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이 헤인스(Roy Haynes) 추모 칼럼 - 70년 역사 관통한 전율의 드러밍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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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비밥 시대부터 21세기 첨단 재즈까지 아우른 명드러머
로이 헤인스 Roy Haynes 1925. 3 ~2024. 11
70년 역사 관통한 전율의 드러밍
1953년 9월 13일 일요일 초저녁, 당시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에 있었던 남루한 재즈클럽 오픈도어에서 사진작가 밥 페어런트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찰리 파커, 텔로니어스 멍크, 찰스 밍거스 그리고 로이 헤인스가 한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는 귀한 장면을 담고 있다. 재즈 저널리스트 피터 퍼시니는 이 한 장의 사진을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진’이라고 평한 바 있다.
이 사진을 자신의 집에 걸어 놓았던 파커의 딸, 킴 파커가 “나는 유령과 함께 살고 있어요”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모두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버드는 올해로 70년 전에, 밍거스는 46년 전에 그리고 멍크는 43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
하지만 드러머 로이 헤인스만은 예외였다. 먼저 떠난 그들보다 평균적으로 약 반세기를 더 산 헤인스는 바로 작년 11월 12일 뉴욕주 나소 카운티에서 눈을 감았고 타계한 지 약 4개월 만인 올해 3월 23일에 100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그는 전설의 유령들과 함께했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하지만 99년이라는 긴 수명이 로이 헤인스의 가치를 대신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명으로 이야기하자면 관록의 바이브 주자 테리 깁스와 선 라 아케스트라의 마셜 앨런은 올해 101살로 생존해 있으며 앞으로 그러한 연주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인스가 연주 활동 속에서 이룩해 놓은 역사적 기록들은 인간 생명의 연장으로 그 빛을 잃을 성질이 아니다. 레스터 영을 시작으로 찰리 파커, 세라 본을 거쳐 칙 코리아, 팻 메시니까지 그가 참여했던 밴드들의 이름은 재즈 역사의 중심을 관통한다. 그것은 시간의 길이 이상으로 중요한 부분이며 이 점에 있어서 헤인스와 견줄 수 있는 재즈 드러머는 단언컨대 지금까지 없다. 1994년 로이 헤인스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1940년대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연주했으며 ’90년대에 와서는 팻 메시니와 함께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나의 위치를 음악적으로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봅니다.”
좌로부터) 찰스 밍거스, 로이 헤인스, 텔로니어스 멍크, 찰리 파커 1953년 재즈클럽 오픈도어
전설의 유령들과 함께했던 살아있는 전설
로이는 미국 보스턴에서 흑인 문화의 중심지로 꼽히는 록스버리 타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합창단원이자 오르간 주자였고 4형제 중 맏형 더글러스는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블랜치 캘로웨이(그녀는 유명한 캡 캘로웨이의 누나였다)가 이끌던 빅밴드 조이 보이스에서 활동 중인 연주자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로이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배웠다. 맨 처음 그는 바이올린을 익혔는데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면서 조 존스의 연주에 빠져 드럼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10대 때부터 드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로이는 이미 고등학교 때 보스턴을 방문한 유명 밴드들이 드러머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그 자리를 메워주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945년 루이 암스트롱의 전속 빅밴드를 이끌고 있던 루이스 러셀이 새로운 드러머를 찾고 있자 그의 밴드에서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던 찰스 홈스는 고향에서 눈여겨보던 로이를 추천했고(홈스는 원래 보스턴 시립 교향악단의 수석 오보에 주자였다) 당시 스무 살의 로이는 향후 70여 년간 쉼 없이 이어질 연주 활동을 위해 뉴욕행 기차에 올랐다.
뉴욕에 갓 진출한 로이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는 루이스 러셀 오케스트라 이후 레스터 영(1947~’49년), 찰리 파커(1949~’52년), 버드 파월(1953년), 세라 본(1953~’58년), 텔로니어스 멍크(1958년), 존 콜트레인(1961~’63년)의 밴드에서 경력을 이어갔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레코딩 세션으로부터 일 순위로 연락을 받는 최상급 드러머였다. 194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그가 참여한 앨범 중에서 몇 장을 골라보면 이렇다.
