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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k

블루노트 레이블 설립 80주년 기념 칼럼 '알프레드 라이언과 프랜시스 울프' (Alfred Lion & Francis Wolff)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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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Note 80th Anniversary

알프레드 라이언과 프랜시스 울프

 

’블루노트 설립 80주년에 부쳐 : 어느 사자와 늑대를 위하여‘

 

 

1 블루노트 레이블의 두 설립자 알프레드 라이언과 프랜시스 울프 (좌로부터).jpg

블루노트 레이블의 두 설립자 알프레드 라이언과 프랜시스 울프 (좌로부터)

 

삶을 바친 두 거인 위해 '비타협적인 음악‘


재즈를 대표하는 주요 레이블 중에서도 블루 노트는 재즈시장이 일천한 국내에서도 확실히 각별한 면이 있습니다. 올해로 80년이 되었다는 숫자상의 의미가 함께 더해지며 다큐멘터리 영화와 관련 도서까지 국내에 버젓이 소개되고 나서 한층 더 폭넓은 인지도를 얻게 된 것 같아요. 심지어 영화의 경우 8월 중순에 개봉되어 10월초까지 상영되었으며, 지금까지 약 1만명 정도가 관람하였다고 합니다. 조그마한 국내재즈시장을 고려한다면 반갑고도 아주 대단한 성과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레이블의 기본적이며 본질적인 부분이 무엇인지, 또 어떠한 역사를 거쳐 왔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조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명의 ‘열혈 재즈애호가’에 의해 설립된 이 ‘독립레이블’이 애초 시도하고 추구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설립취지, 철학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지되어오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조그만 독립레이블이 100년에 가까운 모진 세월을 버티며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좀 더 제대로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껴, 90년대 중반부터 재즈관련 글들을 써오시며 활동해오신 황덕호 필자와 함께 이 칼럼을 준비해봤습니다. 글이 짧지는 않습니다만, 꼭 한번 정독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문/편집부

본문/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블루노트 레코드의 창립 80주년이었던 2019년이 어느덧 한 달 남짓 남았다. 그렇다. 재즈계에서, 특히 국내 재즈계에서 2019년은 블루노트 레코드의 80주년이었다. 그러니까 2019년은 우리에게 허비 니컬스, 냇 ‘킹’ 콜, 레니 트리스타노, 조지 시어링, 애니타 오데이와 같은 재즈 명인의 탄생 100주년이 아니라 한 음반사의 창립 80주년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블루노트 레코드의 독자적인 사운드를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의 탄생 100주년마저도, 자신의 녹음을 절대 다수 제공한 이 음반사의 80주년 앞에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실정이다. 블루노트 레코드의 80주년을 그토록 대서특필 하는 국내 재즈저널이 아트 블레이키를 위해 그 절반의 기사만이라도 써주었으면 좋겠으나 나는 그런 기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이는 재즈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이름은 도이치그라모폰의 이름 아래서 가려져 있을까? 슈프림스,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의 명성은 모타운 레코드의 이름을 빌려야만 가능한 것인가? 그런데도 블루노트 레코드만은 거의 모든 재즈 음악인들의 이름을 압도한다. 재즈란 음악이 그 음악을 만든 음악가에 의해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음반사의 이름으로, 그 회사의 로고로 상징되는 것이다. 그나마 사람들이 블루노트의 명성 때문에 재즈를 조금 더 듣는다면 그 현실에 재즈 음악인들은 고마워해야 할까, 씁쓸해야만 할까(더욱 심각한 상황을 지적하자면 아직도 우리에게 재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음악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현상은 블루노트 레코드의 특별한 가치를 말해준다. 사실 이 음반사는 그러한 찬사를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블루노트 레코드는 도이치그라모폰 혹은 모타운 레코드처럼 수익을 낼 수 있는 커다란 시장 안에 존재했던 음반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음반사는 재즈라는, 지극히 작은 시장의 음악을 대상으로 음반을 제작했으며 그럼에도 완벽함을 위한 실험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최고의 재즈’를 위해서 파산을 향해 숙명적으로 돌진했던 음반사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음반사는 그 명성으로 죽지 않고 부활해서 올해 여든 살을 맞이하며 우리 앞에 살아있지 않은가.

