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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k

팻 마티노 (Pat Martino) 추모 칼럼 - 육체적 한계와 고통, 그로 인한 기억상실 극복해낸 재즈기타 마에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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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팻 마티노 (Pat Martino) 1944.8 ~ 2021.11

 

육체적 한계와 고통, 그로 인한 기억상실

극복해낸 재즈기타 마에스트로

/재즈 기타리스트 정수욱, MMJAZZ 편집장 김희준   사진/Blue Note Rec. Pat Martino Homepage

 

지난 11177세의 일기로 타계하신 재즈 기타의 거장 팻 마티노는 웨스 몽고메리, 조지 벤슨등과 함께 재즈 기타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널리 인정받아왔으며, 특히 당시 기타리스트들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탁월한 연주자였습니다. 특유의 매끄러운 스윙감과 타이트한 피킹, 그리고 하드 밥 재즈 전통의 모던 재즈 라인들과 블루지한 주법들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평가받는데, 60년대 후반 하드 밥의 정점에서 재즈 기타의 중흥기를 이끈 뮤지션이 바로 그였죠. 기본적으로 그의 앨범들은 재즈 기타의 교과서적인 프레이즈들과 아이디어들이 담겨져 있는 걸로 유명합니다. 처음엔 오르간 트리오 같은 전형적인 소울, 하드 밥 사운드를 위주로 활동했지만, 커리어를 이어가며 70년대에는 월드뮤직과 퓨전, 프리 재즈 등의 다양한 재즈 스타일을 실험하기도 했습니다.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이미 뉴욕에서 연주 생활을 시작했고 22세에 발표한 그의 첫 앨범 <El Homre>(1967)에서 그가 연주한 ‘Just Friends’ 의 기타 솔로는 아직도 재즈 기타를 시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청 솔로중 하나로 전수되고 있죠. 하지만, 1978년 뇌동맥 혈관에 무척 희귀한 뇌동정맥기형이라는 선천적 질환이 발현되는 바람에 결국 1980년 수술을 해야 했으며, 수술이후 후유증으로 기타 연주를 포함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재즈 기타 커리어 정점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마치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복습하듯 기타를 새로 배우기 시작했고 1987년 다시 <The Return>으로 컴백, 한번도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한 재즈 레전드로서의 커리어를 무려 두 번씩이나 일궈낸, 희귀하기 그지없는 커리어를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출발부터 남달랐던 유년시절

비밥이 정점으로 다가가던 1944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그는 재즈 팬이셨던 아버지를 손에 재즈 클럽 등을 따라다니며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트럼펫을 배우고 싶어 했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12세 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빙 크로스비의 최애 기타리스트로 알려진 초창기 재즈 기타리스트 에디 랭(Eddie Lang) 에게 레슨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그의 첫 번째 음악선생님이었던 데스니 샌돌의 또 다른 제자인 존 콜트레인과도 인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초창기에는 코드-멜로디 플레잉과 테너 색소포니스트 스탠 게츠의 기타리스트로 유명했던 자니 스미스(Johnny Smith), 그리고 재즈 기타라면 그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웨스 몽고메리 등이 그의 재즈 유년기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다고 합니다. 재즈가 매우 강한 음악 문화적 로컬 거점이었던 필라델피아에서는 록이나 오르간 재즈 밴드들과 종종 연주했고, 그 당시 로이드 프라이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슬라이드 햄턴, 레드 할로웨이 등과 같은 무대에서 연주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팻 마티노의 생전 영상 인터뷰 등을 보다보면 그가 매우 깊고 점잖은 목소리로 흑인 어투로 얘기하는 걸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백인이 흑인 어투를 가장하는 건 상당부분 매우 어색하고 볼썽사납지만, 가끔 인종적 벽이나 차별이 없는 재즈 뮤지션들의 진정성을 이런 것들에서 느낄 때가 있기도 하죠). 어릴 때부터 흑인 원로 재즈 뮤지션들과 연주하며 자랐고 이미 15세 무렵 뉴욕 할렘에서 재즈 오르간 래전드인 잭 맥더프등과 연주하며, 일찌감치 어린나이에 진짜 재즈 뮤지션들과 연주 생활을 한 것도 나름 큰 영향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이때 팻 마티노의 부모님은 아직 미성년이던 그를 기타 레전드인 레스 폴에게 소개하고 그와 함께 지내게 합니다. 이 무렵 그는 레스 폴, 웨스 몽고메리, 그랜트 그린, 케니 버렐, 조지 벤슨 같은 연주자들과 만나며 자연스럽게 당시 가장 높은 재즈 기타의 수준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 직접 흡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생한 최상급 음악 레슨을 유년시절부터 보고 배운 셈이죠.

