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마호가니(Kevin Mahogany) 추모 칼럼 - 재즈 보컬의 모든 것 체득했던 천천후 가수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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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케빈 마호가니 (Kevin Mahogany) 1958.7. ~2017.12.
재즈사에 보기드문 풍요로운 재능 갖추었던 남성 재즈보컬리스트
‘So Long, All Round Jazz Singer’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1월 16일은 케빈 마호가니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에서 하루가 모자란 날이다. 아마도 이 글이 지면에 공개가 될 때면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을 것이다. 59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픔에서 이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흘렀다고 본다. 그래서 이 글은 그의 타계 후에 문뜩문뜩 들었던 몇 가지 생각들을 조금은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고인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이틀 후였던 2017년 12월 19일, 나는 SNS를 통해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는 쓰던 글을 멈춰야만 했다. 그때 난 당시로부터 대략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존 헨드릭스의 추모 기사를 쓰고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재즈 음악가들의 부음기사를 자주 쓰게 되지만 이러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슬픔과 함께 미묘한 감정이 몰려왔다. 이해할 것이다. 두 사람은 음악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생전에도 함께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으니까. 케빈은 존의 보컬리즈 창법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케빈의 부재는 그보다 더 큰 상실을 재즈 팬들에게 안겼다. 케빈은 2005년에 헌정앨범 <자니 하트먼에게 To Johnny Hartman>를 발표했는데 그것은 케빈이었기에 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자니 하트먼의 풍성하고도 부드러운 바리톤 목소리를 재현할만한 발라드 재즈 가수를 그를 제외하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헨드릭스가 그렇듯이, 자니 하트먼 역시 케빈의 음악을 형성하는 몇 개의 뿌리 중 하나였다. 그의 음악과 노래는 훨씬 더 다채롭고 폭넓은 것이었다. 그는 블루스와 발라드, 스캣, 보컬리즈 등 재즈 싱잉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21세기의 거의 유일한 남성 보컬리스트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21세기의 빈곤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케빈 마호가니가 지녔던 재능의 희소성이었다. 재즈 역사상 그러한 면모를 갖춘 보컬리스트는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래서 케빈 마호가니는 빌리 엑스타인(1914~1993), 조 윌리엄스(1918~1999), 멜 토메(1925~1999)의 희소한 계보를 잇는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블루스, 발라드, 비밥 스캣 모두를 그들의 목소리로 떠올려 보라. 그 노래들은 진품이고 명품이었다. 케빈의 노래 역시 마찬가지였다. 21세기에 그러한 존재는 그가 유일했다(심지어 그는 보컬리즈까지 구사하지 않았나!). 이러한 다재다능함이 엑스타인, 윌리엄스, 토메가 그랬던 것처럼 케빈에게 선명한(대중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 방해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재즈 팬들이라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재즈의 황홀한 만화경을 만났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90년대 초 그의 첫 음반 <더블 레인보우 Double Rainbow>(엔자/ ’93년)가 국내 지구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을 때 그의 경이로운 목소리와 기량에 놀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부른 ‘All Blues’는, 이 마일스의 곡에 가사를 붙인 오스카 브라운 주니어도 상상하지 못했던 신비감을 이 곡 속에서 완벽하게 이끌어 냈다. 이 음반에 실린 ‘Confirmation’과 세 번째 앨범 <You Got What it Takes> (엔자/ ’95년)에 실린 ‘Yardbird Suite’에서 그의 경이로운 보컬리즈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가 이 명곡들의 주인인 찰리 파커와 동향(同鄕)의 캔자스시티 출신이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후, 역시 같은 고향 출신의 영화감독 로버트 알트먼의 <캔자스시티 Kansas City>(’96년)에서 케빈은 역시 동향의 블루스 샤우터 ‘빅’ 조 터너 역을 맡아, 바 뒤에서(빅 조 터너는 바텐더였다) ‘내 여자를 두고 왔네 I Left My Baby’를 우렁차게 불렀을 때 비로소 나는 그가 이 비옥한 음악의 고장에서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는 찰리 파커, 벤 웹스터와 같은 캔자스시티의 색소폰의 전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케빈의 발라드는 벤의 색소폰 연주와 일맥상통 한다) 실제로 그는 이 지역의 저명한 색소폰 교사 아마드 알라딘으로부터 색소폰을 배웠다. 캔자스 주 베이커 대학에서 영문학과 음악을 공부한 그는 ’90년대 초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인생을 결심하고 뉴욕으로 진출해 엘빈 존스 재즈 머신, 레이 브라운 트리오와 함께 무대에 서면서 일약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는 독일의 엔자 레코드와 계약한 뒤(당시 엘빈 존스는 이 레이블과 녹음을 남기고 있었다) ’93년부터 ’95년까지 석 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Kansas Ciy> 에 빅 조 터너 역을 맡았던 케빈 마호가니.
’90년대 중반 재즈의 기세는 등등했고 그러한 가운데 케빈은 ’90년대 새로운 메인스트림 재즈의 주역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재즈에 꽤나 적극적이었던 메이저 음반사 워너브라더스는 케니 가렛, 조슈아 레드먼, 브래드 멜다우 등과 함께 케빈 마호가니를 선택했다. 워너 시절 케빈 마호가니의 앨범들은 확실히 프로듀서 맷 피어슨의 기획 의도가 많이 반영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케빈의 매력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풍성한 바리톤과 테너를 겸비한 음역대의 목소리와 곡에 따라 적응하는 완벽한 기교는 변함없이 빛을 발휘했다.
같은 시기에 버브와 임펄스, 블루노트등 라이벌 음반사들은 다이애나 크롤(임펄스, 버브), 카산드라 윌슨, 다이앤 리브스, 커트 엘링(이상 블루노트) 등을 새로운 스타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케빈은 그들은 물론이고 기존의 베테랑 재즈 가수들과 경쟁하며 자신의 입지를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케빈은 1996년부터 ’98년까지 워너에서 단 석 장의 음반만을 발표하고 이 음반사를 떠나게 된다.
이후에도 그는 다시 엔자, 텔락 레코드를 거쳐 2000년대 초에는 자신의 레이블 마호가니 재즈를 설립하면서 계속 고군분투했다. 그에게 안정적인 음반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음악 자체가 멈췄던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들어 보스턴 버클리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던 그는 마이애미의 플로리다 국제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워너 레이블을 떠난 이후 그의 생애 18년 동안 그의 음반이 불과 다섯 장에서 멈췄다는 사실은 그의 팬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이 탁월한 보컬리스트를 놔두고 본상은 고사하고 단 한 번도 후보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않은 ‘권위의 그래미’는 본질적으로 상이란 무엇인지, 평론이란 무엇인지, 재즈란 어떤 음악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보다 훨씬 뒤늦게 데뷔했으면서도, 그리고 케빈에 비해서는 너무도 천편일률적으로 노래하는 그레고리 포터가 이미 두 번의 그래미를 수상한 것을 보면 세상은 그냥 부조리할 뿐이다. 어쩌겠는가. 세상은 늘 이렇게 시시한 것을. 그래서 뒤집어 생각한다면 케빈과 같은 놀라운 존재가 우리 시대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경이로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음반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다는 이 사실. 지금 난 그가 부른 ‘파커의 우울 Parker’s Mood’를 듣고 있다. “안녕, 여러분. 시간이 됐고, 난 떠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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