 

3 색소포니스트 행크 모블리와 함께 악보를 보며 이야기하는 알프레드 라이언  _1960년도.jpg

색소포니스트 행크 모블리와 함께 악보를 보며 이야기하는 알프레드 라이언  _1960년도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올해 국내에서는 블루노트 레코드에 관한 특별한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400페이지의 분량, 호화장정의 하드커버, 수백 장의 사진과 함께 블루노토의 일대기를 담은 리처드 하버스의 [블루노트: 타협하지 않는 음악](류희성 옮김)이 우리 글로 옮겨졌고, 블루노트 레코드에 관한 상영시간 9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블루노트 레코드>(소피 후버 감독)가 전문 영화제에서뿐만이 아니라 일반 극장에서도 개봉된 것이다. 블루노트가 아니라 다른 재즈 음반사에 관한 도서 혹은 영화가 이렇게 국내에서 소개될 수 있는 가능성은 ECM을 제외하면 결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쉽게 잊게 되는 것은 블루노트가 매우 작고 영세한 독립 음반사였다는 점이다. 1979년부터 6년 간 잠들어 있던 이 음반사를 1985년부터 부활시켰던 브루스 런드벌은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던 1957년에 이미 블루노트 레코드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10대 때부터 열혈 재즈광이었던 브루스는 블루노트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하며 그 ‘전설’을 가까운 곳에서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만난 블루노트의 설립자 알프레드 라이언은 강한 독일어 억양이었지만 정중한 말투로 청년 브루스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프랭크와 나 뿐입니다. 우린 직원이 없어요. 연수생을 뽑을 여유도 없지요.” - 인터뷰는 단 5분 만에 끝났다.

 

이것은 알프레드의 엄살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1938년 나치의 위협을 피해 뉴욕으로 건너 온 유태계 독일 청년 알프레드와 이듬해에 역시 뉴욕에 도착한 동향(同鄕)의 사진 전공자이자 그의 친구인 조력자 프랜시스 울프는 오로지 둘이서 블루노트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그 방침은 그들이 블루노트를 리버티 레코드에 매각하게 되는 1965년까지 26년 동안 변함없이 계속됐다.

1960년 도날드 버드의 앨범 작업을 함께 하고 있는 엔지니어 루디 반 겔더와 프로듀서 알프레드 라이언.jpg

1960년 도날드 버드의 앨범 작업을 함께 하고 있는 엔지니어 루디 반 겔더와 프로듀서 알프레드 라이언

 

사실, 음반 제작에서부터 홍보, 영업까지 모든 일들을 한, 두 사람이 도맡아 하는 모습은 당시 미국 독립 음반사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블루노트의 특별함은 당시 그의 경쟁사였던 다른 음반사들, 예를 들어 버브(1946년 출범), 애틀랜틱(1947), 체스(1950), 엠아시(1954), 임펄스(1960) 등과 비교해보면 더 분명해진다.

 

우선 1950~’60년대 모던재즈 시대 블루노트와 함께 각축을 벌였던 버브, 엠아시, 임펄스와 같은 재즈 전문 음반사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블루노트와 같은 완전한 독립 음반사가 아니었다. 버브 레코드의 경우 1946년 프로듀서 노먼 그랜즈가 대형음반사인 머큐리 레코드의 투자를 받아 클레프란 이름의 전문 재즈 레이블로 시작됐던 것이 그 출발이었다. 출발부터가 블루노트와는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1954년 머큐리 레코드가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재즈 전문 음반사인 엠아시를 시작하자 노먼 그랜즈는 클레프 레코드의 카탈로그를 모두 인수해서 1956년 독립 음반사 버브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독립 음반사 버브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4년 뒤 그랜즈는 영화사가 운영하는 MGM 레코드에 버브를 매각했고 이후 버브는 그 이후부터 오늘까지 큰 규모의 자본 아래서 운영되어 왔다.