[경이로운 버드 파월 1집 Amazing Bud Powell Vol.1](1949년), 찰리 파커의 [국경의 남쪽 South of the Border](1951년), [세라 본 Sarah Vaughan](1955년), 멍크의 [텔로니어스 인 액션 Thelonious in Action], [소니 롤린스와 빅 브라스 Sonny Rollins & the Big Brass] (이상 1958년), [부커 리틀 Booker Little], [스티브 레이시의 스트레이트 혼 The Straight Horn of Steve Lacy], [위대한 카이와 제이제이 The Great Kai & J. J.], 에릭 돌피의 [저기 바깥에 Out There], 레이 찰스의 [천재+소울=재즈 Genius+Soul=Jazz], 에타 존스의 [낯선 사람에게 가지 마세요 Don’t Go To Strangers](이상 1960년), 스탠 게츠의 [포커스 Focus] (1961년), 올리버 넬슨의 [블루스와 추상적 진실 Blues & the Abstract Truth], 롤랜드 커크의 [도미노 Domino](이상 1962년), 존 콜트레인의 [영감 Impressions], 앤드류 힐의 [블랙 파이어 Black Fire], 재키 매클린의 [도착지 이탈 Destination Out], 매코이 타이너의 [네 번째에 도달하다 Reaching Fourth](이상 1963년) 등 그의 디스코그라피는 대충 뽑아봐도 1950~’60년대 에센셜 재즈 앨범 목록에 대거 포함된다.
하지만 로이 헤인스의 가치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60년대 후반 이후의 밴드에서도 여전히 왕성하게 그의 연주를 제공했는데 게리 버턴 쿼텟의 [더스터 Duster], 칙 코리아의 [그는 지금 노래하고, 그는 지금 흐느낀다 Now He Sings, Now He Sobs](이상 1967년), 파로아 샌더스의 [생각의 보석 Jewels of Thought], 리언 토머스의 [알려진 정신, 감춰진 정신 Spirits Known and Unknown](이상 1969년), 래리 코리얼의 [맨발의 소년 Barefoot Boy](1971년)과 같은 앨범에서 들려준 로이 헤인스의 연주는 그의 스타일이 시대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50~’60년대 초에 전성기를 보냈던 모던재즈 드러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특히 게리 버턴, 칙 코리아와의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었고 그것은 팻 메시니와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팻 메시니의 [질문과 대답 Question & Answer](1989년), 칙 코리아의 [버드 파월을 기억하며 Remembering Bud Powell](1997년), 게리 버턴의 [마음처럼 Like Minds](1998년) 등은 로이 헤인스가 참여한 20세기 후반의 명반들이다.
스냅 크래클
로이 헤인스가 “단순한 보컬리스트가 아닌 위대한 음악가”라고 평했던 세라 본은 1954년 그녀의 스캣이 번뜩이는 <슐리어 밥 Shulie a Bop>을 녹음하면서 노래 중에 그녀의 트리오 멤버들을 호명했다. 그중에서 유독 드러머의 이름을 부를 때 ‘로이’와 ‘헤인스’ 사이에서 두 박자를 쉬는데 이때 드러머는 브러시와 베이스 드럼을 이용해 귀가 번쩍 뜨이는 폭발음을 삽입했다. 모든 명연주자가 그렇듯이 로이 헤인스의 드럼 사운드에는 변별력이 있었다. 힘이 있으면서도 둔탁하지 않고 날렵하고 명료한 그의 스네어 드럼 사운드를 두고 베이시스트 앨 매키본은 저 강한 손목에서 장작이 타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스냅 크래클(Snap Crackle)’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로이는 이 별명을 제목으로 곡을 만들어 그의 명반 [오후의 외출 Out of the Afternoon](1962년)에서 발표했는데 세라 본이 했던 방식으로, 이번에는 그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로이’와 ‘헤인스’ 사이에 강렬한 스네어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어디 스네어 소리뿐인가. 그의 심벌 소리는 섬세하고 화려하면서도 귀에 거슬리는 법이 없다. 그가 이끈 연주 가운데는 드럼 솔로를 전주로 삼아 시작하는 곡이 꽤 많지만 그것 때문에 음악의 균형이 깨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정확한 리듬을 갖고 있으면서도 심벌로 라이드 리듬을 일일이 제시하는 스타일이 아니란 점에서 선구적이었다. 그의 연주 경력은 194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드럼 스타일로 보자면 엘빈 존스나 폴 모션, 잭 디조넷, 토니 윌리엄스와 같은 포스트 밥 드러머에 보다 가까웠다. 음악이 진행되면서 그 열기가 고조될 때 그의 라이드 심벌과 하이햇 그리고 베이스 드럼은 점점 기본 박자에서 벗어나 독주 악기들과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드럼은 리듬적이면서 동시에 선율적이었다.