 

2 오르간 주자 잭 맥더프의 밴드에 참여한 만 스무살 약관의 팻 마티노.jpg

오르간 주자 잭 맥더프의 밴드에 참여한 만 스무살때의 젊은 팻 마티노

 

이렇게 10대중반 이후 급격한 성장을 보이며 재즈 신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팻 마티노는 20대 초반에 이미 완성된 연주력으로 선배 레전드 연주자들에게 시선을 끌기 시작했죠. 그와 동시에 60~70년대 당시 재즈 기타에서 서로 비슷한 입지와 지명도를 갖고 있던 조지 벤슨과 팻 마티노는 웨스 몽고메리에게서 이어받은 비슷한 연주적 성향도 함께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조지 벤슨은 조금 더 일찍 상업적인흑인 R&B, 팝 음악 방향으로 전환, 기수를 돌렸다면, 팻 마티노는 재즈적인 기조를 이후에도 바꾸지 않고, 전통과 혁신의 새로운 세대를 이끄는 기타리스트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새였죠. 70년대 이후 조지 벤슨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노래솜씨와 스무드 재즈의 감성으로 재즈기타 연주 외에 성공적인 R&B 뮤지션으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간 반면, 팻 마티노는 뉴욕의 첨단 월드 퓨전 음악을 본격적으로 선도할 참이었지만, 안타깝게 뇌건강문제로 인한 수술 후유증으로 예기치 못한 기억상실이 오면서 이후 10년간 긴 재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3뉴포트 재즈 페스티벌무대에 선 조지 벤슨과 팻 마티노 1973년.jpg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선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과 팻 마티노 1973년

 

3-1 재즈사에 가장 뛰어난 데뷔작중 하나로 기록될 명반 1967년도 녹음,발매작.jpg

 재즈사에 가장 뛰어난 데뷔작중 하나로 기록될 팻 마티노의 첫 앨범  1967년도 녹음, 발매작

 

 

일렉트릭 기타의 계보를 구성하는 첫 단초의 음악적인 지점으로, 처음에 블루스에선 티본 워커(T-Bone Walker)1910-1975, 재즈에는 찰리 크리스천(Charlie Christian)1916-1942을 일반적으로 많이 이야기 합니다. 물론, 엘모어 제임스, 로니 존슨 등의 동시대 다른 출중한 기타리스트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둘의 영향력과 음악성을 기점으로 시작한다면 다소 정리가 쉬워집니다. 블루스가 팝과 록의 대세로 흘러가면서 일렉트릭 기타는 다양한 진화를 가져왔지만, 재즈에선 1940년대 찰리 크리스천의 요절 이후, 1950년대에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는 재즈에서, 큰 방점조차 남기지 못하는 듯했었죠. 하지만 지미 스미스, 짐 홀, 웨스 몽고메리 같은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1960년대 재즈 기타를 다시 일렉트릭 재즈 기타의 중흥기로 세워 놓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웨스 몽고메리라는, 비밥의 창시자 중 하나였던 찰리 크리스천 이후 재즈 기타에서 가장 중요한 울트라 슈퍼스타의 출현, 그리고 몽고메리의 계보를 잇는 후배들이 서서히 그 흐름을 더 큰 파도로 만들어 나가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팻 마티노라고 보시면 별 무리가 없을 겁니다.

팻 마티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재즈 레이블 프레스티지와 계약하고 1967년부터 1972년까지 그의 성공적인 첫 번째 커리어에 해당하는 리더앨범들을 발매합니다. <El Hombre>1967는 그의 데뷔 리더 작으로 재즈 기타 오르간 트리오(기타-B3오르간-드럼)에 플룻과 퍼커션을 편성해 당시 하드 밥의 메인 스트림으로 자리 잡고 있던 ‘소울 재즈의 느낌을 가미한 트랙들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앨범인 <Strings!>1967에서는 대부분의 트랙들에서 퀸텟 구성으로 테너 색소폰이자 플룻의 조 패럴, 피아노의 시더 월튼 등과 함께 좀 더 스트라이트 어헤드스타일의 재즈 즉흥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앨범에 수록된 재즈 스탠더드 ‘Minority’ 같은 곡들에서 그의 초기 탁월한 테크닉과 피킹 스타일을 잘 들을 수 있죠. 한편 세 번째 앨범인 <East!>1968에서는 전형적인 하드 밥 사운드 속에 자신의 동양 문화에 대함 동경과 사상을 연주로 잠시 녹여내는, 이전보다 좀 더 자유로운 임프로비제이션들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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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시대의 영향을 받은 퓨전 성향의 수작 <Baiyina> 

 

