이를 낙점했는데 이 밴드에서의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일스 밴드를 나온 콜트레인이 자신의 사중주단을 결성하면서 피아노 자리를 매코이 타이너를 위해 마련했기 때문이다. 1960년, 매코이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앨범 <내가 좋아하는 것들 My Favorite Things> 에서부터 1965년 11월 23일에 녹음된 앨범 <명상 Meditations> 에 이르는 만 5년의 기간 동안 매코이 타이너가 콜트레인 밴드에서 체득한 것은 ‘음악에 혼신을 다하는 태도’였다. 마치 굉음을 쏟아내는 것 같은 콜트레인의 색소폰, 여기에 천둥처럼 울리는 지미 개리슨, 엘빈 존스의 베이스와 드럼 속에서 매코이 타이너의 피아노는 마치 사투를 벌이듯 소리를 내야 했다. 그래서 그의 왼손은 마치 망치처럼 건반을 내리치며 두터운 화성을 쌓고 그의 오른손은 한 음, 한 음, 강철처럼 단단한 음색의 아티큘레이션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의 피아노는 콜트레인의 색소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기초가 잘 닦인 정통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그래서 때때로 콜트레인이 녹음한 발라드 앨범, 보컬리스트 조니 하트먼과의 앨범에서 매코이 타이너가 들려주었던 정갈하고 부드러운 연주를 떠올린다면 이 밴드 안에서 매코이 타이너가 보여준 변모는 전례가 없을 정도다.

 

그 과정에서 매코이 타이너가 마음 속에 품게 된 것은 음악이 주는 감동의 극점이다. 그러니까 종종 2-3류 연주자들을 통해 술집에서 그저 그렇게 일상적으로 소비되던 재즈가 아니라 매코이 타이너가 기준으로 삼게 된 재즈는 인간이 음악을 통해 얻게 되는 가장 경이로운 경험,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콜트레인을 통해 얻었으며 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것, 자신의 표현이 되기 위해 평생을 진지하게 음악에 헌신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음악이 주류인지, 비주류인지 혹은 평론가들과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는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는 앙코르를 연주할 에너지마저도 결코 남기지 않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다. 지난 2000년 6월 LG 아트센터에서 그의 연주회를 본 재즈 팬이라면 그의 이러한 태도를 실감했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연주의 압도를 우린 좀처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매코이 타이너가 우리 곁을 떠났으므로.

 

글/ 황덕호

 

* 국내에선 오래 전부터 맥코이 타이너로 표기해 왔습니다만, 실제 발음표기상 겹쳐지는 두 개의 알파벳 C중 선행되는 C는 묵음이 되므로 원칙적으로 매코이가 더 정확한 표기입니다. 이에 본문에서는 매코이로 일괄 표기했으니 이 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관습적으로 오랫동안 맥코이로 써온 점도 있기 때문에 향후 어느 쪽으로든 정리가 되어야 할 부분이라는 점도 감안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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