피아니스트 다닐로 페레즈, 베이시스트 존 패티투치와 함께 한 앨범 [로이 헤인스 트리오 The Roy Haynes Trio](1999년)에서 이들이 들려준 멍크의 곡 <초록굴뚝 Green Chimneys>은 적절한 보기다. 로이를 모던 드러밍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팻 메시니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이는 매번 아름다운 연주를 만들어 낼 뿐만이 아니라 함께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적 지혜를 베풀 수 있는 예민한 귀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로이는 자신의 연주가 여러 세대를 통과하면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단순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 자신을 스윙 드러머라고 생각해요. 난 ‘스윙’이라는 단어 그대로 연주하는 사람이에요. 모던터치를 겸한 옛날 방식의 스윙 드러머인 거죠.”
만년의 전성기
1940년대부터 사이드맨으로서, 레코딩 세션맨으로서 일선에서 활동했던 로이 헤인스이지만 ’50년대부터 그는 틈이 나는 대로 자신의 앨범을 늘 녹음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시대의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나 맥스 로치의 그늘에 가려 있었는데 그 점은 그가 정규 밴드 리더로서의 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0년대 들어서서 그는 자신의 밴드 힙 앙상블을 조직했지만 이미 재즈 록, 재즈 펑크(Funk)의 바람이 뒤덮고 있던 시절에 그의 음악은 팬들과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가 밴드 리더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일흔을 앞두고 있었던 1990년대 초부터였다. 이때 로이 헤인스 그룹의 핵심 멤버였던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키코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팔과 다리로 만들어 내는 악센트는 그 이전의 어떤 드러머들의 것보다 복잡합니다. 그가 개발한 싱커페이션은 오늘날의 모든 재즈 드러머들에게 영향을 끼쳤죠.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그의 연주가 자연스럽기 때문이죠. 그가 연주하는 방식은 그가 말하는 방식이고, 걸어가는 방식이며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헤인스의 나이 70대 후반이었던 2000년대 초에 그는 새로운 밴드 ‘젊음의 샘(The Fountain of Youth)’을 결성했다. 이 밴드의 멤버들은 재릴 쇼, 로버트 로드리게스, 마커스 스트리클랜드, 데이비드 웡 등 당시 촉망받는 20대의 신인 연주자들이었다. 로이 헤인스는 이에 대해서 말했다. “무대에 올라가서 함께 연주할 때 우린 모두 동갑입니다.”
’90년대 이후 밴드 리더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는 재즈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서 비로소 인정받았다. 1994년 그는 덴마크의 재즈파 프라이즈를 수상했고 ’95년에는 미국 국립예술기금(NEA) 재즈 마스터로 선정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학 훈장을 받았는데 그는 덱스터 고든, 맥스 로치, 엘라 피츠 제럴드에 이어서 이 훈장을 받은 네 번째 재즈 음악인이었다. 그의 나이 83세였던 2006년 로이 헤인스는 드럼 전문지 <모던 드러머 Modern Drummer>의 독자들이 뽑은 ‘올해의 드러머’였으며 2001년부터 2010년까지, 2006년을 제외하고 9년 동안 <다운비트> 평론가들이 선정한 최우수 드러머로 연이어 선정되었다. 그래미(2012년)와 미국 재즈 재단(2019년)은 그에게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1960년 남성잡지 <에스콰이어 Esquire>로부터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되었던 그는 카우보이 모자, 선글라스, 멋진 구두와 샌들로 노년에도 젊음을 잃지 않았던 스타일리스트였으며, 아울러 그의 앨범 [찬사 Praise]의 실린 커버 사진이 보여주듯이 그는 1970년대 제작된 브리클린 SV-1 모델을 애지중지했던 클래식 스포츠카 마니아였다. 아들인 코넷주자 그레이엄 헤인스와 손자인 드러머 마커스 길모어는 그가 재즈계에 남긴 혈육들이다.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사진/Bob Parent, Jose Nieto, Leslie K. Haynes, Theo Wargo,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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