당시의 시대적 반향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존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의 영향이었을 종교적 사상적 관심이 음악으로 본격적으로 옮겨간 앨범 <Baiyina(The Clear Evidence)> 1968은 자신 피킹 주법에 밴딩 등의 퓨전적인 아티큘레이션등을 사용하거나 하며, 표현을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인도 전통악기인 타블라, 탐보라와 같이 드론과 오스티나토 위에 인터플레이 하거나, 5,7,9 등의 다양한 변박과 10분이 넘는 트랙 길이등의 전개를 통해, 사이키델릭적인 실험을 선보이고 있기도 하죠. (이게 따져보면 마일스 데이비스의 <In a Silent Way>, <Bitches Brew> 보다도 좀 더 빠른 시기였습니다!!). , 12현 기타로 연주한 재즈 앨범 <Desperado>1970은 그가 성공적인 상업적 재즈 기타리스트라는 타이틀에 안주하지 않고 진보적인 작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팻 마티노는 젊은 시절부터 일찌감치 전통적인 하드 밥 연주와 더불어, 프리 재즈와 재즈 퓨전의 초기 이상적 조합 또한 적극 시도함으로서, 70년대 수많은 비슷한 음악들이 등장하는데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 앨범에 수록된 마지막 트랙 ‘Express’는 필자 개인적으로 이 시기 그의 전성기 기량과 음악성의 표본이자 앞으로 재즈가 가야할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음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2현 기타라는 연주의 난관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는 테크닉과 진공관 앰프를 드라이브 삼아 오버톤을 뽑아내고 있는 두꺼운 사운드와 각진 음정들의 가장 정교하게 연결하며 만들어낸 모던 재즈라인으로 가득 찬 하드 밥 기타, 에너지를 잃지 않는 일렉트릭 피아노와 리듬섹션들의 인터플레이는 팻 마티노의 다음 커리어를 더욱 크게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12현 기타는 흔히 포크나 록음악의 전유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코러스 효과를 가진 독특한 사운드와 복잡한 배음구조로 색다른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죠. 이 기타의 효과로 인해 ‘Pre-fusion’ 앨범을 매우 독특한 사운드 스케이프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가 수술 후 찾아온 기억 상실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타를 처음부터 훈련해 제2의 커리어를 펼쳐나간 과정을 들어보면, 중간에 이런 커리어 단절이 없었어도 아마 이런 탐미적이고 창의적인 방향을 유지했을 거란 강한 추측을 하게 됩니다.

이후 1970년대를 넘어 오면서 앨범 <Conciousness>Muse/1974, <Joyous Lake>Warner Bros/1976, <Starbright>WarnerBros/1976, <We’ll Be Together Again>Muse/1976, <Exit> Muse/1977등을 발매하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앨범 <Joyous Lake>는 당시 그를 퓨전의 새로운 기수로 만들어 놓은 숨겨진 명반이기도 합니다. 많은 뉴욕의 90년대 재즈 기타리스트들, 하이럼 블럭, 척 로엡, 웨인 크란츠 같은 이들은 이 앨범 <Joyous Lake>를 자신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앨범으로 꼽은 바 있죠.

 

 

5-1 자신의 은사인 레스 폴과 함께 한 팻 마티노 1997년 [All Sides Now] 앨범작업중.jpg

 자신의 은사인 레스 폴과 함께 한 팻 마티노 1997년 [All Sides Now] 앨범작업중

 

극적인 재기, 새롭게 맞이한 음악인생

선천적인 뇌혈관 문제로 인한 수술 후 생긴 기억 상실로 기타라는 악기를 연주했던 기억조차 사라지면서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하나씩 더듬어는 과정을 거쳐 무려 10년간 재활과 기타 훈련으로 위대한 재즈 기타리스트로 다시 돌아오는 그의 인생극장은 다수의 다큐멘터리와 리포트가 만들어 지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었죠. 1987년 앨범 <The Return>으로 돌아온 그는, 역경을 넘어선 진정한 컴백의 두 번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과거 성공과 그 스타일을 되찾으려는 시도들도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 1996년 블루노트에서 발매한 이색적인 앨범 <All Sides Now> 에서 보여준 다양한 음악들은 그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재즈 기타 레전드임을 명확하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앨범은 다양한 선후배 게스트들이 함께 팻 마티노와 연주하고 있는데, 찰리 헌터, 턱 앙드레스, 레스 폴, 마이크 스턴, 그리고 마이클 헤지스와 조 새트리아니까지 각지 다른 장르와 스타일의 기타리스트들과 재미난 호흡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보컬리스트 카산드라 윌슨과 함께한 듀엣으로 편곡한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에서 그의 따듯하고 둥근 기타 톤과 특유의 코드 보이싱 편곡은 90년대 재즈의 한 단면을 아름답게 들려주는 트랙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2000년대 초반까지 블루 노트와 총 5장의 앨범을 더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가게 되며 이후 블루노트를 떠나 하이노트 레이블과 함께 작업하면서 2017년까지 작품 활동을 꾸준하고도 건실하게 지속해나가며 대가다운 모습을 유지해나갑니다.

일반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한 체질을 타고났기에 크고 작은 병마를 계속 겪어야 했으며 남들처럼 활동해나가기가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는 강한 노력과 재즈에의 학구적인 접근은 평생 동안 계속 이어져나갔으며 새로운 트렌드와 스타일이 들어선 2000년대에 와서도 그가 여전히 재즈 기타계의 중요한 인물임을 계속해서 증명해왔습니다. ‘60년대 재즈 기타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 그의 노력과 영향은 중간에 단절된 커리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재즈 기타에서 그의 실제 음악적 가치보다 다소 평가절하 되거나 지명도에 있어 축소된 측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지한 음악적 접근이 담겨진 여러 종류의 레코딩과 이론들은 시대적 흐름, 트렌드를 넘어서 그의 비범함과 위대함을 증명하는 자료로 우리 곁에 계속 남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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