 

임펄스 레코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음반사는 “재즈의 새로운 물결”을 기치로 내걸고 과감하게 아방가르드 재즈에도 적극적인 투자를 보였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투자가 가능했던 것은 그의 모회사가 대형 음반사 ABC-파라마운트 레코드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버브와 임펄스에서 제작되던 빅밴드 편성의 음반을 블루노트가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블루노트가 녹음하기에 빅밴드는 너무도 많은 제작비가 드는 편성이었다. 그럼에도 블루노트가 만든 소편성 밴드의 음반들은 버브, 임펄스의 대편성 음반들에 대적하고도 남음이 있는 훌륭한 음반들이었다.

 

애틀랜틱, 체스 레코드와 비교하더라도 블루노트의 여건은 어려웠다. 그 여건은 블루노트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었다. 애틀랜틱과 체스는 재즈 외에도 기본적으로 블루스와 R&B 등 다른 흑인음악을 폭넓게 제작하는 음반사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의 이윤과 성장은 재즈가 아닌 보다 상업적인 다른 음악을 통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블루노트는 달랐다. 알프레드와 프랭크는 재즈 ‘순수주의자들’이었다. 열악한 음반 판매 속에서도 이들은 다른 음악에 눈을 돌리는 것을 꿈조차 꾸지 않았다.

 

여기에서 비로소 블루노트를 둘러싼 의문 하나가 풀리게 된다. 셀로니어스 멍크,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소니 롤린스. 이들은 재즈역사를 만든 거장들이고 모두 블루노트 레코드에서 음반들을 녹음했다. 그리고 영화 <블루노트 레코드> 역시 (소니 롤린스를 제외하면) 이들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하지만 재즈 팬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이들은 블루노트에서 많은 녹음을 남기지 않았다. LP를 기준으로 멍크와 마일스는 각기 두 장만을 남겼고 롤린스는 다섯 장에 불과했다. 심지어 콜트레인의 블루노트 녹음은 딱 한 장이다. 가장 위대한 음악인들이 가장 위대한 음반사에서 소량의 음반만을 녹음했다는 기이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 마디로 말해 블루노트는 신인시절 이들의 기량을 일찍이 알아봤지만 일급의 재즈 연주자가 된 이후로는 이들과 녹음할 수 없었던 작은 음반사였다’는 점이다. 마일스와 멍크는 컬럼비아로 갔고, 콜트레인은 애틀랜타를 거쳐 임펄스로, 롤린스는 RCA-빅터를 거쳐 임펄스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블루노트가 감내해야 할 현실이었다.

 

알프레드 라이언과 프랜시스 올프 그리고 테너 색소포니스트 덱스터 고든이 함께 한 사진 _ 1962년.jpg

알프레드 라이언과 프랜시스 올프 그리고 테너 색소포니스트 덱스터 고든이 함께 한 사진 _ 1962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량으로 남긴 블루노트에서의 녹음들이 특별한 걸작이었다는 점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이들이 블루노트에서 함께 녹음한 밴드들은 당시 그들의 정규 밴드가 대부분 아니었다(정규밴드를 결성하기 이전이었다). 정규밴드를 이끌면서 블루노트와 계약했던 아트 블레이키와 호러스 실버, 케니 도햄 등을 제외하면 블루노트 레코드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그들의 ‘오리지널’ 작품들을 스튜디오 임시 밴드들과 녹음한 어느 밴드의 사이드 맨들이었다. 프레디 허버드, 리 모건, 조니 그리핀(이상 아트 블레이키의 재즈 메신저스), 커티스 풀러(아트 파머-베니 골슨 재즈텟 혹은 재즈 메신저스), 블루 미첼(호러스 실버 퀸텟), 행크 모블리(재즈 메신저스 또는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웨인 쇼터, 허비 핸콕, 폴 체임버스, 토니 윌리엄스(이상 마일스 퀸텟) 등 당시 블루노트 레코드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밴드 리더가 아닌 사이드맨이었다. 이들의 앨범이 걸작이 되고 그 앨범에 담긴 곡들이 재즈 스탠더드 넘버가 되었다는 점은 지금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블루노트의 기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로지 블루노트에게서만 나타났다. 그것은 2~3일에 걸친 리허설에 대해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오리지널 넘버와 앨범 콘셉트에 대해 아티스트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완벽한 녹음을 위해 수차례의 테이크를 마다하지 않았던(<블루노트 레코드>에는 이 때문에 벌어진 블레이키와 라이언의 격한 언쟁이 등장한다) 블루노트 고집의 산물이었다. 블루노트 역사의 첫 26년은 이렇듯 우직한 가내수공업 방식을 통해 만들어 졌다.

 

이러한 제작방식이 블루노트를 인수한 이후의 경영진들에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다. 이윤이 아니라 오로지 훌륭한 재즈,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재즈의 “비타협적인 표현”(이 문구는 1939년 5월에 발간된 블루노트 레코드의 선전 책자에 등장한다)을 추구해 온 알프레드와 프랭크에게 새 음반이 얼마나 팔릴 것이며, 어떻게 홍보할 계획이냐는 새로운 경영진들의 닦달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매각 이후 알프레드와 프랭크가 ‘자신들이 세운 집’에서 겪었던 쓰라린 경험은 철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소외’ 그 자체였다. ’67년까지 그곳에서 일한 알프레드는 이후 블루노트와 일체의 연락을 끊고 은둔했으며 ’70년까지 남아서 일 한 프랭크는 암과 투병하다가 이듬해에 수술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겪었던 치명적인 상처들은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블루노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자본이었다. 동시에 블루노트를 다시 소환한 것 역시 자본이었다. EMI 산하에서 블루노트의 시동을 다시 건 브루스 런드벌은 당시의 블루노트와 과거의 블루노트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제 생애를 2년 남긴 알프레드 라이언을 삼고초려 끝에 가까스로 재발족 음악회의 무대 위에 세웠다(알프레드는 이 무대 위에서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65년 매각을 전후로 블루노트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되었다는 점은 결코 잊혀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점이다. 왜냐하면 두 회사는 궁극적인 지향점에서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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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 [타협하지 않은 음악 ; 블루노트]  내지에 수록된 '85년 블루노트 리런칭 당시의 사진

 

과거의 기준으로 현재를 비판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하지만 같은 블루노트란 이름을 갖고 있고, 같은 로고가 붙은 음반이라고 해서 같은 지향점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 역시 아이 같은 순진한 생각이다. 두 마리의 맹수(라이언과 울프)가 블루노트를 이끌던 시절 그들의 목표는 재즈의 “비타협적인 표현”이었지만 그 맹수들을 쫓아낸 자본이 블루노트라는 상표를 살리기 위해 선택한 것은 과거의 기준과는 맞지 않는 노라 존스, 그레고리 포터라는 ‘타협의 음악’이었다. 어쩌겠는가. 블루노트의 주인과 시대가 바뀐 것을.

 

1985년 블루노트 재출범을 위해 공연했던 당시 백스테이지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 맨 아래 앉아있는 인물이 알프레드 라이언이다..jpg

1985년 블루노트 재출범을 위해 공연했던 당시 백스테이지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 맨 아래 앉아있는 인물이 알프레드 라이언이다.

 

그러므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블루노트의 새 주인들이 과거의 전설들을 소환하면서 그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말하며 이윤을 추구하는 풍경은 솔직히 내게 그다지 편하지 않다. 아티스트와 음악은 실종 된 채 오로지 유명한 브랜드와 로고만이 횡행하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 나는 10년 뒤에 또 다시 다가 올 블루노트 90주년이 두려워 진다. 오히려 음반의 사멸시대에도 다소 덜 알려진 연주자들을 통해 진정한 재즈를 녹음하려는 다른 독립 음반사들에게서 과거 블루노트의 정신과 맛을 불현 듯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 “비타협적인 표현”이야말로 늘 그렇듯이 진정한 재즈이기 때문이다. 재즈란 그런 음악이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된 영화 블루노트 비욘드 더 노트의 포스터.jpg

작년 성황리에 개봉되었던 블루노트 레이블 다큐멘터리 영화 [Beyond the Notes]   

 

이 칼럼은 2019년 MMJAZZ 10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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